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 우편배달부: 단절된 세계를 잇는 자
3화
편지들의 빛을 따라 왼쪽 경사로를 오르기 시작했을 때였다.
공기가 달라졌다.
축축하고 차가웠던 협곡의 바닥 공기와는 다른, 텁텁하고 먼지 섞인 무언가. 콧속을 간질이는 냄새에 걸음이 멈췄다. 이 냄새를 안다. 오래된 콘크리트와 배달 상자 특유의 골판지...
“강한울 씨?”
그리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른 톤. 당황이 섞여 있었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돌과 바위가 사라지고 익숙한 복도가 나타났다. 형광등 불빛 아래, 문 앞에 상자를 내려놓는 내 손.
“여기 두고 가시면 됩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피곤에 절은 내 목소리였다.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손목의 디지털 시계가 삐- 하고 울렸다. 밤 11시 47분. 오늘 서른일곱 번째 배달.
가슴이 죄어왔다.
이건 그날이다. 샤워도 못 하고 침대에 쓰러졌던.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두고... 가시면...”
문 너머 목소리가 기계처럼 반복됐다. 복도가 길어졌다. 문이 점점 멀어졌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무릎에 힘이 풀렸다. 아, 이거.
빨리 문 열고 들어가야 하는데. 내일도 새벽 여섯 시부터...
그때.
비명.
짧고 날카로운, 사람 이름을 부르는 외마디였다. 그리프의 목소리.
나는 고개를 확 들었다. 눈앞의 오피스텔 복도가 파르르 떨렸다. 아니, 떤 게 아니었다.
내가 떨고 있었다. 이건 진짜가 아니다. 협곡이다. 지금은 배달 중이다.
“그리프!”
소리쳤다. 목청이 찢어질 듯이.
몸을 억지로 돌렸다. 환영이 저항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시야가 다시 일그러지려 했다.
배달 가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줬다. 편지들이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빛.
한 걸음. 또 한 걸음.
돌바닥이 신발 밑에서 느껴졌다. 진짜 바닥이다.
그리프가 다섯 걸음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은발이 흩어져 얼굴을 가렸다. 측정 장비가 땅에 떨어져 깜빡였다. 그녀의 눈은 허공을 향해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 안 돼... 가면...”
입술이 떨렸다.
“제가... 내가... 막았어야...”
두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무언가를 붙잡으려 움켜쥐었다가, 허공을 찢었다.
나는 달려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프.”
대답이 없었다.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공이 축소됐다 확장됐다를 반복했다.
“여기는 협곡이야. 환영이 보여주는 거라고.”
측정 장비를 집어 그녀의 손에 쥐여주려 했다. 손이 차가웠다. 얼음장같이.
“데이터 봐. 네가 믿는 건 이거잖아.”
잠시 손가락이 장비를 감싸쥐었다. 그러더니 떨어뜨렸다.
“소용없어요...”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내 계산은... 항상... 너무 늦었어요.”
그리프의 시선이 내 어깨 너머,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고정됐다.
“저 아이들... 내가 먼저 보냈어야 했는데. 대피 계산은 완벽했는데... 37초가 늦었어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내 말 들려?”
반응이 없자, 더 세게 잡고 흔들었다.
“그리프 오닐!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나야. 강한울. 살아있는 인간이 등산용 장비처럼 무거운 배달 가방 메고 협곡에서 길 잃은 거. 네 환영 속 사람들 아냐.”
눈이 깜빡였다. 초점이 내 얼굴로 돌아오는 데 몇 초가 걸렸다.
“...보여요.”
겨우 뱉어낸 말.
“하지만... 환영인지 아닌지 어떻게...”
“내가 증명할까.”
나는 배달 가방을 열었다. 편지 한 통을 꺼내 그녀의 손에 올려놓았다. 빛이 따뜻하게 손바닥 위로 번졌다.
“이 편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쓴 거야. 네 환영이 만든 가짜가 아니지.”
그리프가 편지를 내려다봤다. 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나 혼자 이 협곡 못 빠져나간다.”
내가 말했다. 천천히, 한 글자씩.
“네 계산도, 내 감도, 하나만으론 안 돼. 인정한다. 나 혼자 다 해결할 수 있는 인간 아냐. 택배 기사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그리프가 나를 올려다봤다. 보랏빛 눈동자에 아직 눈물기가 남아 있었지만, 더는 허공을 향하지 않았다.
“내 직감에 네 계산을 실어봐.”
“그게... 가능할까요.”
“못 할 것도 없지. 나는 길 찾고, 너는 마나 경로 안정화해.”
그리프가 측정 장비를 집어 들었다. 손이 아직 떨렸지만, 장비를 켜는 손놀림은 정확했다.
“수취인 정보를 대 주실 수 있어요?”
“바르트 마을, 릴리안 하트필드. 구호 물자 담당.”
“좀 더... 개인적인 정보가 필요해요. 주소 마법이 반응할 만한.”
잠시 생각했다.
“전쟁으로 헤어진 언니, 아델라이드의 생존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
그리프가 장비를 조작했다. 마나 측정 고글이 내려왔다.
“계산 시작할게요. 좌표값 입력.”
“왼쪽에서 두 번째 균열 갈래.”
“거긴 마나 밀도가 불안정해요.”
“그래서 마물이 못 온다. 사람 마음이 끼어들 틈은 있지.”
그리프가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대신 장비를 빠르게 두드렸다.
“통로를 열어볼게요.”
그녀의 양손에서 뻗어나온 마나 경로가 공중에 떠오른 빛줄기들 사이를 엮기 시작했다. 베틀의 날실처럼 질서정연하게. 편지의 빛이 그 경로를 따라 흘러갔다.
내 감으로 길을 가리키고, 그녀의 계산이 그 길을 물리적으로 존재하게 만들고 있었다.
공간이 갈라졌다.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균열이 아니라, 문이었다.
길드 사무소의 마나 등불 빛이 저편에서 흘러넘쳤다.
빛이 사라졌다.
길드 앞뜰의 돌바닥에 어깨부터 떨어졌다. 옆에서는 그리프가 무릎으로 착지하다 비틀렸다. 배달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굴렀다. 균열 통로가 등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오른팔 바깥쪽이 찢어져 얕게 피가 났다.
길드 정문이 열렸다.
바스코가 먼저 뛰쳐나왔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였다.
“한울아!”
올리비아가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보다 그리프 쪽으로 먼저 달려갔다.
“매니저님 팔에서 피 나요!”
그리프가 왼쪽 팔뚝을 감싸쥐고 있었다. 협곡에서 떨어진 돌에 긁힌 자국. 깊진 않지만 피가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무릎을 꿇고 그리프의 팔에 손을 얹었다. 평소 같으면 붕대를 찾아 뛰어갔을 텐데, 이번엔 달랐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희미한 금빛이 샜다.
“어...?”
올리비아 자신이 가장 놀란 얼굴이었다. 빛은 실처럼 가늘게 상처를 따라 움직였다. 피가 멎고, 찢어진 피부가 천천히 붙었다.
완전히 아문 건 아니었다. 흉터도 남았다. 하지만 출혈은 멈췄다.
올리비아가 손을 떼며 주저앉았다. 자기 손바닥을 멍하니 들여다봤다.
“이게... 나, 방금...”
그리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그 마법, 생명 속성의 고대 공식인데.”
“저, 저도 몰라요! 그냥... 손이 저절로...”
바스코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내 오른팔 찰과상을 힐끗 보더니,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꺼냈다. 묵묵히 내 팔을 감았다.
“...얕네.”
“스치기만 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시선을 길드 뜰 바닥 쪽으로 돌렸다. 내 발치에 떨어진 검은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물 핵 조각이었다. 협곡에서 만난 환영 마물이 사라지며 남긴 찌꺼기였다.
바스코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그걸 손바닥에 감췄다.
“...이건 내가.”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말리지 않았다.
길드 사무실.
귀환 보고는 짧았다. 배달 물품은 무사, 경로 이탈은 예측 불가능한 균열 탓, 협곡에서 편지의 마나 반응으로 귀환 통로 확보. 그리프가 관측 장비의 기록을 탁자에 올리며 덧붙였다.
“주소 마법의 공동 발동. 두 사람의 마나가 동시에 반응해서 길을 열었어요. 사례가 드문데, 기록은 남기겠습니다.”
내가 소매로 팔의 붕대를 한 번 더 조이며 말했다.
“네가 내 방식 믿어준 덕이다.”
그리프가 잠시 입을 열려다 멈췄다. 측정 장비를 만지작거렸다.
“...직감이 아니라, 검증되지 않은 변수의 긍정적 발현이었을 뿐이에요.”
“그걸 직감이라고 부르는 거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문이 열렸다.
지팡이 소리였다.
에드거 할로우. 한쪽 눈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다른 쪽 파란 눈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등이 곧았다.
“협곡에서 편지가 길을 가리켰다며.”
그리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에드거 님, 지금 갑자기...”
“늙은이가 볼일 있어서 왔다.”
나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지팡이 끝에서 고대 문자가 잠시 반짝였다.
“네놈 전생이 뭔지 아나.”
“대한민국 택배 기사.”
“그게 다라고 생각하냐.”
침묵했다. 에드거가 지팡이로 내 가슴께를 툭 찔렀다. 왼쪽 가슴. 배달 가방을 항상 메는 자리였다.
“완성되지 못한 지도가 있어. 이 늙은이가 반평생 바친 놈이다.”
한쪽 뿌연 눈이 움직였다. 마치 나를 꿰뚫는 듯했다.
“길 없는 지도. 주소 마법이 닿지 않는 영역. 거기엔 길이 없다. 길을 만드는 놈이 필요하지.”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저라고요.”
“전생이고 뭐고, 네가 이 세계에 떨어진 건 우연이 아니다. 지도가 불렀어. 완성시킬 놈을.”
그리프가 한 발짝 나섰다.
“그건 전승되는 기록에도 없는...”
“기록에 없으니까 네놈들도 몰랐겠지.”
에드거가 코웃음 쳤다. 지팡이를 한 번 탁 내리쳤다 바닥의 고대 문자가 번쩍였다.
“받을지 말지는 네가 정해라. 이 늙은인 이미 길을 몇 개쯤 깔아놨다. 그 위를 걷는 건 너야.”
뒤돌아섰다. 문까지 가는 네 걸음 동안 누구도 말을 잇지 못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어깨 너머로 던지듯 말했다.
“그 편지들, 네 마나에 반응한 게 아냐. 편지에 담긴 마음들이 너를 믿은 거다.”
문이 닫혔다.
사무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프가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전설 속의 우편배달부예요. 그가 왜 지금.”
“지금이니까 왔겠지.”
탁자 위의 빈 찻잔을 바라봤다. 편지들이 길을 가리켰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지도... 내가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과학자로서 말씀드리면, 가능성은 미지수예요.”
잠시 뜸을 들였다.
“파트너로서 말하면... 이미 한 번, 당신 방식이 통했어요.”
그 말에 가방을 둘러멨다. 어깨에 익숙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길 없는 지도. 완성하겠습니다.”
입 밖에 내자 말이 무게를 얻었다.
작업실.
바스코가 문을 잠갔다. 작업대 위에 검은 마물 핵 조각을 올려놓았다. 불규칙한 모양. 표면에 희미한 보라색 잔광이 흘렀다.
오른손 장갑을 조작했다. 금속 손가락이 정밀하게 펼쳐지며 내부의 작은 렌즈들이 돌출됐다. 핵 조각을 집어 조명 아래 들었다.
“...정화 가능할까.”
혼잣말이었다.
서랍에서 낡은 노트를 꺼냈다. 대전쟁 때 대장장이 길드에서 빼돌린 연구 기록이었다. 마지막 장을 펼쳤다. 마물 핵에서 마나 독소만 분리하는 공식이 반쯤 그려져 있었다. 나머지 반은 비어 있었다.
장갑 끝에서 작은 바늘이 나왔다. 핵 표면을 살짝 긁자 얇은 가루가 떨어졌다.
“...할게. 천천히.”
금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개인 거처.
올리비아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바닥을 노려봤다. 평범한 손이었다. 약간 잉크 얼룩이 진 접수 담당자의 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기서 금빛이 났다.
“생명 속성의 고대 공식이라...”
그리프의 말을 되뇌었다. 고대 공식.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다. 그런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가 알기 전에.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아까 그 감각이 다시 느껴질까. 아무 일도 없었다.
옆 탁자 위에 작은 거울이 있었다. 들여다봤다. 평소와 똑같은 얼굴. 밝은 갈색 눈동자. 주근깨.
그런데 거울 속에서 잠시, 아주 잠시였다. 눈동자 뒤편에서 금빛이 스쳤다.
거울을 엎었다.
숨이 가빴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 대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