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소리꾼
10화
이상궁이 횃불을 든 내시 하나에게 손짓했다.
“수로 양쪽을 막아라. 한 명도 빠져나가선 안 된다.”
유여연은 숨을 들이켰다. 가면 안쪽으로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흉터 언저리가 따가웠다.
“소취야.”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소취가 옷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따라오지 마.”
“안 됩니다!”
“하태의 어르신께······ 내가 간다고 전해.”
유여연은 품속의 전서를 한 번 짚었다. 손끝에 단단한 표지의 감촉이 닿았다.
그 감촉을 소취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이건 네가.”
“아가씨!”
소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여연이 가면을 벗었다. 은빛이 횃불에 번뜩였다.
“몽희 97호가 아니라, 유여연으로 간다.”
가면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소취가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한 걸음 늦었다.
유여연이 횃불 쪽으로 걸어 나갔다.
“거기까지다!”
내시별감대원 셋이 동시에 칼을 뽑았다. 이상궁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가면을 벗었군.”
“가면을 쓴 죄인은 몽희로서 잡혀가겠지만.”
유여연이 고개를 들었다. 불빛이 맨얼굴을 핥았다.
“가면 없는 나를 잡으려면 다른 명분이 필요하실 겁니다.”
이상궁의 눈썹이 올라갔다. 약간의 흥미가 담긴 표정이었다.
“대비마마께서 친히 부르신다. 명분은 충분하다.”
“무슨 죄목으로 부르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네 입으로 듣기 전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이상궁이 말을 멈추었다. 유여연의 목덜미를 보고 있었다.
옷깃이 흘러내린 자리. 별 모양의 흉터가 횃불 아래 드러나 있었다.
“그 상처는.”
“오래된 것입니다.”
유여연이 옷깃을 여미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곧게 폈다.
“대비마마께서 궁금해하실 만한 흉터는 아니옵니다.”
이상궁의 시선이 몇 초간 흉터에 머물렀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더 묻지 않았다.
“포박하지 마라. 직접 모신다.”
약탕기 냄새가 방 안에 가라앉아 있었다. 촛불이 반쯤 줄었다.
하태의가 벽장 깊숙한 곳에서 비단 보자기를 꺼냈다. 십 년간 손때 묻지 않은 보자기였다.
“이것이 원본입니다.”
유여연이 보자기를 받았다. 천을 풀자 누렇게 바랜 악보 한 장이 드러났다.
가장자리가 탔고 군데군데 물얼룩이 졌다. 먹글씨는 놀랍도록 또렷이 살아 있었다.
“선왕비마마의 친필이옵니다. 이 곡은······.”
하태의가 말을 삼켰다. 유여연이 악보의 첫 줄을 더듬으며 고개를 들었다.
“자장가였군요.”
“선율 자체에 호흡의 이치가 들어 있습니다. 옛 문헌에는 ‘성음치심’이라 기록된 바였지요. 여섯 살의 세자저하께서 밤마다 울 때면 마마께서 직접 부르시며 다스리셨습니다.”
“소리로 마음을 다스린다.”
유여연이 악보를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입술 사이로 낮은 음이 새어 나왔다.
첫 음이 방 안에 퍼지자 공기가 바뀌었다.
약탕기의 증기가 곧게 솟던 것이 천천히 휘어졌다. 유여연의 목소리가 닿는 곳마다 촛농이 흐르는 속도가 느려졌다.
소취가 입을 가렸다.
“어······.”
하태의가 소취의 팔을 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막는 손짓이었다.
유여연의 두 번째 소절이 이어졌다. 고대 호흡법과 맞물린 선율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공기가 진동했다. 소리가 아니라 숨이 울리는 것이었다.
유여연이 마지막 음표를 끝냈을 때, 촛불 세 개가 동시에 꺼졌다. 새어 나온 연기만이 천장으로 올라갔다.
하태의가 무릎을 꿇었다.
“······그날 밤과 같습니다.”
“어르신.”
“마마께서 마지막으로 전하를 재우시던 날과 똑같은······ 그 선율 그대로입니다.”
하태의의 눈가가 붉어졌다. 손으로 땅을 짚었다.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이 소리를 다시 듣기 위해.”
유여연이 악보를 내려놓고 하태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목소리가 약간 쉬어 있었다.
“마마의 뜻, 잇겠습니다.”
하태의가 유여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전하의 불면은 근원이 마음에 있습니다. 이 선율과 호흡이 짝을 이루면, 열흘 안에 침전에서 깊은 잠을 되찾으실 터입니다. 마마께서 남기신 유일한 처방이옵니다.”
유여연이 악보를 품 안에 접어 넣었다. 촛농이 식은 탁자 위로 손가락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밤, 침전에 들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전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는 아직 이 곡의 내력을 모르십니다. 십 년 전 마마의 당부에 따라 저 혼자 간직해온 까닭에······.”
“알아요. 숨기신 이유를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때가 왔다면 더 미룰 수 없습니다.”
하태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소취가 방 입구에서 숨을 들이켰다.
“소저, 그런데 저 붉은 팔찌······.”
유여연이 손목을 돌아보았다. 붉은 실이 촛불 없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건졌을 때 묶여 있던 것입니다.”
소취가 다가와 팔찌를 가만히 짚었다.
“이 매듭은 태후전 옛 시녀의 솜씨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옵니다.”
하태의가 소취를 돌아보았다.
“지금 어디 있느냐.”
“궁 밖 빈민촌입니다. 제가 가서 만나고 오겠습니다.”
하태의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취가 문을 나서기 전에 유여연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
약방 내실에는 유여연과 하태의만 남았다. 선반 위의 약재 단지들이 어둠에 잠겼다.
유여연이 품 안의 악보를 한 번 더 만졌다. 하태의가 탕약을 식기 전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숨소리가 약간 거칩니다. 두어 번 부르셨을 뿐인데 목청에 무리가 온 모양이옵니다.”
“괜찮습니다.”
“폐하 앞에서는 가벼운 음으로 시작하십시오. 마마께서 그러셨듯이, 첫 소절은 물 흐르듯······.”
“저······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첫 소절밖에 익히지 못했어요.”
“첫 소절만으로도 선왕비마마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사옵니다. 이 곡의 힘은 완성이 아니라 전함에 있습니다.”
“전함.”
“전하께서 기억하실 겁니다. 언젠가, 반드시.”
소취가 눈물을 닦으며 다가왔다. 목소리가 잠겼다.
“아가씨, 그런데······ 그럼 대비마마께서 이 곡을 금하신 까닭이······.”
“전하를 재우는 선율이 누군가에겐 위협이었을 뿐이옵니다.”
하태의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마마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 침전에 이 곡이 흐르고 있었사옵니다. 대비마마께서 들어오셨을 때, 마마께서는 이미······.”
문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추었다.
소취는 숨을 헐떡이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수로 출구에서 유여연이 밀어내던 손길이 아직 어깨에 남은 듯했다. 약방 문밖의 발소리를 피해 뒷길로 돌아 달렸다.
궁외 빈민촌의 초가 앞에서 멈춰 섰다. 붉은 팔찌를 한 번 만지고 문을 두드렸다.
문이 조금 열렸다. 반백의 노파가 눈만 내밀었다.
“누구시오.”
“······저, 약을 구해 드렸던······.”
소취가 손목을 내보였다. 붉은 팔찌가 달빛을 받았다. 노파의 눈이 커졌다.
“그 팔찌.”
“도움이 필요합니다. 대비마마······ 아니, 태후마마에 관한 일입니다.”
“들어오시오.”
노파가 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은 거의 빈 방이나 다름없었다. 부서진 보료 하나와 물그릇이 전부였다.
“그 팔찌를 한 지 십 년 만에 보는구려. 무슨 일이오?”
소취가 숨을 고르며 무릎을 세웠다.
“선왕비마마의······ 승하하시던 날에 관해 여쭙고자 합니다.”
노파의 얼굴에서 피가 가시는 듯했다. 물그릇 쪽으로 손을 뻗다 말았다.
“내가 알 리 없소.”
“그날 침전에 대비마마께서 직접 차를 들고 들어가셨다고······.”
“누가 그런 말을.”
노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소취가 엉덩이로 바닥을 밀며 한 걸음 다가갔다.
“팔찌를 주신 분께 들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대비마마 곁에 없습니다.”
노파가 벽 쪽으로 돌아앉았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십 년 동안 이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했소.”
노파가 벽돌 하나를 밀자 안쪽에서 천 조각이 나왔다. 그 안에 싸인 도자기 파편 두 개.
“그날······ 태후마마께서 차를 들고 침전에 가실 때, 나는 복도에서 마주쳤소.”
“직접······ 보셨습니까.”
“차를 받들고 가시며 웃고 계셨소. ‘이제 그 노래는 영원히 잠들 것이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소.”
노파의 손이 파편을 매만졌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선왕비마마께서 승하하시고, 나는 그날 밤 침전 뒷문에서 이 찻잔 조각을 주웠소. 씻기지도 않은 얼룩이 남아 있었소.”
“그걸······ 아직.”
“도망칠 때도 이것만은 가지고 나왔소. 언젠가 누군가 찾아올 거라 믿었기에.”
소취가 천 조각을 받아 들었다. 조각 안쪽에 거뭇한 얼룩이 배어 있었다.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대는 누구를 위해 이러는 것이오.”
소취가 일어서며 허리를 숙였다.
“제 목숨과 바꾼 분을 위해서요.”
찻잔 조각을 품에 단단히 여미고 초가를 나섰다. 달빛이 좁은 골목을 희끄무레하게 비추었다.
하태의의 사가 약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태후전.
이상궁이 무릎 꿇고 보고를 올렸다. 태후 민씨는 염주를 손에 감은 채 듣고 있었다.
“하태의의 사가 약방에서······.”
“확실하냐.”
“약방 인근 순찰대가 목격한 인원의 체구와 보행, 목소리의 음역대가 일치합니다. 몽희 97호가 분명합니다.”
태후가 손을 펼쳤다. 염주가 탁자 위로 떨어졌다.
“그 늙은 의원이······ 끝내 내 뜻을 거스르는군.”
“한 가지 더 보고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이상궁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하라.”
“내명부 문서고의 기록에······ 금일, 열람자가 있었사옵니다.”
“누구냐.”
“전하······ 폐하의 어윤이 사용되었사옵니다. 십 년 전 선왕비 승하 전후 기록을 직접 열람하셨다고 합니다.”
태후가 탁자 위를 손톱으로 긁었다. 나무가 갈리는 소리가 실내에 길게 울렸다.
“폐하께서······.”
이상궁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멈추었다. 태후의 손톱이 탁자 모서리에서 멈추었다.
“그 계집과 늙은 의원을 당장 잡아들여라.”
“예, 마마.”
“약방에 있는 모든 것을 압수한다. 쪽 하나, 약재 한 뿌리까지.”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톱 밑에 나무 가루가 끼어 있었지만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폐하께 전하라. 신료들의 조석문안이 늦어지고 있다고. 내일 아침, 대전에서 뵙겠노라고.”
이상궁이 물러났다. 태후가 창가로 걸어갔다. 손톱을 창틀에 대고 천천히 긁었다.
“예조 판서 윤공을······ 당장 들게 하라.”
기다리던 상궁이 뒷걸음으로 나갔다. 태후가 긁던 손을 멈추고 창밖 어둠을 응시했다.
“네 목소리로는······ 그 노래를 완성할 수 없다.”
혼잣말이었다. 손톱이 창틀에 박힌 채 부러질 듯 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