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혈사문의 마지막 밤

8화

서녘 하늘의 붉은 불길이 사그라지고 잔불만 깜박였다.

진사현은 왼쪽 어깨를 바위에 붙였다. 내공이 불안하게 출렁였다. 경맥을 타고 거슬러 오른 기운이 손끝을 떨리게 했다.

눈을 감고 호흡을 세 번.

서쪽이다.

첫발을 내딛자 오른 무릎이 약간 꺾였다. 수련 피로가 다리 마디마디에 고여 있었다. 무시했다. 두 번째 걸음이 더 빨랐다.

동굴 입구에서 서쪽 길은 좁았다. 소나무 가지가 어깨를 후려쳤다. 바닥에는 돌부리가 삐죽 솟아 걸음을 자꾸 헛디디게 했다. 달빛이 이따금 바위 틈으로 스며들 뿐, 숲속은 짙게 내려앉은 어둠이었다.

십여 장을 가며 발자국을 뒤쫓았다. 작은 자국이 불규칙하게 찍혀 있었다. 오른발은 깊고 왼발은 질질 끌린 흔적.

어깨 부상을 움켜쥔 채 달아난 걸음걸이였다.

더 아래로 군화 자국이 겹쳐 나타났다. 둘이 쫓고 하나가 도망친 궤적. 진사현은 자국 옆 바위에 묻은 피를 손끝으로 찍었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끈적임.

방향을 틀었다. 발자국이 북쪽 절벽 쪽으로 꺾여 있었다. 추격하는 발이 둘에서 셋으로 늘어난 지점이었다. 낙엽이 심하게 헤집혀 있었다. 몸싸움이 벌어진 자리였다.

절벽 아래쪽에서 바람에 실려 온 소리가 들렸다.

“찾았나.” “아직.”

진사현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손잡이를 틀어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실렸다.

목소리는 둘이었다. 절벽 아래 작은 공터에서 횃불 하나가 흔들렸다. 불빛이 바위에 그림자를 덧칠했다. 혈사문 옷차림의 사내 둘이 검을 뽑은 채 서 있었다.

그들이 에워싼 바위 밑, 어둠 속에 작은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위소월.

왼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다. 오른손은 여전히 단도를 쥐고 있었지만, 칼끝이 바닥을 향해 늘어져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나와라. 문주님께서 확인하실 게 있다.”

혈사문 사내 하나가 한 걸음 다가섰다.

위소월의 칼끝이 올라갔다. 마구 떨렸다.

“더 오시면 찌릅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진사현의 눈매가 좁혀졌다.

혈사문 사내가 웃었다.

“그 몸으로?”

그 순간 진사현이 바위에서 뛰쳐나왔다.

단검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뒤쪽 사내의 오른 무릎 뒤를 찔렀다. 힘줄이 끊어지는 감각.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앞쪽 사내가 돌아보기도 전에 진사현의 칼날이 목덜미에 닿았다. 날선 쇠가 살갗을 눌렀다.

“움직이면 죽는다.”

사내가 숨을 삼켰다. 손에 쥔 검이 덜컹거렸다. 진사현은 왼손으로 사내의 오른 손목을 꺾어 검을 떨어뜨렸다. 무릎 꿇은 자의 등 뒤로 돌아서며 머리채를 잡아 위로 젖혔다.

단검을 치켜든 손에 힘이 실렸다.

“몇 명이 더 있나.”

“……모른다.”

칼날을 조금 밀어 넣자 피 한 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둘, 둘뿐입니다! 대장은 저쪽 골짜기에서 신호를 기다립니다!”

진사현의 단검이 옆으로 움직였다. 칼끝이 목 핏줄 옆을 스쳤다. 사내의 눈이 뒤집혔다. 손을 놓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의식만 끊은 일격이었다.

바위 밑으로 걸어갔다. 위소월이 단도를 겨눈 채 떨고 있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진사현이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단도를 쥔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뼈만 남은 듯 가늘었다.

손목을 감싼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나다.”

위소월의 눈에 천천히 초점이 돌아왔다. 입술이 떨리며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숨만 토했다. 진사현은 오른손으로 위소월의 왼쪽 어깨 상처를 짚었다.

길이 세 치. 뼈에는 닿지 않았다. 소매를 찢어 지혈점을 눌렀다.

“돌아간다.”

위소월이 고개를 저었다. 왼손이 진사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동굴…… 추적대가……”

“둘은 죽었다. 나머지는 나중이다.”

위소월이 말을 잇지 못했다. 턱이 바르르 떨렸다. 진사현은 위소월의 왼팔을 자신의 오른 어깨에 걸쳤다. 오른손으로 허리를 받쳐 일으켰다.

위소월의 체중이 기대왔다. 가벼웠다.

“죄송합니다.”

젖은 목소리였다.

“제가, 제가 혈성단에 보낸……”

“안다.”

“어떻게……”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안다.”

침묵이 흘렀다. 발걸음만 돌부리에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그 말은 더 하지 마라.”

“하지만……”

“돌아가서 지혈부터 한다. 그게 먼저다.”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건조하고 짧았다. 그러나 위소월의 허리를 받친 손에는 아주 약한 떨림이 남아 있었다.

동굴 입구가 보였다. 바위 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공기 흐름에 횃불 하나 없이 어두웠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철면노괴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찾았나 보군.”

구석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만으로 상태를 읽은 듯했다.

“부상을 봐라. 갈비뼈도 의심스럽다.”

진사현이 위소월을 바위에 앉혔다. 손을 떼자 위소월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겨우 균형을 잡았다.

철면노괴가 눈을 떴다. 백내장이 덮인 회색 눈동자가 진사현을 응시했다.

“놈들의 선발대는 물러났다만 본대가 곧 올 게다.”

“안다.”

“네놈의 수련은.”

진사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품에서 비급을 꺼내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표지는 땀에 젖어 부풀어 있었다.

“아직이다.”

철면노괴가 비급을 굽어봤다.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지막 장까지 사흘.”

“그 전에 올 수도 있다.”

“그때는.”

철면노괴가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뒤틀린 왼팔의 갈고리 같은 손이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내가 시간을 벌지.”

위소월이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혼자……”

“네 녀석은 쉬거라.”

철면노괴가 위소월을 보지도 않고 말을 끊었다. 이미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것처럼.

“제자는 자기 싸움을 해야 하네. 스승 노릇은 스승이 하는 거고.”

진사현의 표정이 굳어졌다.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손목을 만졌다. 스승이 생전에 내공을 점검하며 잡던 자리였다.

“그 비급.”

철면노괴가 말을 이었다.

“마지막 장은 육체를 제물로 바칠 때만 열리는 문이다. 이미 말했을 게야.”

“안다.”

“무엇을 잃는지도.”

“……양팔. 근골이 뒤틀리고 관절이 터진다.”

위소월의 손이 바위를 긁었다. 손톱이 돌에 갈리는 소리가 동굴 안에서 날카롭게 울렸다.

철면노괴가 고개를 돌렸다. 동굴 깊숙한 곳, 암흑이 내려앉은 통로 쪽을 향했다.

“내 옛 제자도 그 길을 택했네.”

진사현의 눈빛이 변했다.

“서율에게 죽은……”

“그래.”

철면노괴가 잠시 말을 멈췄다. 바위 벽 너머로 바람이 지나는 소리만 들렸다.

“내 제자는 마지막 장을 열었네. 그리고 서율에게 잡혔지. 나는 늙은 몸으로 숨어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노인의 왼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쟁기혈. 녀석은 제자의 쟁기혈을 찔러 천천히 죽였네. 네놈의 사부처럼.”

진사현의 턱이 올라갔다. 오른손이 비급 위로 올라갔다. 손가락이 표지를 덮으며 무게를 실었다.

“복수의 끝은 허무할 거라 말하려는 건가.”

“말하지 않네.”

철면노괴가 몸을 일으켰다. 바위에 앉아 움직이던 때와 달리, 일어서자 동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허무한지 어떤지는 네놈이 겪을 몫이야. 내가 할 말은 하나뿐.”

노인이 등을 보이며 통로 쪽으로 걸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진사현이 비급을 집었다. 축축한 표지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이미 선택했다.”

철면노괴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동굴 입구는 내가 본다. 시간은 하루.”

통로 안으로 사라지기 직전, 노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그 이상은 못 버티네.”

발소리가 멀어지고 동굴은 다시 적막해졌다.

위소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 마세요.”

진사현이 비급을 품에 넣었다. 행동은 망설임이 없었다.

“부상부터 돌봐라.”

“저 때문에 그런 결정을……”

“아니다.”

진사현이 위소월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가 아래에서 위를 향했다. 야윈 얼굴에 동굴 천장의 습기가 방울져 떨어졌다.

“십삼 년 전에 이미 결정한 일이다.”

“하지만 두 팔이……”

“팔이 없으면 다리로 걷는다. 다리가 없으면 기어간다.”

진사현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위소월은 그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호박색 눈동자 속으로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

위소월의 눈에서 물기가 넘쳤다. 소리 없이 턱 끝에 고였다 떨어졌다.

“그럼 저는…… 저는 어떻게……”

“살아라.”

진사현이 일어섰다. 오른손으로 위소월의 머리카락에 묻은 피를 훑었다. 손끝이 이마를 가볍게 스쳤다.

“그걸로 됐다.”

돌아서 수련실로 걸었다. 등 뒤에서 위소월이 옷소매로 얼굴을 가리는 소리가 났다.

수련실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바깥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았다. 진사현은 벽을 더듬어 중앙의 평평한 바위를 찾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무릎 위에 비급을 펼쳤다.

손가락이 책장을 넘겼다. 익숙한 구결이 지나갔다. 앞부분의 호흡법, 중간의 경맥 운용도, 후반부의 투로 도해. 모두 읽었다. 이미 다 외운 부분들이었다.

마지막 장.

진사현은 손가락으로 표지 안쪽의 접착 부위를 눌렀다. 이전까지 꼼짝도 않던 봉인이 오늘은 달랐다. 앞까지 모두 익힌 손이 닿자 접착된 두 장이 살며시 벌어졌다.

젖은 듯 어두운 색의 비단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첫 줄.

‘차식은 팔맥을 거슬러 기해에 닿는다.’

진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팔맥을 거스른다는 건 역행 운기를 뜻했다. 내공 수련의 기본은 정방향 순환. 역행은 모든 경맥을 상하게 하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다음 구절.

‘기해에서 양완맥으로 갈라져 종향한다.’

양팔의 완맥으로 기운을 흘려보낸다는 말이었다. 읽기만 해도 손목이 저렸다. 진사현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 이어 읽었다.

구결은 점점 더 상식을 벗어났다. 기운을 관절 안에 가두고 뼛속으로 통과시킨다는 대목에서는 실제로 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렸다.

진사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첫 번째 구결에 따라 기운을 움직였다.

단전에서 시작된 내공이 천천히 치솟았다.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기운이 가슴을 지나 양팔로 흐르기 시작한 순간, 진사현은 이를 억지로 되돌렸다.

역행.

팔 안쪽에서 무언가 터지는 듯한 충격이 왔다. 근육이 기운을 거부하며 수축했다. 진사현은 턱을 깨물었다. 식은땀이 이마에 솟았다.

기운이 팔꿈치 관절에 닿자 둔탁한 파열음이 뼛속에서 울렸다. 오른쪽 팔꿈치의 인대가 늘어나는 감각. 이내 왼쪽도 같은 충격이 이어졌다.

구결을 놓치지 않고 계속 갔다. 관절 안에 기운을 가두고 빙글 돌리라는 지시였다. 진사현이 시도하자 팔 안쪽으로 칼날이 도는 듯한 통증이 퍼졌다.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기운이 손목에 닿았다. 완맥. 비급의 표현 그대로 ‘갈라져’ 흐른 기운이 손목뼈 사이를 비집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뼈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실제로 녹는 건 아니었다. 연골에 기운이 침투해 굳어갔다. 비급의 원리는 명확했다. 관절의 부드러움을 대가로 내공의 통로를 억지로 넓히는 것.

일 년 연공으로도 열리지 않을 혈도를 한순간에 뚫는 대신, 그 통로가 된 관절은 영영 굳어버린다.

진사현의 두 팔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땀이 등의 옷을 완전히 적셨다.

눈앞이 하얘졌다.

십삼 년 전 스승의 등이 보였다.

쓰러진 사형제들 사이로 피가 흘렀다.

스승이 돌아보지 않았다.

“사현아.”

그 순간 기운이 폭발적으로 회전했다. 막혔던 마지막 혈도가 열리며 단전에서 뜨거운 파동이 온몸으로 번졌다.

내공이 오 년 치, 십 년 치 축적된 것과 같은 무게로 몸 안에 가라앉았다. 동시에 양팔의 근골이 뒤틀리며 살속 조직이 찢어졌다.

피부 아래서 실핏줄이 터지는 소리가 진사현 자신에게는 천둥처럼 들렸다.

팔꿈치가 반대로 꺾이고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오그라들었다.

철면노괴의 왼팔과 같은 형상이었다.

양팔 모두가 그렇게 변형됐다.

진사현이 눈을 떴다.

동굴 천장의 암흑과 눈앞의 암흑이 분간되지 않았다. 호흡만 가쁘게 들렸다. 오른손과 왼손을 들어 올리려 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은 오그라든 채 굳었고 손목은 뼈가 튀어나와 비틀리게 꺾여 있었다. 팔꿈치는 정상 각도를 벗어나 뒤틀렸다.

진사현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기운은 안정적이었다. 단전은 깊고 묵직하게 고동쳤다.

경지가 올랐다.

스승의 유언을 떠올렸다.

‘네가 마지막 장을 열거라.’

진사현은 일어섰다. 팔은 축 늘어져 흔들렸다. 몸통의 움직임만으로 균형을 잡아야 했다.

발로 비급을 밀어 품 쪽으로 옮겼다. 굳은 손가락으로는 집을 수 없어 가슴으로 눌러 옷 안에 끼웠다.

수련실 밖으로 걸었다. 통로를 지나 동굴 앞쪽으로 다가서자 위소월의 숨소리가 들렸다.

위소월이 돌아봤다. 호박색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

진사현의 두 팔이 어둠 속에서 기이한 형상으로 드러났다. 위소월이 입을 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신음이 샜다.

“……말렸어야 했는데.”

“말려도 했을 거다.”

위소월이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진사현의 오른쪽 팔을 더듬었다. 손끝이 뒤틀린 관절을 짚었다.

“아파요…… 아파야 하는데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진사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굳어버린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려 애썼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동굴 입구에서 여러 개의 횃불이 일제히 켜졌다.

바깥에서 병사들의 발소리가 질서정연하게 다가왔다. 하나둘이 아니었다. 최소 사십 명 이상의 규율 잡힌 걸음걸이였다.

돌문 바깥에서 기름을 붓는 소리가 났다.

횃불을 동굴에 던져 넣을 준비였다.

동굴 입구 복판에 철면노괴가 서 있었다.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뒤틀린 왼팔만 허공에 살짝 들려 있었다.

서율의 목소리가 바깥에서 울렸다.

“사형. 나와라.”

느리고 능글맞은 어조였다.

“오랜만이다. 십삼 년 만인가.”

진사현이 걸음을 옮기려 했다. 철면노괴가 오른손을 들어 막았다.

“아직.”

돌문 너머로 횃불이 다가왔다. 연기가 동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율이 말을 이었다.

“비급을 내놓으면 살려주마. 네놈은 물론 그 옆에 숨은 것도.”

위소월의 호흡이 빨라졌다. 단도를 쥐려 했지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진사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철면노괴가 뒤를 돌아봤다. 회색 눈이 진사현의 망가진 양팔에 닿았다. 잠시 말이 없었다.

“끝까지 읽었군.”

“끝까지.”

“아픔은.”

“묻지 마라.”

철면노괴가 입가를 비틀었다. 웃음 같기도 했다.

“녀석들 데리고 안쪽으로 가게나. 뒷길이 있다. 내가 시간을 벌겠네.”

“함께 간다.”

“안 되네.”

철면노괴가 돌문을 향해 걸었다.

“네놈의 복수는 네놈이 해라. 내 원한은 내가 푼다.”

돌문에 손을 얹었다. 굳은 왼팔의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문틈에 걸렸다.

“옛 제자의 쟁기혈을 찔렀던 놈이다. 이 늙은이도 갚을 빚이 있네.”

진사현이 한 걸음 다가섰다. 팔은 움직이지 않아도 몸통으로 밀어내려는 자세였다.

철면노괴가 돌문을 열었다.

바깥의 횃불이 동굴 안으로 쏟아졌다. 병사들 너머로 진홍색 옷을 입은 서율의 실루엣이 보였다.

철면노괴의 몸이 바람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공을 온몸에 폭발적으로 회전시킨 자세였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노인의 팔과 다리가 관절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진사현이 위소월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으로 감아쥐었다. 두 팔은 굳었어도 몸통의 힘은 남아 있었다.

“간다.”

위소월이 따랐다. 다리가 풀렸지만 진사현에게 기대어 걸었다.

철면노괴가 동굴 밖을 향해 날아갔다. 거대한 쇳덩이처럼 적진 한가운데로 몸을 처박았다.

서율의 외침이 들렸다.

“막아라!”

동굴 안쪽으로 향하며 진사현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다.

철면노괴의 몸이 병사 셋을 꿰뚫으며 핏빛 안개를 일으켰다.

노인은 멈추지 않았다. 서율을 향해 무섭게 달려들었다.

횃불이 연이어 떨어지며 동굴 입구에 불기둥이 일었다.

진사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었다. 눈빛만 불길에 반사되어 붉게 타올랐다.

혈사문의 마지막 밤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