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마법 우편배달부: 단절된 세계를 잇는 자

8화

협곡 균열 벽의 은빛 파장은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프가 측정기를 세 번 재가동했지만 바늘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올리비아의 신음도 잦아들었다. 나는 시계를 놓지 않은 채 뒤돌았다.

“일단 야영지로 간다.”

입구에서 200미터 떨어진 바위 그늘에 방한포를 펼쳐 올리비아를 눕혔다.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의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모닥불을 피웠다. 마나 잔류가 적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그리프가 측정기로 확인해줬다. 불꽃이 바위 벽에 그림자 셋을 만들었다.

“바스코.”

내 목소리에 그의 어깨가 굳어졌다. 손상된 방어 장비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였다. 오른손 붕대 사이로 새어 나온 화상 자국이 불빛에 반짝였다.

“그 기술,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바스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장갑 낀 왼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대전쟁 때.”

측정기가 삐걱거렸다. 그리프가 손가락을 버튼에서 떼지 않은 채 그를 응시했다.

“그건 실전 기록도 없고, 연구 자료도 완전 소멸된 기술이에요. 생명 순환 마법의 계보 자체가——”

“맞아. 그 계보의 마지막 장인이… 내 스승이었어.”

바스코가 말을 끊었다. 모닥불이 이파리 하나를 태웠다. 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분은 마물 핵에서 독소만 빼내는 공식을 거의 완성했어. 생명을 해치지 않고 순환시키는 법이었지. 하지만 전쟁이 터지고… 군부가 기술을 가져갔어. 정화가 아니라 무기화했어. 스승님은 기록을 태우고 도망쳤다가…”

바스코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오른손 붕대가 가늘게 떨렸다.

“내가 마지막 기록을 갖고 도망쳤을 때, 그분은 이미…”

이후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프의 측정기 쥔 손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전쟁 이전 생명 순환 마법. 그 자체는 금지된 적이 없었어요. 올리비아가 남긴 마법 잔향을 분석했어요. 잔류 패턴이… 전형적인 생명 속성 방어계였어요. 공격 전환이 불가능한 순수 보호 마법진입니다.”

측정기를 내려놓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금지된 건 바스코 씨의 기술이 아니에요. 전쟁 때 군부가 그걸 살상용으로 개조한 변종이 문제였을 뿐.”

바스코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모닥불이 비쳤다.

“...정말?”

“측정기에는 거짓말 안 해요.”

나는 두 사람 사이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럼 할 일은 정해졌네. 금지된 기술이 아니라, 잊힌 기술을 되찾은 거다. 우리가 공식화하자. 길드에 제대로 보고하고, 규정 안으로 들여오는 거야.”

그리프의 눈썹이 움직였다.

“공동 책임이라는 조건으로요.”

“당연하지. 이젠 혼자 짊어지지 마. 짐은 나누라고 있는 거야.”

바스코의 주먹이 풀렸다. 붕대 감긴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모닥불 너머로 올리비아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프가 담요를 그녀 어깨까지 올려주며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 첫 번째 공식 보고서를 작성하죠.”

나는 시계를 내려다봤다. 진동은 멈춘 상태였다. 디지털 화면 구석에 희미한 푸른 점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균열 벽 너머에서 은빛 파장이 다시 반짝였다가 그 자리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시계를 가슴 깊숙이 넣고 불 옆에 앉았다.

밤은 길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밤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잿빛 하늘이 막 밝아올 무렵 우리는 야영지를 정리하고 협곡 입구로 향했다. 이슬에 젖은 풀을 밟으며 걸어간 그 길은 한 시간 남짓. 어둠이 은빛으로 희석되는 동안 바스코는 묵묵히 선두에 섰다. 나는 시계의 푸른 점을 수시로 확인하며 방향을 조정했다. 균열 벽이 내뿜는 파장에 가까워질수록 진동은 더 강해졌다.

협곡 입구의 균열 벽이 은빛으로 일렁였다. 그리프가 측정기를 든 채 숨을 삼켰다.

“파장이… 안정되고 있어요.”

손목을 내려다봤다. 시계 초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이 열리는 거냐.”

그리프의 손가락이 측정기 다이얼을 두 번 돌렸다. 바늘이 규칙적인 진폭을 그렸다.

“이 파장은 균열을 잠재우고 있어요.”

“고대 마법?”

고개를 저었다.

“더 근원적이에요.”

시계 진동이 손목에 딱 달라붙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나는 왼쪽 팔을 들어 균열 벽 쪽을 가리켰다. 액정에 희미한 푸른 선이 스쳤다.

“강한울 씨 말이 맞아요. 시계와 공명하는 방향으로 균열 밀도가 감소하고 있어요.”

바스코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내 시계와 균열 벽을 번갈아 보더니 짧게 내뱉었다.

“…길이 있어.”

균열 벽이 갈라졌다. 은빛 입자가 허공에 흩어지며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한 통로가 열렸다. 그리프가 먼저 들어갔다. 나는 올리비아의 숨결을 확인하고 뒤따랐다. 바스코가 후방을 막으며 발을 디뎠고, 균열 벽은 우리 뒤에서 조용히 닫혔다.

내부는 놀랄 만큼 고요했다. 그리프가 앞서 걸으며 중얼거렸다.

“대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옛길.”

바스코의 목소리가 통로 안에서 울렸다.

“대전쟁 전에 쓰던 이동로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통로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들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시계 진동이 점점 강해져 손바닥 전체로 전달됐다.

통로 출구를 넘어서자 눈앞이 탁 트였다. 광활한 평원, 푸른빛의 풀, 맑은 공기. 뒤를 돌아보자 협곡 전체가 거대한 균열 장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미지의 영역이에요. 길 없는 지도의 첫 페이지가 될 장소군요.”

나는 올리비아를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에서 낡은 양피지 지도를 꺼냈다. 시계를 지도 위에 올리자 액정의 푸른 선이 깜빡이며 공백이었던 중심부 한쪽에 옅은 금빛 선을 그렸다. 협곡 통로를 따라 여기까지 이어진 경로.

손가락으로 그 선을 짚었다.

“여기가 개척로의 기점이다.”

일어서서 그리프와 바스코를 똑바로 쳐다봤다.

“경로 개척자: 강한울. 마나 안정화 기여: 그리프 오닐. 진로 확보 및 방어: 바스코. 이걸 길드 공식 기록으로 제출한다.”

바스코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그리프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지도 위 새 경로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이게… 우리가 처음으로 만든 공식 길이군요.”

시계가 다시 진동했다. 부드러운 파동처럼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액정에 짧은 글자가 스쳤다.

[1/∞]

평탄한 바위 평원에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 시계를 기록하고 길드 인증 마커를 설치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왼쪽 손목이 뜨거워졌다. 액정이 깜빡이지도 진동하지도 않은 채 유리면 아래로 미세한 푸른 빛이 맥박 치듯 깜빡였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공명이 심장 고동처럼 팔뚝으로 번져갔다. 올리비아가 갑자기 숨을 들이켰고, 그녀의 눈동자에 은빛 선이 스쳤다.

“왼쪽에서… 아니, 왼쪽 아래에서 올라와요. 열두 고리. 여섯 개의 그림자 다리. 숨는 법을 아는…”

바스코가 벌떡 일어나 망설임 없이 방어 장비 잔해에서 정화 코어 탐지 모듈을 분리했다. 금속 손가락이 초점을 맞추듯 움직였다. 탐지 파동이 뻗어나가고 3초 뒤, 황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균열 아래. 깊이 40미터 지점. 길이만 최소 25에서 30미터. 한 마리가 아니야. 열두 개의 마나 핵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어. 이런 패턴은 기록된 적 없다.”

그리프가 측정기를 들자 바늘이 한 방향으로 치우쳤다. “대전쟁 이전의 고대 마나 파장과 유사해요. 하지만 이건 봉인된 유적의 반응이 아니에요. 활동 중인 무언가예요.”

균열 벽 너머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땅이 깊고 낮게 한 번 울렸다.

“철수다.” 강한울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나왔다. “바스코, 올리비아를 부탁해. 그리프는 후방 주소 마법 마커를 설치해. 지금 우리 전력으로 상대할 규모가 아니야.”

그리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곳 조사를…”

“조사는 다음에 와도 늦지 않아.”

강한울이 균열 너머를 응시했다. 그림자는 천천히, 마치 그들을 인식하듯 기다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시계의 빛이 손바닥을 푸르게 물들인 순간, 짧은 환영이 스쳤다. 좁은 복도, 형광등 불빛, 쌓여 있는 택배 상자들. 1초도 안 되는 찰나였다.

기시감이 목덜미를 탔다. 마물이 다가오는 각도가 전생에 매일 걷던 길의 감각과 정확히 겹쳐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유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프가 마커를 설치해 푸른 마법진이 길드 귀환 좌표를 고정했다. 바스코가 올리비아를 조심스럽게 업었다. 올리비아는 여전히 은빛 잔광이 스민 자기 손바닥을 두려움보다 궁금증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강한울은 시계를 꼭 쥔 채 뒤돌았다. 시계가 이 위협을 감지한 원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닐 거라는 확신만이 남았다. 균열 벽 너머에서는 열두 개의 그림자 다리가 천천히, 무겁게 땅을 짚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법 우편배달부: 단절된 세계를 잇는 자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