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우편배달부: 단절된 세계를 잇는 자
2화
휴게실 소파에 몸을 묻은 지 얼마나 됐을까.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냥 피로만 가득했다. 전생의 야간 배송 끝나고 귀가하던 새벽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다리만 무거웠지.
눈을 떴다.
배달 가방이 휴게실 구석에 놓여 있었다. 바르트 마을에서 받아온 빈 수납함. 내일이면 또 저걸 채워서 어딘가로 가야 한다.
“좋아.”
혼잣말이다. 피곤하다고 멈출 순 없으니까.
아침. 길드 사무소의 공기는 어제와 똑같은 양피지 냄새로 가득했다.
접수대 앞에서 배달 가방을 정비했다. 구호 물자 리스트 확인, 수납 위치 조정, 바스코가 달아준 마나 안정화 고리 점검. 어제 과부하로 금이 갔지만 아직은 쓸 만했다.
올리비아가 다가왔다.
“우편 선배님! 어제 푹 쉬셨어요? 얼굴이 아직 좀... 그렇네요!”
“잤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두 시간 정도.
올리비아가 뭐라 더 말하려는데, 관측실 문이 열렸다.
그리프였다.
평소와 달랐다. 어깨선까지 오는 은발을 한쪽으로 묶은 건 여전했지만, 허리에 작은 배낭을 차고 있었다. 관측용 장비 주머니도 보였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강한울 씨. 오늘 바르트 마을 후속 배달이죠.”
“그런데.”
“제가 동행합니다.”
올리비아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가방 끈을 조이던 손을 멈췄다.
“이유는.”
“어제 당신의 마나 파동, 표준 패턴에서 벗어난 스파이크가 있었어요. 생리적 리듬에 가까운 이질적 진동이었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리춤의 측정 장비를 톡톡 두드렸다.
“현장에서 직접 관측해야 원인을 특정할 수 있어요. 위험 신호라면 초기에 잡아야 하고, 아니라면 아니라서 다행인 거고.”
잠시 바라봤다. 보랏빛 눈동자는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연구자 모드였다. 공식 업무 중에는 완전한 존대를 쓴다는 그 모드.
“내 방식대로 한다.”
“어떤 방식이죠.”
“대면 배달. 마물 만나면 도망치지 않는다. 물품에 담긴 마음을 전해서 통과한다.”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관측에 지장만 없다면, 현장 방식은 배달부 재량이니까요.”
“좋아.”
가방을 둘러멨다. 어깨에 익숙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올리비아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리프 매니저님이 현장에 나가다니... 엄청 오랜만인데...”
시선이 올리비아를 향했다.
“올리비아 씨, 오늘 접수 업무는 혼자 맡아주세요. 긴급 건은 바스코 씨한테 연결하고.”
“네! 알겠습니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프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발걸음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한 가지만 더.”
내가 말했다.
“위험하면 내 말 들을 거다.”
잠시 멈칫하더니,
“...상황에 따라 판단하죠.”
“상황이 아니라 내 판단.”
대답은 없었다. 문을 열었다.
길드 밖으로 나서자 바람이 불었다. 어젯밤 비가 그친 흔적이 길가에 남아 있었다. 자갈길을 따라 균열 지대 방향으로 걸었다.
“어제 바르트 마을 루트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죠?”
걸으면서 그리프가 측정 장비를 가동했다. 고글 형태의 장비가 눈 앞에서 푸른 빛을 띠었다.
“그랬다. 그림자 늑대 한 마리 만났고.”
“마물을 회유했다고 들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물품에 깃든 마음을 보여줬다. 마을 사람들 절실함이 담긴 편지랑 구호 물자. 그걸 느끼고 물러났어.”
수치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감정 잔류 마나가 마물의 공격성을 상쇄하는 원리... 흥미롭네요.”
“흥미로운 걸로 끝나면 좋겠다.”
“무슨 뜻이죠.”
“오늘도 통할지는 모르니까.”
균열 지대의 경계에 접어들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평범한 황무지에서 갑자기 주변이 굴절되는 느낌. 균열 지대 특유의 아지랑이 같은 왜곡이 시야 가장자리에서 일렁였다.
걸음을 멈춘 그리프,
“여기서부터 주소 마법을 전개할게요. 수취인 정보는 확인했으니까... 어?”
고글에 경고 표시가 떠올랐다.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전생의 택배 기사 시절, 새벽 배송 중에 급정거하는 차를 피하던 그 감각. 눈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거.
나는 상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뒤로!”
발밑의 공간이 갈라졌다.
평범한 자갈길이 순식간에 금이 가더니 검붉은 균열로 변했다. 그리고 그 균열이 우리를 빨아들였다.
재빨리 손을 뻗어 주문을 외웠다.
“주소 마법 보호막!”
보랏빛 빛이 우리 둘을 감쌌다. 허나 이미 발밑은 사라졌다.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비명이 멀리서 들렸다.
추락.
그리고 충격.
눈을 떴을 때, 돌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배달 가방은 오른쪽 팔에 걸린 채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돌과 흙이 기묘하게 굴절된 천장이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협곡이었다. 하지만 자연적인 협곡이 아니었다. 바위들이 마치 누군가 접어서 구겨놓은 듯이 뒤틀려 있었고, 어떤 바위는 공중에 떠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리프가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다행히 의식은 있었다. 은발이 흙먼지로 더럽혀졌고 왼쪽 뺨에 작은 찰과상이 나 있었다.
“...이런.”
손목의 통신 장치를 두드렸다.
“신호가 안 잡혀요. 길드 추적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여기가 어디야.”
“모르겠어요. 기록된 지형이 아니에요.”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음 높았다. 통제 불능의 상황에 들어섰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시 통신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소용없어요. 여긴... 공간 왜곡이 너무 심해요.”
일어서서 주변을 살폈다. 협곡은 좁고 길었다. 양쪽 벽은 높이가 가늠되지 않을 만큼 위로 뻗어 있었다. 길은 두 갈래. 왼쪽은 아래로 약간 경사가 지고, 오른쪽은 평탄해 보였다.
오른쪽을 택했다.
“가자.”
“잠깐만요.”
내 앞을 막아섰다.
“지금 당장 구조 신호도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움직이는 건 위험해요. 일단 이 위치에서 대기하면서 마나 흐름이 안정될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릴 건데.”
“최소한 마나 난류가 진정될 때까진...”
고개를 저었다.
“여긴 균열이 심한 곳이야. 가만히 있으면 더 위험해질 뿐이야.”
“그건 당신 직감이죠. 데이터가 없어요. 근거 없는 낙관으로 움직이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어요.”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연구자 모드의 얼굴이 아니었다. 뭔가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경계심. 손가락이 관측 장비의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데이터만 믿다가 잃은 적 있지.”
호흡이 멈췄다.
“뭐... 뭐라고 하셨죠.”
“네 방식. 모든 걸 혼자 계산하고 통제하려는 거. 그게 네 트라우마 때문이라는 거 모를 것 같아?”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마법 측정 장비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켰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갔다.
“난 데이터보다 이게 먼저야.”
손바닥을 가슴에 댔다.
“몸이 기억하는 감각. 전생에서 밤새 골목 훑던 이 다리가, 지금 어디가 안전한지 알아.”
“당신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내가 뭘 겪었는지.”
“몰라.”
인정했다.
“하나, 네가 나를 통제하려는 이유는 데이터 때문이 아니야. 두렵기 때문이지. 또 누군가 잃을까 봐.”
눈을 감았다.
긴 침묵.
관측 장비에서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눈을 떴을 때, 그 보랏빛에는 낯선 것이 섞여 있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아마도 자기 방어벽이 깨질 때 나오는 혼란이었다.
“...따라가겠습니다.”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관측한 건 전부 기록할 거예요. 당신의 그 직감이 맞는지 틀리는지.”
“좋아.”
앞장섰다.
협곡은 생각보다 깊었다.
열 발자국쯤 걸었을 때, 발을 멈췄다.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전생의 밤 배송 때, 골목길의 가로등 빛 각도로 낡은 건물의 위험을 감지하던 그 감각. 지금 그것과 비슷한 예감이 들었다.
“세 걸음 뒤로.”
내 지시에 멈칫했다. 어깨를 잡아 뒤로 밀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천장 바위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돌무더기가 바닥을 때렸다.
거칠어진 숨소리.
“어떻게... 알았죠.”
“몰라.”
솔직했다.
“그냥 안다. 도시에서 택배 오래 하면, 낡은 건물이 무너질 때랑 비슷한 느낌이 와. 균열에도 그런 게 있더라.”
“택배... 기사 시절이요?”
“그래.”
더 자세히 말할 순 없었다. 전생 얘기는 아니까. 하지만 지금 내 다리와 눈은 이 협곡의 패턴을 읽고 있었다. 마치 낡은 지도를 손에 쥔 것처럼.
계속 걸었다.
뒤따라오는 발걸음에서 망설임이 조금 줄어 있었다.
두 번째로, 오른쪽 벽 쪽으로 붙으라고 했다. 몇 초 뒤, 왼쪽에서 날카로운 바위 조각이 튀어나왔다. 세 번째는 계곡 바닥이 갑자기 꺼지기 직전에 멈춰 섰다.
숨을 들이켰다.
“도저히 설명이 안 돼요. 이 지형엔 반복 패턴이 없어요.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인데...”
“몸이 기억하는 건 머리보다 빠를 때가 있더라.”
어깨를 으쓱였다. 대답은 없었다. 측정 장비가 푸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협곡의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대에 도달했다. 작은 웅덩이 같은 곳. 숨을 고를 만한 공간.
그 순간, 길드 통제실.
바스코가 작업대에서 손을 멈췄다.
추적 장비의 화면에서 신호가 사라졌다. 확인 버튼을 세 번 눌렀다. 반응 없음. 네 번째는 주먹으로 내리쳤다.
“...안 돼.”
올리비아가 통제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바스코 씨! 방금 그리프 매니저님 신호가...”
“알아.”
황금색 눈동자가 굳어졌다. 거대한 손이 추적 장비의 다이얼을 거칠게 돌렸다.
“마지막 좌표... 균열 지대 경계. 그리고 그다음은 기록되지 않은 영역.”
올리비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록되지 않은 영역이면... 길 없는 지도...”
대답하지 않았다.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과거의 기억이 스치는 게 보였다.
전쟁 때. 잃었던 동료들. 그때도 이렇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올리비아. 추적 마법 확장해. 과감한 걸로.”
“하지만 제 마법력으로는...”
“할 수 있어.”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에서 마법진이 맴돌았다. 순간, 머릿속에 낯선 공식이 스쳤다. 고대 마법의 흔적. 누군가의 기억 파편 같은 것.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말도 안 돼. 내가 고대 공식을 떠올릴 리 없어. 재능 부족인데.’
그 생각을 밀어내고, 평소 알고 있는 추적 마법진을 펼쳤다.
바스코는 통제실 중앙의 대형 마나 지도를 켰다. 지도 가장자리 너머, 공백으로 표시된 영역.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장비 만들 시간 벌어줄게.”
낮은 목소리.
“꼭 찾자.”
파편의 협곡.
잠시 숨을 고르며 웅덩이 바닥에 앉았다. 그리프는 여전히 측정 장비를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여전히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 내가 한 말.”
먼저 입을 열었다.
“과한 거였으면 미안하다.”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사과는 안 해도 돼요.”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
“맞는 말이었으니까.”
잠시 침묵. 측정 장비를 내려놓았다.
“전쟁 때, 제가 통제하지 못한 게 있었어요. 그 이후로 전부 다... 제가 관리하지 않으면 불안해지더라고요.”
거기까지였다. 더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럼 이제부터 내 방식 한번 믿어봐.”
내가 말했다.
“데이터 말고, 직감이라 부르는 그거.”
작게 웃었다. 처음 보는 표정.
“과학자로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방금 전 세 번 연속 예측은... 인상적이었어요.”
“겨우 인상적.”
“최고의 찬사예요.”
순간, 땅이 흔들렸다.
웅덩이 바닥에 금이 갔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선이었다. 하지만 금은 순식간에 넓어졌다. 협곡 전체의 공간이 뒤틀리는 진동이 발밑에서 올라왔다. 바위들이 삐걱거렸고, 공중에 떠 있던 돌들이 요동쳤다.
비틀거리는 그리프.
“또 균열이...!”
배달 가방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가방 안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바르트 마을로 배달할 구호 물자 사이에 있던 편지들이었다. 아직 열지 않은 봉인된 편지. 그 편지들이 일제히 희미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백색도, 청색도 아닌 따뜻한 색.
그 빛은 협곡의 한 방향, 아직 우리가 가지 않은 왼쪽 경사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숨을 멈췄다.
“송신자들의... 진심이 마나 반응을 일으키고 있어요.”
편지들이 스스로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