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가면의 소리꾼

4화

다음 날 아침, 태후전 암향각.

태후 민씨는 어젯밤 염주를 쥔 채로 밤을 새웠다. 창가에 내린 햇살이 붉게 물든 손톱 끝을 스쳤다.

문밖에서 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내명부 최 상궁이옵니다.”

“들라.”

최 상궁이 무릎 꿇고 들어왔다. 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등록청 서고에서 가져온 것이옵니다. 전하의 침전으로 옮겨지기 전에 사본을 뜨게 하였사옵니다.”

태후가 손을 내밀었다. 최 상궁이 두루마리를 받들어 올렸다.

“가면 번호······ 아흔일곱.”

태후가 천천히 펼쳤다. 눈이 가는 선을 따라 읽어 내려갔다.

“체형 기록이 상세하지 않구나. 어깨 너비, 손가락 길이,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는 부족하다.”

“마마, 선발 당시의 음성 기록이 별도로 보관되어 있사옵니다.”

“그것도 가져와라. 내명부의 인사 기록과 대조하라. 궁녀로 들어온 자 중에 저(低)음역의 목소리를 가진 자, 과거 악공이나 소리와 관련된 집안의 출신이 없는지.”

최 상궁이 잠시 머뭇거렸다.

“마마, 전하의 근위대가 이미 그 몽희의 숙소를 지키고 있사옵니다. 직접 신문은······.”

“말했다시피, 무례한 일은 하지 마라. 다만 서류로 확인하는 것은 인사권의 정당한 행사다. 태후전의 권한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태후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가면 아흔일곱 번. 전하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나도 궁금하구나.”

최 상궁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늘 안으로 음성 기록과 대조 결과를 올리겠사옵니다.”

“가거라.”

최 상궁이 물러났다. 태후는 두루마리를 향로 곁에 내려놓았다. 침향 연기가 종이 끝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같은 날 오전, 칙운당.

왕 이휘가 책상 앞에 앉아 상소문을 밀쳐 두고 있었다. 눈가에 옅은 피로가 남았으나, 동작은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하태의가 읍하며 들어섰다.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그 몽희의 상태는.”

밤사이 확인을 마친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하태의가 답했다.

“다행히 목의 상처는 깊지 않사옵니다. 다만 충격으로 인한 기혈의 흔들림이 남아 있어, 며칠 안정이 필요하옵니다.”

이휘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한 번 두드렸다.

“안정. 그 숙소가 안전하다고 보느냐.”

“전하께서 근위대를 배치하셨사오나, 태후 마마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은······.”

“알고 있다.”

이휘가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하태의, 내가 직접 지키지 못할 시간이 문제다. 방도가 있느냐.”

하태의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침착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하, 의원으로서 한 가지 청을 올리겠사옵니다. 그 몽희를 후원 약방의 정기 진료 대상으로 등록하는 것이옵니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약방으로 오게 하면, 의원으로서 그분의 상태를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의원의 출입 기록은 내명부의 감시 대상이 아니옵니다.”

이휘가 돌아섰다.

“약방 출입은 정당한 치유 절차다. 누구도 막지 못한다.”

“그러하옵니다.”

“좋다. 오늘부터 시행하라. 진료 기록은 하태의, 네가 직접 관리하고 나 외에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마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하태의가 물러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전하, 한 가지 더 아뢰겠사옵니다. 그 몽희의 노래······ 거기에는 단순한 선율 이상의 것이 있는 듯하옵니다. 옛 의서에 전해지는 호흡의 이치와 닮은 점이 있어, 기록을 좀 더 살펴보고자 하옵니다.”

이휘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금지된 기록을 말하는 것이냐.”

“아직 단정할 수 없사옵니다. 다만 전하의 불면이 그 선율로 잦아든 이치를 의원으로서 규명하고자 할 뿐이옵니다.”

“조심하시어라. 태후께서 자네의 움직임을 눈치채시면 목이 날아간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하태의가 깊이 읍하고 물러났다. 이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지만, 집무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창밖으로 칙운당 후원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가면 너머의 목소리가 남긴 잔향이, 이곳까지 닿아 있는 듯했다.

약방 안은 약재 냄새가 자욱했다. 유여연은 약연 앞에 앉아 감초를 저미고 있었다. 칼질은 느렸지만 가늘고 일정한 두께로 떨어져 나갔다. 소취가 문을 밀치듯 들어왔다.

“아가씨……!”

숨을 고르느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유여연이 칼을 내려놓았다.

“내명부입니다. 최 상궁이 직접 몽희 등록청에 사람을 풀었어요.”

소취는 목소리를 낮췄다.

“태후전 쪽에서 전해온 말이, 등록 장부를 전부 뒤지고 있답니다. 가면 번호별로 원본 서류를 하나하나 대조한다고…….”

유여연의 손끝이 멈췄다.

“누구에게 들었느냐.”

“태후전 침방에서 바느질하던, 지난번 그 아입니다. 아가씨 일로 벌 받은 걸 제가 약을 구해준 적이 있거든요. 그 뒤로 가끔 태후전 동향을 흘려줘요.”

소취의 눈이 붉어져 있었다.

“아직 등록 장부까진 닿지 않은 모양이에요. 하지만 시간문제예요. 입궁할 때 적어낸 신원 기록까지 찾히면, 계성 유 씨 집안이라는 것도…….”

“소취.”

유여연이 조용히 불렀다. 소취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여연은 품속에서 아버지의 비망록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가장자리가 닳은 종이에는 빼곡한 글씨 사이로 음계가 몇 줄 적혀 있었다.

“태후께서 노리시는 건 내 목소리야. 그런데 목소리만으로는 역모로 몰 수 없으니, 거기서 나오는 선율의 근원을 찾으시는 거다.”

“그렇다면 비망록을…….”

“숨길 곳을 정해야 한다.”

유여연은 약장을 훑었다. 맨 아래 서랍, 사용하지 않은 약첩 뭉치 뒤편에 손을 넣었다. 먼지 쌓인 빈 공간이 만져졌다. 그녀는 비망록을 말아 그 안으로 밀어 넣고 서랍을 닫았다.

“여기면 하태의 어른 말고는 열지 않는 곳이다.”

소취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복도에서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약방 문이 열리고 하태의가 들어섰다. 그는 두 사람을 한 번 훑고는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소취 낭자도 있었군요.”

하태의는 소매 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반으로 접혔고 중앙이 바래서 접힌 선만 유난히 짙었다.

“이것은.”

유여연의 시선이 종이에 고정됐다.

“선왕비 마마께서 승하하시던 그 밤, 침전에서 울려 퍼졌다고 기록된 곡의 단편이외다.”

그는 종이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펼쳤다. 일부 음계가 먹물로 적혀 있었고, 곡선으로 이어진 선율 표시가 군데군데 끊겨 있었다.

“이 선율은…….”

유여연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아뢰기 어려운 말씀이오나, 이미 내명부 조사가 시작된 이상 은밀히 전하는 쪽이 낫겠다 생각했사옵니다.”

하태의는 종이의 첫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선왕비 마마의 죽음은 표면상 심장 마비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일 밤 침전에 있던 어의의 비망록에는, 마마께서 이 곡을 들으신 직후 갑자기 손톱이 파래지고 숨이 끊어졌다고 적혀 있었소.”

유여연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몸을 숙여 악보 단편을 살폈다. 눈이 세 번째 마디에서 멈췄다.

그녀는 약장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가, 잠시 멈추고 소취를 돌아봤다. 소취는 빠르게 뒤돌아서 가리고, 그 사이 유여연은 약첩 뒤에 숨겼던 비망록을 다시 꺼냈다. 손끝이 떨리지 않도록 다른 손으로 손목을 꽉 쥐고 펼쳤다.

비망록에 적힌 음계와, 단편 악보의 세 번째 마디가 포개졌다. 완전히 같았다. 음의 높낮이, 이음줄의 방향까지 일치했다.

“……아버지.”

유여연의 목소리가 바람 빠진 실꾸리처럼 가늘었다.

“아버지의 글입니다. 이 음계는 아버지께서 비망록에 남기신 것이고, 선왕비 마마의 침전에서 울렸다던 곡의 일부와 정확히 같습니다.”

하태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렇다면 부친께서 이 곡을 어디에선가 입수하셨거나, 혹은 직접 기록하셨다는 뜻이 되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유여연은 비망록을 덮으며 손바닥으로 눌렀다.

하태의가 종이를 다시 접었다.

“선왕비 마마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곧 전하의 불면을 치유하는 길이기도 하외다. 전하의 불면은 어릴 적 충격과 무관하지 않소. 선왕비의 죽음이 그 충격의 시발점이라면, 그날 침전에 흘렀던 이 선율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치유의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유여연은 비망록을 약첩 뒤 공간에 도로 밀어 넣었다. 손이 서랍 밖으로 빠져나올 때 손톱 밑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가 부른 선율 속에 그 단편이 섞여 있었다면, 태후께서 눈치채신 까닭도 이제 알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증명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의심을 사기엔 충분한 고리라…….”

하태의가 악보 단편을 소매 안으로 거두었다.

“이제부턴 낭자 스스로 곡을 부를 때 무의식의 흐름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소취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태후전 쪽 인맥은 제가 계속 살피겠습니다. 내명부 조사가 어디까지 왔는지, 이틀에 한 번은 반드시 가서 들을게요.”

유여연이 소취의 손을 짧게 쥐었다. 소취의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가면의 소리꾼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