FeverStory

혈사문의 마지막 밤

6화

돌문이 닫힌 뒤, 진사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수련실 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숨을 두 번 들이쉬었다. 세 번째 들숨에서 단전에 기운을 모았다. 축적된 내공은 적었다. 삼 년 동안 폐사에서 익힌 심법의 기초만이 몸에 배어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비급 후반부의 첫 구결이 떠올랐다. 스승이 마지막으로 가르친 초식의 연장선이었다. 기운을 명문혈에서 시작해 독맥을 타고 옥침까지 밀어 올렸다가, 임맥을 따라 단전으로 되돌리는 순환. 단순한 원리였다. 하지만 그 경로를 처음 열 때의 통증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내공이 경맥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자 손끝이 저렸다. 이윽고 팔뚝 안쪽이 뜨거워졌다. 새로 열리는 혈도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이게 첫 관문이다.

스승의 목소리였다. 진사현의 호흡이 한 박자 빨라졌다.

삼 년 전 폐사의 훈련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고, 사형제들의 신발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날이 마지막 수련이 될 줄은.

“사현아.”

스승이 등을 보이며 서 있었다. 검을 쥐지 않은 손이 허공에 검의 궤적을 그렸다.

“한 번만 더. 초식을 보여라.”

눈앞의 환영이 선명해졌다. 진사현은 비급을 펼친 채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으며 읽어 내려갔다. 구결은 계속 이어졌다. 기운의 흐름을 유지하면서도 의식은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피해!”

사형의 외침이었다. 이번에는 다른 기억이었다. 폐사의 밤.

벽장 틈새로 보이던 광경이 겹쳐졌다. 사형제 하나가 가슴에 검을 꽂은 채 무릎 꿇었다. 이어서 둘째 사형이 옆으로 쓰러졌다.

진사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기억 속에서 스승의 목이 날아갔다. 전대의 문주인 사백이 검을 내리치던 순간, 진사현은 벽장 속에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에 걸렸다.

내공의 흐름이 흔들렸다. 명문혈 근처에서 기운이 맺혔다. 통증이 허리에서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혈도 하나가 과도한 긴장으로 경련을 일으킨 신호였다.

웅, 하고 울리는 소리가 귀 안에서 났다.

스승의 유언이 기억 깊은 곳에서 울려왔다.

“사현아…… 이 비급만은……”

끝까지 말하지 못한 문장이었다.

진사현은 이를 악물었다. 기억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그 감각을 그대로 안고 내공을 순환시켰다. 스승의 유언과 사형제들의 죽음은 지금 팔뚝을 찌르는 통증과 다르지 않았다. 몸에 밴 것이었다.

비급 구결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네놈 스승은 마지막 관문을 넘지 못했다.”

철면노괴의 말이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진사현은 호흡을 늦췄다. 일호흡의 간격을 갑자기 두 배로 늘렸다. 혈도를 억지로 밀어 넣는 대신 기운을 주변 경맥으로 분산시켰다. 내상으로 번질 수 있는 울혈을 흩트리는 방식이었다.

기억은 여전했다.

벽장 틈새의 어둠. 흘러내리던 피비린내. 사백이 돌아서던 발소리.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스승이 보지 못한 길.

진사현은 비급의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손가락이 스승의 글씨를 더듬었다. 후반부의 중간쯤.

스승이 마지막으로 수련하던 지점이었다. 잉크가 약간 번져 있었다. 손바닥에 오래 쥐고 있던 흔적이었다.

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다시 모았다. 이번에는 더 느리게, 더 정확하게.

명문혈에서 독맥으로. 척추 중간쯤에서 혈도 하나가 막혀 있었다. 진사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운을 열 번에 걸쳐 조금씩 밀어 넣었다. 한 번에 열려고 하면 경맥이 찢어질 수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건 스승이 가르친 방식이 아니었다. 진사현이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익힌 인내였다.

혈도가 열렸다. 통증이 척추를 따라 올라갔다가 뒷목에서 흩어졌다. 동시에 사형제 하나가 쓰러지던 모습이 더 이상 통증을 일으키지 않았다. 진사현은 몸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억은 여전히 선명한데, 그 감정만이 조금씩 무뎌져 갔다.

기초 원리가 몸에 박히기 시작했다. 내공은 축적된 연공만큼만 움직였다. 지금 진사현의 내공은 삼 년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비급 구결에 따라 움직이는 기운은 효율이 달랐다. 적은 힘으로도 경맥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내공이 늘지는 않았다. 대신 낭비가 줄었다.

진사현은 눈을 떴다. 어둠이 익숙해졌다. 벽면의 돌기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내뱉었다. 폐부 깊은 곳에서 탁기가 빠져나갔다.

비급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넘겼던 페이지 가장자리를 스쳤다. 스승의 손때가 묻은 자리였다.

“이 비급만은……”

진사현이 중얼거렸다. 이어질 말은 없었다. 대신 손바닥으로 비급 표지를 짚었다. 스승이 마지막으로 만졌을 바로 그 자리였다.

기억은 의식 표면에 남았다. 벽장 틈새의 어둠과 비린내, 스승이 쓰러지던 모습은 지금도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경맥을 뒤흔들지 않았다. 단지, 거기 있을 뿐이었다.

진사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호흡이 느려졌다. 기운이 단전에 가라앉으며 수련의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동굴 안에서 진사현의 내공이 한 차례 순환을 마치고 단전에 가라앉는 동안, 동굴 밖의 위소월은 그 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랭한 산바람이 동굴 입구의 돌문을 스쳤다. 바위 틈새로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위소월은 바위에 걸터앉아 무릎을 감싸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철면노괴는 세 걸음 옆 바위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호흡이 느리고 얕았다. 잠든 것인지 명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위소월이 일어섰다. 바닥에서 돌가루가 뜨겁지 않게 떨어졌다.

“노前辈.”

철면노괴의 눈꺼풀이 열렸다. 백내장 사이로 회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위소월의 얼굴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뭘 원하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듣고 싶다.”

“예.”

철면노괴가 닫았던 눈을 다시 떴다. 동굴 천장을 바라보며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촛불이 없는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만 희미하게 움직였다.

“옛 제자 이야기인가.”

위소월이 대답을 고르는 사이, 철면노괴는 스스로 말을 이었다.

“말할 게 없네.”

“……그래도.”

“죽었어.”

위소월이 손을 내렸다. 엉덩이 옆 단도 자루가 손목에 닿았다.

“어떻게.”

“사흘을 고문당했네. 쟁기혈이 뚫린 채로.”

철면노괴의 목소리는 기억을 외우는 게 아니라 상처를 만지는 소리였다.

“비급 구결을 불라고. 놈의 손아귀에.”

“……서율이.”

“그래.”

위소월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혀끝으로 입술을 적셨지만 침마저 모자랐다.

“노前辈께서는…… 그 자리에.”

“늦었어.”

철면노괴가 왼팔을 움직였다. 팔꿈치가 거꾸로 꺾인 자세 그대로였다. 관절이 마른 대나무처럼 울퉁불퉁했다.

“이미, 그 녀석의 몸은 이 꼴보다 더했네.”

한참 침묵이 있었다. 바람 소리만 동굴 입구를 때렸다.

“그래서.”

위소월이 손톱을 파고들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 저 사람을 막지 않으시는 겁니까.”

철면노괴가 고개를 약간 돌렸다. 위소월을 똑바로 봤다. 시선이 닿자 위소월의 어깨가 굳었다. 이전에 느꼈던 압도감과는 달랐다. 더 차갑고, 더 늙은.

“저 사람.”

“진사현 말입니다.”

“막는다고.”

철면노괴의 눈꺼풀이 반쯤 감겼다.

“누가.”

“……노前辈께서요.”

“듣지 않네. 저 자는.”

위소월이 숨을 들이켰다. 말이 빨라졌다.

“그런데도 비급 마지막 장은…… 그건.”

“육체를 제물로 바칠 때만 열리는 거.”

철면노괴가 말을 잘랐다.

“알고 있네. 나도. 저 자도.”

“그럼 왜!”

위소월의 목소리가 동굴 안으로 울려 퍼졌다. 자기 목청에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물었다.

철면노괴는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을 들어 왼팔을 한 번 톡톡 두드렸다.

“죄책감이지.”

“……뭐라고요.”

“스승을 지키지 못했다는. 문파를 지키지 못했다는.”

철면노괴가 허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나는 녀석을 지키지 못한 죄, 저 자는 스승 앞에 무릎 꿇을 기회조차 없었던 죄.”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등의 푸른 핏줄이 꿈틀거렸다.

“같아. 닮았어.”

위소월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앞서 있던 당고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으로 쏠렸다.

“……그럼 그는.”

목소리가 잠겼다. 한 번 삼키고 나서야 말이 나왔다.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으면서, 거기에 또 자신을 바치겠다는 겁니까.”

철면노괴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위소월의 가슴을 더 세게 쳤다.

“그건.”

위소월이 두 손을 꼭 쥐었다. 화상 흉터가 손등 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건 복수가 아니라…… 집행이네요. 자신에 대한.”

“알아듣는군.”

철면노괴가 눈을 감았다. 호흡이 다시 느려졌다. 동굴 전체의 기운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화는 끝났다.

위소월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이 저렸다. 눈앞에 돌문이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다시 불자 철면노괴의 머리카락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백발 사이로 많은 세월이 스며 있었다. 위소월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리로 물러났다. 바위에 앉았다. 무릎을 감싸는 대신 두 손을 단도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눈은 감지 않았다. 돌문을 그대로 응시했다.

산등성이에는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렸다.

서율이 혈사문 정예 셋을 이끌고 동굴 동쪽 능선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흐린 하늘 아래 산바람이 제법 거셌다. 진홍색 부문주 예복 자락이 바람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바위 뒤에 서서 동굴 입구를 내려다봤다. 왼손 의수를 오른손이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부하 한 명이 허리를 숙이고 다가왔다.

“문주님, 인원 배치를……”

“기다려.”

서율이 손을 들었다. 부하가 즉시 물러섰다.

거리는 백여 장 남짓. 시야는 충분히 열려 있었다. 동굴 입구 주변의 바위 배치, 바람에 흔들리는 칡넝쿨, 바위에 앉은 소녀 협객의 당고까지 낱낱이 보였다.

“노인네는 안 보이는군.”

서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입가에 옅은 비틀림이 떠올랐다.

“동굴 안이겠죠.”

다른 부하 대답했다. 서율은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 바람이 능선 아래 소나무 숲을 훑고 지나갔다.

“문주님. 저희가 바로 압박하면.”

“아니.”

서율이 왼손 의수를 들어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금사로 수놓은 독룡의 눈이 흐린 빛 속에서 번득였다.

“수련 중인 놈을 깨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아직 빛이 새지 않았고, 밤도 아니다.”

손을 내렸다.

“나올 때까지 기다려라.”

부하 셋이 동시에 포권했다.

“예.”

서율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바위 위로 올라서자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 동굴 입구에서 시작된 비탈이 좁은 산길로 이어졌고, 그 길은 소나무 숲 사이로 꺾여 들어갔다.

“이 길밖에 없다.”

서율이 손가락으로 산길을 따라 그었다.

“나오는 순간이 가장 무방비하다. 기는 흐트러지고, 근육은 풀리고, 정신은 무공의 잔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입술 가장자리가 올라갔다. 비아냥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때.”

세 부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 명이 손을 검자루에 올렸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면 충분하다.”

서율이 의수를 들어 올렸다. 갈고리처럼 굳은 철제 손가락이 바람을 쥐었다 놓았다.

“너희는 동굴 입구 좌우로 흩어져 매복해라. 움직임이 있거든 신호 하나. 나는 여기서 전체를 본다.”

“예, 문주님.”

부하들이 허리를 굽히고 능선 아래로 흩어졌다. 발소리가 바위를 밟으며 멀어졌다.

서율은 혼자 남았다. 바람이 예복을 때렸다. 금사 독룡이 뒤틀렸다. 그는 동굴 입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왼손 의수의 철제 관절이 덜그럭 소리를 냈다. 짧게, 두 번. 손가락이 바람 아래로 느리게 움직였다.

동굴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서율이 혈사문 정예 셋을 이끌고 동굴 동쪽 능선에 도착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흐린 하늘 아래 산바람이 제법 거셌다. 진홍색 부문주 예복 자락이 바람에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는
혈사문의 마지막 밤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