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소리꾼
1화
은빛 가면이 차갑게 손끝을 스쳤다.
내무부 몽희 등록청의 서기는 탁자 너머로 번호패를 밀어 넣으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서른일곱 번째. 오늘따라 참 바쁘군. 들어가서 대기하시게.”
유여연은 두 손으로 가면을 받아 쥐었다. 은제 표면에 새겨진 ‘37’이라는 숫자가 촛불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목소리가 가면 속으로 스며들 듯 나지막했다. 서기는 이미 다음 몽희의 명부를 펼치고 있었다.
대기실로 향하는 회랑은 길고 어두웠다. 벽을 따라 늘어선 등롱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가 일렁였다.
회랑 중간쯤에서 목소리들이 새어나왔다.
“벌써 다섯 번째야. 전하께서 눈 한 번 감지 않으셨다더군.”
“지난번 몽희는 노래를 끝내기도 전에 물러나라는 명이 떨어졌다지.”
두 궁녀가 수건을 개며 수군거렸다. 유여연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손에 쥔 가면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
“들었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몽희들 중에는 절에서 목소리를 닦았다는 이도 있다더라.”
“절? 그게 무슨······.”
궁녀들의 말이 바람에 흩어졌다. 유여연은 대기실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렸다. 좁은 방 안에는 이미 일곱 명의 여인들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모두 같은 은제 가면이었지만 체구와 손끝은 제각각이었다.
“여기, 자리 여기밖에 없네요.”
끝에서 손짓이 있었다. 유여연은 고개를 숙이고 벽 쪽 좌석으로 걸어갔다. 옷깃이 스칠 때 풍기는 향내가 제각각이었다. 작약, 치자, 어떤 이는 전혀 향이 없었다.
“초조하시죠?”
방금 손짓한 몽희가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가면 너머로 또렷한 눈동자가 보였다.
“다들 마찬가지이실 거예요.”
유여연이 짧게 답했다.
“저는 세 번째 간택이에요. 지난번에는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건너편에서 다른 몽희의 가면이 살짝 기울었다.
“세 번째요?”
“네. 그래도 또 왔어요. 전하의 잠을 이루어드리면 그 포상으로 아버지 약값을······.”
목소리가 작아졌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하 침전 입실 준비하십시오.”
내시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렀다. 일곱 명의 가면이 동시에 기척을 가다듬었다.
유여연은 가만히 허리춤을 짚었다. 아버지의 비망록이 저며 입은 옷감 사이에 얇게 접혀 있었다. 종이의 온기가 손바닥에 닿는 듯했다.
연아, 세상에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소리가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유여연은 손을 거두고 일어섰다.
첫 번째 몽희가 문을 나섰다.
두 번째가 나갔다.
세 번째.
네 번째.
벽에 기댄 다섯 번째 몽희의 손끝이 떨렸다. 유여연은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여섯 번째 몽희가 일어섰다. 방 안에 이제 그녀와 유여연뿐이었다.
“······무사하시길.”
마지막 몽희가 문을 나서며 돌아보았다. 유여연은 가면을 고쳐 썼다. 은제 표면이 이미 제 살같이 따뜻했다.
회랑 저편에서 노래가 들렸다. 맑았지만 힘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멎었다. 이내 발걸음 소리만이 아쉽게 흩어졌다.
유여연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서른일곱 번.”
내시의 호명과 함께 유여연이 일어섰다. 대기실 문이 닫혔다.
왕의 침전은 기대보다 깊고 고요했다. 용상 뒤로 드리운 발이 촛불 한 자루에 은은하게 비칠 뿐이었다.
이휘는 용상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깨어 있는 건지 잠들려는 건지, 숨소리조차 의식적으로 절제된 듯했다.
“전하, 일곱 번째 몽희입니다.”
엄내관이 조심스레 고했다. 답이 없었다. 손을 들어 물러나라는 신호만이 떨어졌다.
유여연은 바닥에 엎드려 예를 올렸다. 이마가 차가운 대리석에 닿았다.
“일어나 노래하라.”
짧은 한 마디였다.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유여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전 중앙으로 걸어갔다. 미리 정해둔 자리보다 한 걸음 더 가까이. 엄내관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첫 음이 입술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이휘의 손가락이 용상 손잡이에서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가사 없는 선율이었다. 마치 산길을 흐르는 물소리를 닮은 낮은 음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르듯 치솟는 고음이 이어졌다.
이휘의 눈꺼풀이 가볍게 열렸다. 그는 정면을 바라보았지만 초점이 없었다.
유여연은 계속 노래했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적은 악보의 둘째 단락으로 접어들자, 그녀의 목소리는 실크를 찢는 듯한 맑은 진동을 띠기 시작했다.
용상에 기댄 손목의 맥박이 느려졌다. 이휘는 깨닫지 못했다.
엄내관이 벽 쪽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하태의에게 귓속말했다.
“대감, 저것 좀 보십시오.”
하태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전 구석에 서 있던 노인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용상 쪽을 응시할 뿐이었다.
유여연은 마지막 구절로 접어들었다. 숨이 차올랐다. 비망록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대목에서 힘을 빼라. 힘이 아니라 무게로 내려앉히라.
그녀는 그대로 했다. 높은 음에서 급격히 가라앉히는 대신, 실낱같이 가늘어지며 스며들게 했다.
이휘의 목이 살짝 기울었다.
호흡이 고르게 가라앉았다.
엄내관이 손을 내저었다. 중단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휘의 눈꺼풀이 감겼다.
완전히 닫혔다.
하태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윽고 숨을 멈춘 듯 침전 안이 고요해졌다. 늙은 어의는 허리를 굽혀 전하의 손목 위로 손을 얹지도 못하고 떨리는 시선으로 맥박을 헤아렸다. 긴 침묵 끝에 하태의는 조심스레 물러나 예를 갖추며 아뢰었다.
“전하께서 잠드셨습니다.”
그의 음성은 기이하리만치 조용하면서도 또렷했다. 엄내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대감, 정말이십니까.”
“손목을 보시옵소서.”
하태의가 낮게 일렀다. 용상 아래로 늘어뜨린 이휘의 손목이 힘없이 풀려 있었다. 맥박이 규칙적으로 뛰었다.
유여연은 가면 속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무릎이 저절로 바닥에 닿을 만큼 긴장이 풀려버렸다. 해냈다는 안도보다 두려움이 먼저 목을 조였다.
아버지, 이게 대체 무슨 선율이었던 겁니까.
“모두 물러가라.”
하태의가 손을 저었다. 엄내관은 굳은 얼굴로 유여연을 향해 턱짓했다.
유여연은 가면을 한 번 더 고쳐 썼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절대 고개를 들지 않고 뒷걸음쳤다.
“잠시 대기하라.”
문 앞에서 엄내관이 낮게 명했다. 유여연은 홀로 침전 바깥 대기실로 발을 옮겼다. 등 뒤로 엄내관이 다른 내시에게 황급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내무부에 알려라. 가면 번호 서른일곱, 전하께서 처음으로······.”
말이 흐려졌다. 발걸음 소리만이 복도를 급히 울렸다. 유여연은 대기실 벽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가면의 은빛 표면에 자기 눈동자가 희미하게 비쳤다.
같은 밤, 태후전 암향각.
향로에서는 용뇌향이 가늘게 피어오르고, 태후 민씨는 불탑을 등진 채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붉게 물들인 긴 손톱이 한 알 한 알을 짚을 때마다 딱, 딱, 소리가 작게 울렸다.
엄내관이 문지방을 넘지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태후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전하의 잠을 이루었단 말이냐.”
“예, 마마. 그동안 어떤 몽희도 해내지 못한 일을······.”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염주가 멎었다. 태후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주색 당의 소매 끝이 향로 연기를 살짝 쓸고 지나갔다.
“무슨 노래였느냐.”
“그것이······.”
엄내관이 머뭇거렸다.
“가사 없는 선율이었사옵니다. 다만······.”
“다만.”
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뱀을 닮은 창백한 갈색 홍채가 촛불 빛에 반짝였다.
“숨이 멎을 듯, 그러다 갑자기 치솟는 대목이 있었사옵니다. 마치······.”
엄내관이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더듬었다.
“마치, 금지된 창의 전승자들이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고들 합니다. 그 선율의 흐름이······.”
“닥쳐라.”
태후의 목소리가 차갑게 방 안을 가른 순간 염주 알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 알, 한 알, 또르르 구르는 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네놈이 금지된 창을 어떻게 아느냐.”
“마마! 소인이 감히······ 그저, 그저 소문으로만······.”
엄내관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태후는 한참을 말 없이 그 뒷덜미를 바라보았다.
“······가면 번호는.”
“서른일곱 번이옵니다.”
태후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암향각 깊숙한 휘장 뒤에서 은 내무부 상궁이 그림자처럼 걸어나왔다.
“일어나라.”
상궁이 무릎을 꿇자, 태후 민씨는 떨어진 염주를 발끝으로 밀어냈다.
“가면 서른일곱 번. 그 몽희의 배경을 샅샅이 파헤쳐라.”
상궁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내무부 등록 명부는 이미······.”
“명부 따위 믿을 것 같더냐. 그 목소리의 뿌리를 찾아라.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가문은 어디며 얼마나 오래 소리를 닦았는지.”
태후가 한 걸음 다가섰다. 자주색 당의 자락이 상궁의 손등을 스쳤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면 그냥 두지 마라.”
잠시 멈칫한 상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조치의 범위를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태후 민씨는 이미 창가로 돌아서 있었다. 달빛이 그녀의 반쪽 얼굴을 비추었다.
“뿌리에서 뽑아라. 알겠느냐.”
상궁은 말없이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암향각 밖 복도에 나서자마자 그녀는 손을 들어 근처 대기 중인 내시를 불렀다. 어둠 속에서 속삭임이 번개처럼 번져갔다. 태후전 담장 너머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급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