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소리꾼
2화
왕의 침전에 첫 햇살이 스며들 무렵, 이휘가 눈을 떴다.
몇 년 만이냐. 머리가 맑았다. 손끝까지 온기가 돌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용상 옆 촛불은 이미 꺼져 있고, 창호지 너머로 어렴풋이 동이 트는 빛이 번졌다.
“엄내관.”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오래 쓰지 않은 탓이었다. 엄내관이 침전 문을 밀며 급히 들어왔다.
“전하, 불러 계셨사옵니까.”
“지난밤.”
이휘가 이불을 밀며 물었다.
“누구냐.”
엄내관의 눈빛이 찰나 흔들렸다.
“······몽희이옵니다, 전하.”
“가면 번호.”
“서른일곱 번이옵니다.”
이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서른일곱——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가슴 한가운데가 아렸다. 무언가 놓쳐서는 안 될 조각이 막 빠져나간 것처럼.
“신원을 대라.”
엄내관이 황급히 엎드렸다.
“전하, 몽희의 신원은 내무부 등록 명부에만······.”
“그럼 가져와.”
이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포 자락 한쪽이 구겨져 내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직접 확인하겠다.”
엄내관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마마, 소인이 즉시 내무부에 다녀오겠사옵니다.”
“서둘러라.”
이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내관은 뒷걸음질로 물러나 문을 나섰다. 침전 밖에서 엄내관이 뛰어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침전 인근에서 내관이 뛰는 모습을 본 하급 내시 하나가 얼른 시선을 거두고 반대쪽 회랑으로 사라졌다.
이휘는 아직 식지 않은 이불자락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선율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가사도 없이 오로지 숨결과 소리로만 빚어진 곡.
‘누구지.’
목소리 자체는 낯설었다. 그런데도 듣는 내내 가슴이 조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데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그런 울림이었다.
그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불면에 지친 몸은 오래 잤는데도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다.
다시 듣고 싶었다.
반드시.
내무부 몽희 등록청의 문은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엄내관은 숨을 가다듬으며 문지방을 넘었다. 집무대 뒤에서 은내관이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이른 시각이군요, 엄내관님.”
“급한 일이오.”
엄내관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젯밤 서른일곱 번째 몽희. 그 가면의 등록 기록을 열람하겠소.”
은내관의 손이 찻잔을 내려놓는 동작에서 멈췄다. 반 박자 늦게 그가 미소 지었다.
“······그 기록은.”
“말하시오.”
“열람하실 수 없습니다.”
엄내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슨 소리요. 왕명으로 열람을 요구하오.”
“왕명이시라도.”
은내관은 찻잔을 조용히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소리는 공손했으나 시선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해당 가면의 등록부는 태후전의 별도 지시로 봉인되었습니다.”
등록청 안이 갑자기 좁아진 듯했다. 선반 위에 빼곡히 꽂힌 명부들이 엄내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후전의 지시라······.”
“예, 마마께서 직접 내무부 상궁을 보내셨습니다.”
은내관이 말을 이었다.
“서른일곱 번 가면과 관련된 모든 서류는 현재 별도 보관 중이옵니다. 이는 상궁께서 인계하신 사항이라 소인이 임의로 개봉할 수 없사옵니다.”
엄내관은 잠시 침묵했다. 태후전이 벌써 손을 썼다. 그것도 왕이 잠에서 깨기 전에.
“······알겠소.”
그가 뒤돌아섰다. 걸음이 묵직했다. 등록청 문을 나서면서도 은내관의 시선이 등을 찔렀다.
복도로 나오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쳤다. 엄내관은 손끝으로 관모를 바로잡았다. 빈손이었다. 지난밤 그 노래가 왕뿐 아니라 궁 전체를 흔들어놓았다는 것을, 그는 이제 뼈저리게 실감했다.
회랑 저편에서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며 사라졌다. 엄내관은 헛기침 한 번으로 목을 가다듬고 다시 침전을 향해 발을 뗐다.
아침 햇살이 침전의 창호지를 막 뚫기 시작했을 무렵, 엄내관은 빈손으로 침전 문턱을 넘었다. 이휘는 이미 세숫물을 물린 채 용상에 앉아 있었다.
“전하.”
엄내관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휘의 시선이 그의 빈 손바닥에 닿았다.
“기록은.”
“태후전에서 이미······ 몽희 등록청 장부 전부를 가져가셨사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언제.”
“전하께서 잠드신 지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아······.”
엄내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휘는 손끝으로 용상 팔걸이를 한 번 쳤다.
“누가 지시했느냐.”
“태후 마마께서 직접······ 가면 서른일곱 번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암향각으로 옮기라 명하셨다 합니다.”
이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색 도포 자락이 바람에 쓸렸다.
“그럼 다시 만들면 된다.”
“······전하?”
“몽희 등록청의 모든 기록을 침전으로 가져오너라.”
엄내관이 고개를 들었다.
“전하, 등록청 기록은 태후전에······.”
“태후전에 없는 기록도 있을 터.”
이휘의 말이 짧게 끊겼다. 그는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궁궐 지붕들이 아침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몽희 한 명 한 명이 언제 입궁했고, 누구의 추천을 받았으며, 어떤 소리를 닦았는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조사해 오너라.”
“전하, 그러시면 마마께서······.”
“이건 왕명이다.”
이휘가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엄내관의 숨을 멈추게 했다.
“내무부에 하교를 내려라. 가면 서른일곱 번 몽희의 등록 기록을 확보하는 자에게 상금을 내리겠다.”
“상금이오니까······.”
“그리고 모든 몽희 등록청 관원은 오늘 중으로 침전으로 출두하라.”
엄내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금과 관원 출두 명령이 동시에 떨어지면, 이 소식은 한 시진 안에 대전 너머 모든 처소로 번질 터였다.
“전하.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말하라.”
“그 몽희를······ 어찌 그리 찾으시려는지.”
이휘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이 식어 있었다. 어젯밤 그 선율이 귀에 남아 있었다. 이유는 몰랐다. 다만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으면 잠도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번 들은 자는 안다.”
이휘가 낮게 읊조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자는, 다시 들어야만 하는 법이다.”
엄내관은 더 묻지 못하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침전 문이 열리고, 왕명을 받든 내시들의 발소리가 대전 밖으로 급히 퍼져나갔다.
한 시진 뒤, 태후전 암향각.
용뇌향이 여전히 가늘게 피어오르는 방 안, 태후 민씨는 은내관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손안의 염주가 멎었다.
“상금을 걸었다고?”
“예, 마마. 가면 서른일곱 번의 기록을 가져오는 자에게 내무부를 통해 공식 하교하셨사옵니다.”
태후가 천천히 염주를 놓았다. 붉은 손톱이 탁자 가장자리를 스쳤다.
“등록청 관원들도 소환했느냐.”
“침전으로 모두 출두하라 명하셨사옵니다.”
“어리석은 짓이군.”
태후의 입가에 얄팍한 미소가 번졌다.
“고작 하룻밤 잠을 이루었다고, 가면 하나에 목을 매다니.”
“마마.”
은내관이 고개를 더 숙였다.
“가면 서른일곱 번의 처소는 어디냐.”
“칙운당 후원 서쪽 별채이옵니다. 내무부에서 오늘 오전에야 배정을······.”
“배정을 완료했느냐.”
“예, 마마. 정식 몽희로 등록되어······.”
“좋다. 물러가라.”
은내관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태후는 잠시 향로만 바라보았다. 향 연기가 한 줄기로 올라가다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암향각 깊숙한 곳, 휘장 뒤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칙운당 후원 별채. 오늘 밤으로 끝내라.”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자객의 복면 사이로 눈빛만이 깜박였다.
“목소리를 없애라는 말씀이시옵니까.”
“가면은 상관없다.”
태후 민씨는 염주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 목구멍에서 나온 소리가, 다시는 전하의 귀에 닿지 않으면 된다.”
“알겠사옵니다.”
자객이 한 걸음 물러서려 할 때, 태후가 덧붙였다.
“증거를 남기지 마라.”
“염려 마시옵소서.”
자객이 문을 나서기 전, 태후 민씨는 이미 창가로 돌아서 있었다. 달빛이 채 들지 않은 아침, 그녀의 반쪽 얼굴이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해가 서쪽 담장을 넘을 무렵.
칙운당 후원 몽희 처소에는 낯선 침묵이 흘렀다. 내무부에서 배정한 방은 생각보다 넓었지만, 오래 비어 있던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유여연은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었다.
“아가씨, 이걸 보셔요.”
소취가 문턱을 넘으며 손에 든 장부 한 권을 들어 보였다. 표지에 ‘몽희 등록 명부’라 쓰여 있었다.
“내무부에서 방금 가져왔어요. 여기······.”
소취가 손가락으로 한 줄을 짚었다. 유여연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은제 가면 서른일곱 번 — 왕의 수면을 유도한 유일한 몽희.’
글씨는 또박또박했다.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듯 번들거렸다. 유여연은 한참을 그 문장만 바라보았다.
“······유일한 몽희라.”
“네! 이제 아무도 아가씨를 무시하지 못할 거예요.”
소취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유여연은 대답하지 않고 장부를 덮었다. 손끝에 약간의 떨림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 이게 옳은 길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가슴께 품고 있던 비망록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소취가 보는 앞에서는 꺼낼 수 없었다.
“소취야.”
“예?”
“오늘 밤, 다시 입궁할 준비를 해야 할까.”
소취가 잠시 생각했다.
“전하께서 아직 아가씨를 다시 부르시진 않으셨어요. 하지만······.”
“하지만.”
“궁 안이 온통 아가씨 얘기예요. 태후전에서도 침전에서도.”
소취의 목소리가 잠깐 낮아졌다.
“아가씨. 조심하셔야 해요. 태후 마마께서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에요.”
유여연은 창가로 걸어갔다. 바깥 정원에는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고개를 내밀었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가면은 어디 두었느냐.”
“침상 옆 보관함에 넣어뒀어요.”
유여연은 보관함을 열고 은제 가면을 꺼냈다. 번호 ‘서른일곱’이 촛불 아래서 은은하게 빛났다.
“다음 입궁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닦아두자.”
소취가 부드러운 천을 건넸다. 두 사람은 촛불 아래 마주 앉아 가면을 닦기 시작했다. 은빛 표면에 손때가 묻을 때마다 천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담장 쪽에서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는데, 대나무 숲이 살짝 흔들렸다.
처소 담장 너머, 자객의 검은 형체가 그림자처럼 붙어 섰다. 그의 손이 조용히 담장 위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