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가면의 소리꾼

7화

태후전 암향각의 아침은 늘 어두웠다. 창호지 너머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까닭도 있었지만, 휘장을 걷어내지 않는 것이 이곳 주인의 오랜 습관이었다.

민씨는 손톱으로 탁자 모서리를 가만히 긁고 있었다. 붉게 물든 손톱이 나무결을 따라 미끄러질 때마다 미세한 가루가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이상궁의 어깨가 조금 굳었다.

“하태의 건은 아직이더냐.”

“사약고 출입 기록은 확보했사옵니다만…… 몽희와의 연관은 아직.”

태후의 손톱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그 늙은 의원부터 털라 했거늘.”

“조제 기록이 방대하여 대조에 시일이——”

“됐다.”

민씨가 손을 들어 이상궁의 말을 잘랐다. 길고 붉은 손톱이 촛불에 반짝였다.

“몽희의 면방을 먼저 뒤져라.”

이상궁이 고개를 들었다.

“마마. 면방 수색은 내명부 규정상 몽희 등록청의——”

“규정.”

태후가 짧게 웃었다. 손톱이 다시 탁자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천천히가 아니었다. 나무가 우는 소리가 짧게 났다.

“그 규정을 만든 게 누구인지 네가 모르진 않겠지.”

이상궁이 이마를 조아렸다.

“황공하옵니다.”

“금지된 창 관련 기록을 찾아라. 악보든, 필사본이든, 뭐라도 좋다.”

태후가 탁자에서 손을 뗐다. 손톱이 지나간 자리에 길고 가느다란 흠집이 생겨 있었다. 칠이 벗겨진 자리가 붉게 드러났다.

“그 몽희…… 아흔일곱 번. 목소리만으로는 역모를 입증할 수 없다.”

민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창백한 갈색 눈동자가 뱀처럼 빛났다.

“하지만 종이에 적힌 곡조는 다르지. 그 애비가 남긴 것 말이다.”

이상궁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태후는 떨림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무서우냐.”

“……아닙니다, 마마.”

“당연히 무서워야지. 내 명을 받들 때 긴장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태후가 손톱을 소매 안으로 거두었다.

“가라. 오늘 낮 안으로 끝내라.”

이상궁이 일어나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태후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못 찾으면 네가 증거다. 잊지 마라.”

문이 닫혔다. 민씨는 홀로 남은 암향각 안에서 탁자 위의 흠집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손톱 밑에 나무 가루가 끼어 있었다. 털어내지 않았다.

낮이었다. 유여연은 하태의와의 대화를 마치고 법당 쪽으로 향했다. 혼자 있고 싶었다.

어젯밤 들은 선율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선왕비의 자장가. 승하 당일 밤 침전에 흘렀던 곡. 아버지의 비망록과 정확히 겹치는 음계.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버지가 선왕비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닿아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익숙한 인영이 담장 모퉁이를 급히 돌아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치마폭을 움켜쥔 손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소취였다.

유여연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갔다. 소취는 평소에도 덜렁거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창백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소취야. 무슨 일이——.”

“아가씨……!”

소취가 달려들어 유여연의 소매를 붙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더운 낮인데도 손가락이 얼음 같았다.

유여연이 소취의 손을 감싸쥐었다. 손바닥이 차가운 손등을 눌렀다.

“숨부터 고르고 말해.”

“아니에요, 지금……!”

소취가 숨을 들이켰다. 말이 터져 나왔다.

“방이…… 방이 엉망이에요.”

유여연의 손가락이 소취의 손등 위에서 멈췄다.

“무슨 뜻이지.”

“제가 잠깐 물 길러 간 사이에, 내명부 궁녀들이 들이닥쳤대요. 이상궁이 직접 데리고 왔답니다.”

소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작은 주근깨가 박힌 얼굴이 일그러졌다.

“약장도, 침구도, 서랍도 다 뒤졌어요. 그리고……”

유여연이 소취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소취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가씨. 약첩 아래에 두셨던 그 종이…… 보이지 않아요.”

순간 귀가 멍해졌다. 법당 쪽에서 풍경 소리 몇 점 흘러왔다. 멀었다.

비망록이었다. 호흡의 이치를 적은 쪽.

유여연이 손을 놓았다. 소취의 어깨에서 떨어진 손이 허공에 멈췄다.

“내가 없는 동안.”

“네.”

“이상궁이 직접.”

“예. 틀림없어요. 목격한 궁녀가 둘이나 있답니다.”

유여연은 몸을 돌렸다. 걸음을 재촉했다. 소취가 뒤를 따르며 숨 가쁘게 덧붙였다.

“아직 태후전에 들어간 지 한 식경도 안 됐대요. 지금 가시면——”

“아니.”

유여연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다.

“찾으러 가지 않아.”

“네?”

소취가 걸음을 멈췄다. 유여연도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이미 빼앗긴 것을 찾으러 가는 것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아.”

“하지만 아가씨, 그 안에는——”

“알아.”

유여연이 소취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너는 가만히 있어.”

“……네?”

“너는 그 방에 없었다. 그 사실만 지켜라.”

소취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유여연이 손을 들어 막았다. 비녀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칼이 귀밑에서 떨렸지만,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호흡법이 적힌 종이 한 장이 아냐. 그보다 더 큰 것이 태후의 손에 들어간 거야.”

소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서워요, 아가씨.”

“나도 그래.”

유여연이 소취의 손을 다시 감싸쥐었다.

“하지만 밤이 오면 침전에 들어가야 해. 전하께서 기다리실 거다. 그분의 불면이……”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소취가 그 입술을 바라보았다. 유여연이 떨리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분의 불면이 지금 내가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패야.”

촛불이 반쯤 줄었을 무렵, 침전은 고요했다. 평소보다 촛불이 셋 더 많았다. 용상 위엔 이미 정리된 침구, 그 앞에 걸터앉은 이휘가 손가락을 무릎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유여연이 들어왔다. 은제 가면 97번이 촛불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예를 갖추려 이마를 조아리는 그녀에게 이휘가 손을 들었다.

“됐다. 가까이 오라.”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유여연이 가만히 다가가 침상 옆에 서자, 이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짙은 갈색 눈에 전에 없던 망설임이 스쳤다.

“오늘 밤은 노래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전하.”

“열 살 때였다. 우물에 빠진 적이 있다.”

유여연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굳어졌다. 이휘는 그녀의 눈을 보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물은 차가웠고,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손을 폈다 쥐었다. 언제나 차갑게 식어 있던 손끝이었다.

“그때 들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유여연의 숨이 멎었다. 가면 아래로 이휘의 입술만 보였다.

“노래였다. 우물 밖에서 누군가가 노래를 불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물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무섭지 않으셨사옵니까.”

유여연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작게 나왔다. 이휘가 짧게 고개를 저었다.

“그 목소리는 기억한다. 어둠 속으로 실 한 올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붙잡자 올라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유여연의 가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 목소리를 찾고 있다.”

유여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면이 무거워서도,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였다. 그를 구한 날부터 목덜미 아래 감춰져 있던 별 모양 흉터가 갑자기 따가워졌다.

“왜…….”

유여연이 입을 열었다.

“왜 오늘 밤, 그 이야기를 해주시옵니까.”

이휘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네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때 그 우물가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이유는 모르겠다.”

유여연의 손이 가면 아래로 올라갔다. 붉어질 것 같은 볼을 감추려는 듯 손끝이 금속에 닿았다. 식은 은제에 손의 열이 빨려 들어갔다. 자신이 구한 아이가 지금의 왕이라면, 자신이 부르는 목소리가 그가 찾던 것이라면. 지금 당장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아니었다. 아직 증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증명하는 순간, 가면이 보호막이 아니라 족쇄가 될지도 몰랐다.

“전하.”

유여연이 한 걸음 물러서며 허리를 조금 숙였다.

“오늘 밤은 어떤 노래를 들려드릴까요.”

이휘가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 노래나. 네가 부르고 싶은 것으로.”

유여연이 숨을 들이켰다. 열 살의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불러 한 아이를 구했던 날처럼,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첫 음을 띄웠다.

안혼곡이었다.

가면 속에서 흘러나온 선율은 침전의 공기를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촛불 세 개가 한꺼번에 꺼졌다. 이휘의 숨결이 느려졌다. 어깨가 침구 쪽으로 기울었다.

유여연은 끝까지 불렀다. 마지막 음이 사라질 때쯤, 이휘의 호흡은 깊고 고른 잠의 리듬에 완전히 실려 있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침전 문을 향했다. 가면을 고쳐 쓰면서 한 번만 뒤를 돌아보았다. 잠든 왕의 얼굴은 낮보다 열 살 어려 보였다. 마치 그날 우물가에서 구해낸 아이처럼.

유여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회랑은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침전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소매로 목을 감쌌다. 남은 것은 돌아가서 소취에게 말하는 일.

비망록의 호흡법 쪽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고 알리는 일. 그 다음은…….

“늦었군요.”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여연이 돌아보았다.

하태의였다. 백발이 바람에 조금 흩어져 있었고, 손에는 수첩과 붓이 들려 있었다. 그는 유여연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전하의 안부를 확인하러 왔습니다만, 이미 주무시는군요. 수고하셨소.”

“하태의님.”

유여연이 인사를 하려는 순간, 거센 바람 한 줄기가 회랑을 가로질렀다. 소매가 휘날리며 목덮개가 살짝 밀려났다. 순간이었다.

하태의의 눈빛이 멎었다.

유여연이 재빨리 손으로 목을 가렸지만, 하태의의 지혜로운 눈은 이미 포착하고 있었다. 왼쪽 목덜미 아래 작은 별 모양의 흉터.

“그 흉터…….”

노인의 목소리가 잠겼다. 붓을 쥔 손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하태의가 반 걸음 다가왔다.

“낭자, 어디서 다친 자리요.”

“오래된 것이옵니다.”

유여연이 목덮개를 다시 올리며 물러섰다.

“어릴 적 사고였사와요.”

“사고…….”

하태의가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제 그녀가 물었던 선율이 울렸다. 선왕비의 자장가.

승하 당일 밤 침전에 흘렀던 곡. 10년 전, 우물에 빠진 세자를 구한 정체불명의 소녀. 그 소녀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선왕비가 귀띔해주었던 기억.

“설마…….”

“하태의님.”

유여연이 가면 아래서 낮게 불렀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여쭤보지 말아주시옵소서.”

하태의가 입을 다물었다. 주름 사이로 작은 눈이 더 작아졌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왕에게 당장 알릴까도 생각했지만, 유여연의 굳은 어깨가 말하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알겠소.”

하태의가 붓을 소매 안으로 거두었다.

“다만 낭자. 위험해지면 반드시 나를 찾아오시오.”

“……명심하겠사옵니다.”

유여연이 마지막으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회랑을 빠져나갔다. 하태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구한 아이였군. 그날 그 소녀가…….”

노인이 혼잣말을 삼키고 발길을 돌렸다. 붓을 거둔 소매 안에서 수첩이 바람에 펄럭였다.

면방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소취가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촛불 하나 없는 방이었다. 소취는 어둠 속에서도 유여연의 손을 찾아 붙잡았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상궁이 다녀갔어요. 아까 밤에, 두 번째로요.”

“……무슨 말을.”

“역모죄 혐의라고 했어요. 내일 아침 대전에서 조사를 받으라 하더군요. 안혼곡 필사본 소지…… 그게 죄목이었어요.”

유여연이 숨을 들이켰다. 예상보다 빨랐다. 태후가 비망록을 확보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바로 공식 수순을 밟은 것이다. 가면 속에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

그녀가 가면을 벗었다. 촛불을 켜려던 소취의 손이 멈췄다. 유여연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창백하게 드러났다.

“아가씨, 어떡해요. 대전에 나가면…… 태후마마께서 벌써 증거를 다 쥐고 계실 텐데요.”

“증거는 증거일 뿐이야.”

유여연이 소취의 손을 잡았다.

“호흡법 한 장으로는 안혼곡 전체를 증명할 수 없어. 아버지의 비망록 어디에도 ‘안혼곡’이라는 글자는 적혀 있지 않아.”

“하지만 마마께서는 그걸로도 충분히——”

“소취야.”

유여연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순간 반말이 튀어나왔지만, 소취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이 더 커졌다.

“너는 내일 아침까지 이곳을 지켜라. 내가 대전에 가 있는 동안……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소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물이 맺혀 촛불도 없는데도 반짝였다.

“싫어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면방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정확한 걸음걸이였다.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굳어졌다.

이상궁이 면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등 뒤로 내명부 궁녀 두 명이 횃불을 들고 서 있었다. 이상궁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몽희 97번. 내일 진시, 대전으로 출두하라.”

소취의 붉은 팔찌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유여연은 천천히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은제 가면을 다시 집어 들었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가면을 썼다. 97번이 횃불에 번쩍였다.

소취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붉은 팔찌를 움켜쥐었다. 매듭 사이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태후전에서 흘러나온 것과 똑같은 매듭.

그걸 본 이상궁의 눈이 잠시 팔찌에 머물렀다. 이상궁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문이 닫혔다.

소취가 주저앉았다. 유여연은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가면을 고쳐 쓰고 어둠 속에서 똑바로 서 있었다.

가면의 소리꾼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