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소리꾼
5화
태후전 암향각의 아침은 늦게 찾아왔다. 두꺼운 자주색 휘장이 햇살을 절반만 들였고, 태후 민씨는 그 경계에 앉아 있었다.
이상궁이 문지방을 넘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마마, 급히 부르셨다 하여…….”
“일어나거라.”
태후 민씨는 염주를 한 알 굴렸다. 손가락이 멈추고, 붉게 물든 손톱이 탁자 모서리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어제 시킨 일, 어디까지 했느냐.”
“회 마마. 몽희 등록청에서 97번 가면의 서류는 확보하였사옵니다.”
“97번 하나만?”
탁자를 긁는 소리가 났다. 짧고 날카로웠다.
“전원을 대조하라. 하나부터 마흔까지, 허술한 구석을 낱낱이 파헤쳐라.”
이상궁이 숨을 삼켰다. 태후의 손톱이 탁자에 옅은 흔적을 남겼다.
“그 여자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있다. 예사 소리가 아니다. 선율 어딘가에…….”
말끝을 흐리며 태후가 다시 손톱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더 느리게, 목재 결을 따라 비스듬히.
“전하의 불면을 고친다? 우연일 리가 없지.”
“마마, 등록 장부에 기재된 음역대 정보와 실제 취침 시 노래를 대조하려면 침전의 시강 내관 협조가 필요하옵니다.”
“그까짓 협조는 네가 알아서 구해라.”
태후 민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명부 서류만으로 부족하면 소리까지 확인해라. 그 입에서 나온 곡조가 무엇인지, 낱낱이 기록해 오너라.”
이상궁의 시선이 무심코 탁자 위의 긁힌 자국에 닿았다가 곧바로 내려갔다.
“삼일. 삼일 안에 첫 보고를 올리겠사옵니다.”
“이틀이다.”
태후는 염주를 집어 들며 몸을 돌렸다. 소매가 휘장처럼 쓸렸다.
“늦으면 그땐 네 자리부터…….”
말을 마치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걸어가며 염주를 굴리는 소리만 남겼다. 이상궁은 이마를 바닥에 댔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문이 닫히고, 암향각에는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탁자 위에는 손톱이 지나간 얕은 고랑이 남아 있었다.
침전의 공기는 오후 내내 무거웠다. 내관들이 발소리를 죽이고 오갔고, 용상 곁에는 다섯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다. 바깥은 아직 해가 중천인데도 창호지 너머로 빛이 잘 들지 않았다.
이휘가 손을 들어 하태의를 가까이 불렀다.
“간밤에 눈을 붙이지 못하셨소?”
하태의가 먼저 물었다. 전하의 눈 밑이 보라색으로 내려앉아 있었고, 붓을 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진도 채 못 잤다.”
“일전의 자객 건 이후로…… 진정되신 줄 알았사온데.”
“진정 따위와는 상관없다.”
이휘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등의 핏줄이 일렁였다.
“눈을 감으면 칼날이 보였다. 목을 노리던 순간이, 가면 너머로 들리던 비명이.”
목소리가 잠겼다.
“그리고 어젯밤은…… 그 몽희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전하.”
“지금 몇 시각인가.”
“신시 초각이옵니다.”
“오늘 밤, 해가 지기 전에 들이도록 하라.”
하태의의 눈썹이 움직였다.
“전하의 건강을 생각하신다면…… 한 시진만 늦추시는 편이 낫지 않을지.”
“늘리라 한 것을 늦추라?”
이휘의 손이 무릎 위에서 떨렸다. 손톱이 옷감을 파고들었다.
“눈을 감는 순간이 두려워 밤을 새고 있다. 어의, 알겠느냐.”
“전하…….”
“철수 시간도 늘려라. 예전처럼 동 트기 직전에 내보내지 말고…….”
말을 멈추고 이휘가 숨을 골랐다.
“내가 깨어날 때까지 곁에 두어라. 명이다.”
하태의가 조용히 엎드렸다.
“……하교를 받들겠사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여쭙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말하라.”
“몽희와 전하의 기운은 서로 물들기 쉬운 법. 지나친 의존이 도리어 전하의…….”
“네 걱정은 알겠다.”
이휘가 일어섰다. 창가로 두 걸음, 돌아서며 옆얼굴을 감췄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저 소리가 아니면 잠들 방법이 없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서 전하라. 오늘 밤, 평소보다 일찍 들라.”
“명 받들겠나이다.”
하태의가 물러나면서도 이휘의 등 뒤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가 무릎을 굽혀 문 밖으로 나갔다.
저녁 무렵, 유여연의 처소 안은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소취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아가씨!”
유여연이 약장 앞에서 돌아섰다. 품 안으로 손을 넣은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숨 좀 고르고 말해.”
소취가 목을 한 번 삼키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명부야. 이상궁이 등록 서류 전수를 뒤지기 시작했어. 태후전에서 직접 명령이 떨어졌대.”
“전원 대조?”
“응. 숫자 하나하나까지 다.”
유여연의 손이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손가락이 비망록의 모서리를 놓지 않았다.
“가면 번호를 추적하는 건 시간문제네.”
“아직 음역대 대조까진 못 했대. 침전 쪽 협조가 필요하대나 봐.”
소취의 말이 빨라졌다.
“하태의 어른이 오늘 저녁, 전하의 분부 받고 침전으로 와 계신대요. 그래서…….”
“전하의 분부?”
“전하께서 오늘 밤 몽희를 더 일찍 들이고 철수도 늦추라고 명하셨답니다.”
유여연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손이 은제 가면 쪽으로 옮겨갔다.
“그분의 불면이 얼마나 깊은지…….”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말을 삼키고, 그녀는 가면을 들었다.
“소취야.”
“응.”
“내가 없는 동안, 이 방의 흔적을 한 번 더 확인해줘. 약장도, 침구도.”
유여연이 은제 가면을 얼굴에 댔다. 금속이 볼을 타고 내려가며 찬기가 스몄다. 97번이 새겨진 모서리가 촛불을 받아 반짝였다.
소취가 다가와 가면 뒤 끈을 묶어주며 손끝이 살짝 떨렸다.
“괜찮을 거야. 내가 아는 아가씨잖아.”
“고마워.”
유여연이 소취의 손을 짧게 쥐었다. 손을 놓고 문을 향할 때, 소취가 붉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돌아올 때까지 꼭 붙들고 있을게.”
유여연이 문을 열었다. 바깥에는 어둠이 막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면을 고쳐 쓰고 침전을 향해 걸어갔다.
침전에 도착했을 때, 용상에는 이미 촛불 세 개가 더 켜져 있었다.
왕이 들이라 명한 시각보다 한 식경은 이른 때였다. 이휘는 붉은 용포 차림 그대로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의복을 풀고 침구를 정리했을 시간인데,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불규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유여연이 문 안으로 들어서며 이마를 조아렸다.
“몽희 97번, 들라 하신 분부 받들어 왔나이다.”
“가깝게 오너라.”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유여연이 두보 앞까지 걸어가 다시 앉았다. 은가면 너머로 이휘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보였다.
시작하기 전, 그녀는 잠시 손가락을 품 안의 비망록 위에 올렸다. 종이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태후의 말이 스쳤다. ‘그 여자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있다.’ 내명부에서 가면 번호를 대조하고 있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일 수 있는 것은 평정뿐이었다.
“전하. 오늘은 어떤 노래를 들으시겠나이까.”
“늘 듣던 것을.”
유여연이 천천히 첫 소리를 냈다. 낮고 느린 가락이 침전에 퍼졌다. 이휘의 호흡이 조금씩 느려졌다. 손가락이 더 이상 옷감을 쥐지 않았다.
노래는 채 두 장단도 넘기지 못했다.
왕의 호흡이 고르게 가라앉기를 기다리던 유여연의 손끝이 멎었다.
이미 노래는 끝났다. 침전 안은 촛농이 굳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했다. 그런데 용상 쪽에서 바스락, 비단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휘가 뒤척인 것이다. 잠들었다고 생각한 그가 깨어나,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음.”
처음에는 신음인 줄 알았다.
“음∼……”
두 번째는 분명 선율이었다. 박자도, 가사도 없이 흘러나오는 몇 개의 음. 잠결에 혼자 흥얼거리는 단편이었다.
유여연의 등이 굳었다.
그 선율을 알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낡은 종이 위에 먹물로 그려진 음계. 아버지의 비망록 속 그 곡의 세 번째 마디와, 음의 높낮이가 정확히 같았다. 이음줄이 휘어지는 방향까지.
손이 무의식적으로 당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은가면 아래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전하.”
자신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이휘의 흥얼거림이 멎었다.
“왜 그러느냐.”
완전히 깨어난 목소리였다. 유여연은 단전 깊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품에서 내렸다.
“전하께서 잠드신 줄 알았사온데…… 아직 깨어 계셨나이다.”
“잠시 잠들었던 것 같다.”
이휘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났다. 유여연은 두보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전하. 제 노래가 부족했나이다.”
“아니다.”
이휘의 대답은 짧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다만…… 문득 옛날 어떤 노래가 떠올랐다. 무슨 곡인지 나도 모르겠구나.”
유여연은 머리를 조금 더 숙였다. 은가면이 흔들리지 않게 턱으로 받쳤다.
“전하의 기억 속 선율이온지요.”
“글쎄다.”
이휘가 천천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는 창가로 걸어가 달빛을 등지고 섰다.
“아주 오래전, 깊은 곳에 빠졌을 때…… 누군가 불러준 노래였던 듯하다. 그 뒤로는 들은 적이 없는데.”
유여연의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팠다. 통증 덕분에 정신이 붙들렸다.
“그 노래를 다시 들으시고 싶으시옵니까.”
묻고 나서야 말을 잘못 꺼냈음을 깨달았다.
이휘가 돌아보았다. 달빛에 젖은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네가 부를 수 있겠느냐. 이름도 모르는 곡을.”
“……전하께서 들려주시면, 배우겠나이다.”
이휘가 손을 저었다.
“다 잊었다. 한낱 파편일 뿐이다.”
그가 침전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돌아가도 좋다.”
유여연은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전하의 밤이 평안하시길.”
일어서서 뒷걸음으로 문을 향했다. 열 걸음 정도였다. 그 짧은 거리에서 종아리 근육이 바늘에 찔린 듯 저렸다.
침전 문이 닫히자 이휘는 다시 침상에 걸터앉았다. 방금 자기가 무슨 선율을 흥얼거렸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손에 쥔 물이 빠져나가듯 가락은 손끝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엄지로 눈썹 사이를 눌렀다.
침전은 다시 적막해졌다.
유여연의 처소로 돌아온 유여연은 미닫이를 조용히 닫았다. 소취는 벽 쪽에 돌아누워 숨소리가 고르다. 하지만 평소보다 이불을 턱밑까지 당기고 있었다. 잠든 척, 아니, 잠들려 애쓰는 모양이었다.
모른 척했다. 유여연은 등잔불 하나를 켜고 가장 깊숙한 구석에 앉았다. 품속에서 아버지의 비망록을 꺼냈다. 손끝이 떨려 두 번째 겹장을 펼치는 데 한참 걸렸다.
음계가 적힌 면을 폈다.
왕이 흥얼거리던 선율이 귀에 다시 울렸다. 종이 위의 이음줄을 따라 눈이 움직였다. 세 번째 마디. 그 음들이 지금 자신의 귓속에서 맴도는 그것과 완전히 같았다.
아버지가 남긴 선율과, 왕의 기억 속 선율이 한 곡이었다.
그리고 이 곡은 금지된 창이다.
손이 목덜미로 올라갔다. 왼쪽 옷깃 아래, 별 모양 흉터 위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여기다.
그날 우물에 빠진 아이를 끌어올리다 돌에 긁힌 자리. 그 아이는 지금 이 궁궐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기억하는 노래는 아버지의 비망록에 적힌 금지된 곡이었다.
입술이 달싹였다.
“이건…… 아버지…….”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비망록을 접어 다시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처소 밖에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와 창호지를 울렸다. 등잔불이 한 번, 깊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