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혈사문의 마지막 밤

7화

진사현의 등 뒤에서 촉각이 일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내공이 네 번째 순환점에 닿기 직전, 경맥 한 곳이 갑자기 수축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혈도를 틀어막은 듯했다. 사흘째 같은 지점이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다섯 번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비에 젖은 먼지, 젖은 나무, 부패하기 시작한 핏자국이 섞인 냄새. 벽장 틈새로 새어 들어오던 그 밤의 공기였다.

진사현은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왼쪽 손목이 경련했다. 스승이 마지막으로 단전을 점검해주며 쥐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시야가 갈라졌다. 수련석의 암흑이 사라지고 벽장의 좁은 틈이 나타났다. 스승의 목검이 손에서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 전, 스승의 목이 먼저 기울었다. 식은 피가 천천히 어깨를 적셨다. 대사형이 먼저 쓰러졌다.

왼쪽 무릎이 꺾이고 오른팔이 등 뒤로 접혔다. 이사형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입만 벌렸다. 소사형의 손이 바닥을 긁었다. 손톱이 뒤집혔다.

“사현아.”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이 날아간 후였다.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됐다.

“너는 보지 마라.”

진사현의 오른손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무복을 뚫고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는…… 살아야 한다. 이 비급은 네게……”

스승의 유언은 거기서 끊겼다. 원래도 그랬다. 피가 바닥을 채우는 소리, 시체가 넘어지는 소리, 웃음소리만 선명했다. 진사현은 그 웃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내공이 역류했다. 단전에서 출발한 기운이 명문혈을 찌르고 반대로 치솟았다. 식은땀이 이마를 덮었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 속이 뒤집혔다.

벽장 틈새 너머로 누군가 검을 뽑았다. 검날에 등불이 반사됐다. 나흘 전 동수루 약재상에서 꺾은 혈사문 외청 부문주의 검.

그 검이 스승의 목을 벤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심마는 그런 논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검날이 빛나고, 다시 스승이 쓰러졌다.

반복이었다. 진사현은 눈을 떴다. 수련석의 어둠이 돌아왔지만 귀에서 웃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닫아라.”

자신의 목소리였다. 심마를 몰아내려면 내공 순환을 중단해야 했지만, 사흘을 버리는 일이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서율은 밖에 있었다.

눈을 감고 호흡을 다시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억누르지 않았다. 기억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스승의 목이 떨어지는 소리, 대사형의 무릎이 꺾이는 소리, 소사형의 손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 웃음소리까지 있는 그대로 두었다.

내공이 움직였다. 기억을 막는 데 쓰던 힘을 내공 순환에 실었다. 기운이 혈도를 통과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순환, 두순환. 억누르지 않으니 오히려 길이 열렸다.

환영이 흐려지고 벽장 틈새가 멀어졌다. 대신 다른 그림이 나타났다. 두 개의 기둥이 천장을 향해 뻗어 중간쯤에서 구부러져 서로를 감쌌다. 뒤틀린 팔 같은 형상이었다.

그 앞에 한 줄의 글이 떠올랐다. 비급의 필체였다.

“네 몸이 곧 열쇠다.”

글자가 흩어지고 다시 모였다. 관절이 뒤집힌, 말라붙고 굳은 살점의 형상이 선명해졌다. 철면노괴의 팔과 같았다. 철면노괴의 목소리가 동굴을 때렸다. 심마가 만들어낸 메아리였다.

“팔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느냐.”

진사현은 대답하지 않고 형상을 똑바로 보았다. 왼팔인지 오른팔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글자가 다시 깜빡였다.

“비급의 마지막 장은 육체를 제물로 바칠 때만 열리는 문이다.”

지난번 동굴 밖에서 직접 들은 말이었다. 심마가 반복하고 있었다. 진사현은 호흡을 놓치지 않았다.

기운이 척추 중앙의 막힌 혈도를 통과하는 순간, 팔뚝의 근육이 저절로 수축했다. 통증은 없었지만 감각이 무뎌졌다. 마치 팔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았다. 진사현은 그 감각을 거부하지 않았다.

형체가 흩어지고 글자도 사라졌다. 동굴은 다시 완전한 암흑이 되었다. 진사현은 가부좌를 유지한 채 내공을 다섯 번째 순환으로 넘겼다. 무복은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바람이 멎었다. 위소월은 바위에 걸터앉아 무릎을 세운 채, 허리춤에서 뺀 단도를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동굴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사현은 나오지 않았다.

철면노괴도 한 시진쯤 전에 자리를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였다. 하늘은 구름에 가려 별빛조차 없었다.

그때 빛이 보였다.

산등성 너머 소나무 숲 사이로 주홍빛 점이 스쳤다. 하나, 둘, 셋. 흔들리며 움직였다.

횃불이었다. 위소월의 등이 곧게 펴졌다. 시선을 고정했다.

넷, 다섯, 여섯. 여섯 개의 횃불이 산길을 따라 움직였다.

숨을 죽이고 바위 아래로 몸을 낮췄다.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속에서 얕은 바위를 밟는 소리,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렸다. 훈련된 걸음이었다. 방향은 동굴 쪽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여섯. 많았다.

혈사문 정예라면 더더욱 무리였다. 횃불 사이 거리로 속도를 가늠했다. 빠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눈치였다. 반 시진. 그 안에는 동굴 입구에 도착할 터였다.

동굴 안에서는 아직 아무 기척도 없었다. 진사현은 수련 중이었다. 가장 무방비한 때라는 걸 위소월은 알고 있었다.

서율은 알고 있었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소월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서율이 이 장소를 알게 된 이유를 생각했다. 혈사문의 추적은 빨랐다.

누군가 길을 알려준 것 같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이틀 전인가, 사흘 전인가.

혈성단 순찰 기록을 뒤지던 습관이 떠올랐다. 자신의 순찰 보고가 그들의 수색 범위를 좁혀주었다. 무의식중에 정보를 흘린 셈이었다.

손에 쥔 단도가 떨렸다. 떨림은 곧 멎었다.

여섯 개의 횃불이 소나무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반 시진. 그게 추적대의 규모였고 그게 남은 시간이었다.

위소월은 동굴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쪽은 칠흑이었다.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진사현이 지금 나올 수 없는 상태라는 것만 확실했다.

바위에서 내려와 단도를 허리춤에 꽂았다. 나머지 두 자루의 손잡이를 차례로 확인하고 자루를 바깥쪽으로 돌렸다.

등을 동굴 입구 쪽으로 두고 섰다. 그 앞에 혼자 서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손끝이 아직 차가웠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위소월은 바위에서 내려와 허리춤 단도 세 자루를 차례로 짚었다. 동굴 입구를 돌아봤다. 돌문은 닫혔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부싯돌로 송진 묻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횃불을 높이 들었다. 의도적으로 불빛이 소나무 가지 사이로 새게 했다.

동굴과 반대 방향인 북쪽 능선을 향해 걸었다. 발을 끌며 흙이 패인 곳을 골라 밟아 발자국을 선명히 남겼다. 오른손 단도로 낮은 가지들을 베어내며 지나간 흔적을 만들었다.

약 삼십 장 떨어진 곳에서 횃불을 바위 틈에 꽂아 두고, 몸만 북서쪽 바위 지대로 숨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둘.

“저기.”

“횃불이다.”

추적대 둘이 횃불 아래 멈춰 섰다. 하나가 쪼그려 앉아 바닥을 살폈다.

“발자국이다. 이쪽으로.”

“한 명인가.”

“북서쪽이다. 놓치지 마라.”

두 그림자가 횃불을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소월은 그들이 삼십 장쯤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거리는 오십 장, 칠십 장으로 벌어졌다.

반 시진쯤 지났을 때,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넷이었다. 위소월은 협곡 입구 바위에 몸을 붙이고 양손에 단도를 뽑았다. 손끝이 떨렸지만 억지로 멈췄다.

“흔적이 여기서 끊겼다.”

“주변을 뒤져라.”

위소월은 호흡을 세 번 세고 뛰쳐나갔다. 가장 가까운 추적대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챙. 막혔다. 삼십 대 중반, 혈사문 외청 무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찾았다.”

등 뒤에서 두 번째 추적대가 달려들었다. 몸을 틀며 왼손 단도로 막았다. 두 검이 동시에 내리찍혀 충격이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뒤로 세 걸음 밀려 바위에 등이 닿았다.

“잡아라. 문주님께서 산 채로——”

말이 끝나기 전에 위소월이 몸을 던졌다. 첫 번째 추적대의 다리를 향해 단도를 내리꽂다가 막히자, 땅을 박차고 옆 바위를 두 걸음 달려 올라갔다. 추적대 둘이 동시에 검을 뻗었다. 몸을 뒤로 젖혔으나 왼쪽 어깨를 검이 스쳤다. 살갗이 갈라지며 화끈한 통증이 번졌다.

오른쪽 무릎이 흙에 닿으며 착지했다. 왼쪽 어깨 피가 팔꿈치까지 적셨다. 추격하려는 발소리를 들으며 오른손 단도를 입에 물고, 미리 보아둔 바위 밑동의 돌덩이를 잡아당겼다. 돌덩이가 경사면을 타며 다른 돌들을 건드려 바위 두 개가 연달아 무너졌다.

“피해!”

낙석이 협곡 입구를 반쯤 막고 먼지가 자욱했다. 위소월은 달렸다. 바위 모서리에 옆구리를 부딪혀 숨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가 찔렀다. 협곡 반대편 나무 사이로 숨어 어깨 피를 바지에 닦고 단도를 칼집에 꽂았다.

뒤에서 외치는 소리.

“서쪽이다! 서쪽 계곡으로 빠졌다!”

발소리가 서쪽으로 멀어졌다. 위소월은 나무 등걸에 등을 기댔다. 숨을 몰아쉬며 왼손으로 어깨 상처를 눌렀다.

손바닥에 피가 묻었다. 눈을 감고 동굴 방향을 가늠했다. 복귀하려면 반 시진은 걸릴 거리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옆구리를 감싸 쥐고 동굴 쪽으로 한 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동굴 안. 진사현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단전의 기운이 척추 중간쯤에서 막혔다. 눈을 떴다.

동굴 바깥에서 낙석 소리, 검과 단도가 부딪치는 쇳소리. 멀었다. 손가락을 풀어 양손을 무릎에서 내렸다. 역류한 기운에 경맥이 타는 듯했지만 무시했다. 허리춤 단검을 확인하고 비급은 품에 그대로였다.

다리가 저렸고 굳은 근육이 당겼다. 벽을 짚고 일어나 동굴 입구로 걸었다. 돌문에 양손을 대자 문틈으로 찬 바람과 피 냄새가 스몄다. 손에 힘을 주었다. 돌문이 천천히 밀렸다.

동굴 밖. 하늘은 어두웠고 별빛만 드물었다. 바위는 차가웠다. 위소월이 앉아 있던 바위는 비어 있었다.

진사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북쪽 능선 쪽을 훑었다.

동굴 입구에서 십여 장 떨어진 바위 옆 땅에 검은 피가 떨어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찍자 묽고 차가웠다. 한 시진 가까이 지난 피였다. 그 옆에는 잘린 소나무 가지들이 흩어져 있었고 베인 자국은 위소월의 단도 날과 일치했다.

더 북쪽으로 두 개 신형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하나는 작고 가벼운 위소월의 것, 나머지는 크고 무거운 군화 자국이 둘 이상. 발자국을 따라 삼십여 장을 걸었을 때 바위 아래서 혈성단 패찰 조각이 반짝였다. 가장자리가 깨져 있었고 표면에 굳기 시작한 피가 묻어 있었다.

진사현은 패찰 조각을 쥐고 엄지로 피 묻은 면을 문질렀다. 눈을 감았다 떴다. 찬 공기를 들이켜며 눈앞에 십삼 년 전 스승의 등이 떠올랐다. 쓰러진 사형제들, 돌아보지 않던 스승.

“사현아.”

귓가를 때리는 음성에 눈을 떴다. 손가락이 패찰 조각을 더 세게 쥐었고 가장자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그 순간 서쪽 하늘에서 붉은 빛이 솟아올랐다. 화살이 밤하늘을 가르고 정점에서 터져 선홍색 불꽃이 세 궤적으로 갈라졌다. 혈사문 신호 화살.

불꽃이 흩어지며 서쪽 계곡으로 떨어졌다. 진사현의 눈동자가 그 방향으로 고정됐다. 턱이 올라갔다. 패찰 조각을 비급 접힌 자리 바로 위, 심장 가까운 곳에 넣었다. 허리춤 단검을 한 번 만지고 서쪽을 향해 첫걸음을 뗐다.

혈사문의 마지막 밤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