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가면의 소리꾼

6화

처소를 나설 때는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았다.

유여연은 소취의 이불끝을 한 번 살폈다. 숨소리가 여전히 고르지 않았다. 잠든 척도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손끝을 뻗어 소취의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 한 올을 조심스레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실핏줄이 비치는 눈꺼풀 아래로 꿈결인지 미세한 경련이 스쳤다. 그대로 잠시 머물렀다. 손목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대신 입술만 깨물었다.

방 안의 공기는 밤새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대나무 발이 드리운 처마 밑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까치 한 마리가 처마 끝을 차고 날아올랐다. 저 깃털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소취가 지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이불자락이 어깨에서 흘러내린 부분을 다시 끌어올렸다. 천천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피고 돌아서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을 닫고 복도를 나섰다. 회랑의 공기가 차가웠다.

새벽 안개가 바닥돌 틈새까지 스며들어 길쭉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두 손을 소매 깊숙이 밀어 넣고 걸음을 재촉했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울렸다가 곧바로 안개에 삼켜졌다. 회랑 기둥 그림자마다 누군가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마다 걸음이 반 박자씩 느려졌다.

회랑 모퉁이를 돌자 동쪽 처마 끝이 손톱만 한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을 향해 허리를 곧게 세웠다. 밤에 흐느꼈던 목소리가 아직 목구멍에 걸린 듯했다. 한 번 헛기침으로 삼키고 다시 걸었다.

돌바닥에 맺힌 이슬이 신발 끝을 적셔왔다. 발끝이 젖어드는 감각에 자신이 얼마나 빨리 걷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사약고까지의 길은 익숙했다. 하태의는 아침 일찍 약재를 손질하는 버릇이 있었다.

약 냄새가 먼저 그를 알렸다.

“어의 나으리.”

문간에 선 채로 불렀다. 하태의가 약탕기 앞에서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든 약첩을 내려놓는 동작이 평소보다 느렸다.

“이른 시각이오.”

“여쭈어볼 일이 있어 왔사옵니다.”

하태의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폈다. 수면 부족의 기색이 역력했다. 약탕기의 불을 줄이고 탁자를 가리켰다.

“들어와 앉으시오.”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조율할 틈이 없었다.

“어젯밤, 전하께서…… 선율을 흥얼거리셨사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약탕기 밑의 불꽃이 약재 찌꺼기에 닿아 지글거렸다. 방 안 가득히 쓴 냄새와 단내가 뒤섞인 연무가 허리춤까지 내려앉아 있었다. 연무 사이로 하태의의 흐릿한 윤곽을 바라보며 손끝으로 치마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자수를 따라 손가락이 오갔지만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태의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앉은 채로 무릎을 한 번 쓸었다. 거친 무명천이 마찰되는 소리조차 방 안에서는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절반만 내쉬었다. 폐부까지 약 내음으로 가득 찼다.

“잠결에.”

“예.”

“그 선율을 기억하시오?”

대답 대신 작게 흥얼거렸다.

세 마디.

입술 사이로 새어나간 음들이 약기가 걸린 방 안을 울렸다. 하태의의 손이 탁자 위에서 멈췄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여기까지입니다.”

고개를 들었다. 하태의의 얼굴에는 이미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것이 더 큰 대답이었다.

“알고 계셨군요.”

“알고 있었소.”

“이게 무엇인지도.”

하태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장으로 걸어가 서랍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열지는 않았다.

“선왕비마마께서 부르시던 곡이오.”

허리가 곧게 펴졌다. 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프다는 감각마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선왕비마마’.

그 세 글자가 어깨를 내리눌렀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두 어깨 사이로 번지는 한기를 느끼며 하태의의 입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약장 서랍들 사이에서 말라 비틀어진 약초 냄새가 새어 나왔다. 언젠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맡았던 냄새와 닮아 있었다. 본능적으로 품속의 비망록이 접힌 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종이가 갈비뼈를 지긋이 밀어 올리는 감촉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자장가였사옵니까.”

“……그렇게 알려진 곡입니다.”

말끝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단순한 자장가는 아니었사옵니다.”

“그 말씀은.”

하태의가 몸을 돌렸다. 굽은 등이 평소보다 더 굽어 보였다.

“선왕비마마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 그 곡이 침전에 흘렀습니다.”

“그걸 누가.”

“기록되어 있소.”

하태의가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무게가 실렸다.

“진실은 기록되어 있다오.”

말을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유여연도 묻지 않았다. 물을 수 있는 말은 더 있었지만, 그의 표정이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버님의 비망록에도 같은 선율이 적혀 있었사옵니다.”

하태의의 눈썹이 움찔했다.

“같은 것입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나, 이음줄 하나까지.”

“그것을 언제.”

“어젯밤 확인했사옵니다.”

하태의가 탁자로 다시 걸어와 앉았다. 손이 약첩을 향했다가 멈추었다.

“그 비망록은 어디 있소.”

“품에.”

“……꼭 지키시오.”

“이미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르쳐주신 것, 잊지 않겠사옵니다.”

“묻지 않을 겁니까.”

“더 물으면 나으리께서 위험해지실 일이옵니까.”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유여연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약고를 나섰다.

태후전 암향각.

이상궁이 무릎 꿇은 지 한참이 지났다. 향로의 연기만이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일이 더디구나.”

태후의 손톱이 탁자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전하의 침전에서도 서류를 내주지 않으시옵고, 몽희들의 음역대 기록도 신빙성이 부족하옵니다. 대조할 실질적 근거가……”

“됐다.”

탁자 모서리를 긁는 소리가 났다. 붉은 손톱이 목재 결을 따라 비스듬히 파고들었다. 이상궁의 어깨가 바짝 굳었다.

“하태의. 그 늙은 의원을 먼저 털어라.”

“어의를…… 말씀이시옵니까.”

“의심스럽지 않으냐. 처음부터 몽희를 그토록 챙기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몽희와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니.”

“무슨 명분으로……”

“명분?”

탁자에서 손이 떨어졌다.

“전하의 불면을 핑계로 사약고 출입 기록이 비대하다. 그 기록만 샅샅이 뒤져도 무언가는 나오리라.”

이상궁이 이마를 조아렸다.

“출입 명부와 조제 기록을 대조하겠사옵니다.”

“은밀하게. 하태의가 눈치채면 그 늙은 의원은 기록을 감추는 데 능하다.”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태후가 창가로 걸어갔다. 붉게 물든 손톱이 창틀을 두드렸다.

“몽희들의 처소도 다시 살펴라. 등록 서류만으로 부족하면, 방 안을 직접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내명부 수색 권한으로는 몽희의 사적 처소까지……”

“내가 권한을 줄 것이다.”

태후가 뒤돌아보았다. 눈빛에 온기가 없었다.

“이틀. 이틀 뒤에는 이름을 듣고 싶구나.”

이상궁이 물러난 뒤에도 태후는 창가에 서 있었다. 염주를 굴리는 소리가 유난히 빨랐다. 탁자 위에는 손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내명부 복도.

소취는 종일 발걸음이 무거웠다. 어젯밤 잠든 척하며 들은 유여연의 숨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떨리는 손, 접었다 펴는 종이 소리. 그리고 ‘아버지……’.

무슨 일인지 묻지 못했다.

그 부담을 안은 채 내명부 앞 복도를 지나는데, 손목이 가벼웠다.

순간 멈춰 섰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붉은 팔찌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매듭이 풀린 건 아니었다. 끈이 닳아 있었다.

허리를 굽히려는 찰나, 마른 손이 나타나 팔찌를 집어 올렸다.

“이게 뭐.”

늙은 내시의 목소리였다. 궁내부 소속의 낡은 관복. 얼굴은 낯이 익었지만, 태후전 쪽에서 가끔 보이던 자였다. 소취가 손을 내밀었다.

“제 것이옵니다. 돌려주시옵소서.”

“네 것.”

내시가 손바닥 위에 팔찌를 올려 살폈다. 붉은 매듭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 매듭…… 예전에 태후전 침방에서 일하던 그년 것과 같군.”

소취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말문이 막혔다. 내시가 팔찌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이게 왜 네게 있지, 나으리께서 궁금해하실 일이구나.”

“그건……”

“됐다. 네 입으로 해명할 자리는 따로 있을 테니.”

내시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태후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소취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달려가 빼앗을 수도 없었다. 소리쳐 부를 수도 없었다. 다리는 돌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팔찌가 태후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옛 심복 궁녀가 남긴 유일한 유품. 그녀는 태후에게 ‘눈을 감았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났고, 그 매듭은 충성의 증표였다. 지금 그 증표가 적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숨이 막혔다.

소취는 몸을 돌려 태후전 바깥 회랑까지 달렸다. 등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 가슴께가 쿵쿵 뛰었다.

누군가에게 알려야 했다. 유여연께.

그녀가 없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사약고일까. 하태의를 만나러 간 걸까.

벽을 짚고 숨을 골랐다. 바로 저 앞, 태후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팔찌가 그 문 안으로 사라진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더 이상 숨을 시간이 없었다.

태후전 암향각.

이상궁이 무릎 꿇은 지 한참이 지났다. 향로의 연기만이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일이 더디구나.”

태후의 손톱이 탁자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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