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가면의 소리꾼

9화

약방 깊숙한 곳, 약재 냄새가 가장 짙게 배어 있는 벽 앞에서 하태의가 걸음을 멈추었다.

벽돌 하나를 밀어 넣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에서 낡은 비단 보자기를 꺼내는 손이 느렸다. 보자기를 풀자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바랬으나 먹물은 선명했다.

유여연의 호흡이 멎었다.

“이게…….”

악보였다. 아버지 비망록 속 필사본보다 훨씬 오래된 필체. 붓끝이 가늘게 떨린 자국까지 살아 있었다.

하태의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선왕비 마마의 친필입니다.”

유여연이 가면을 들어 올렸다. 눈가가 드러났다. 그 눈이 악보 위를 더듬었다.

첫째 줄, 둘째 마디. 아버지의 비망록에 적힌 것과 똑같은 음 높낮이. 이음줄 방향까지 완전히 일치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이 곡은…….”

“자장가입니다.”

하태의가 악보 위로 손바닥을 펼쳤다.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전하께서 어려 잠들지 못하실 때마다 선왕비 마마께서 직접 부르셨지요. 저주송이 아닙니다. 어미가 아들에게 들려준 잠재우는 소리였습니다.”

유여연의 손가락이 악보 가장자리를 짚었다. 아버지가 평생 찾아 헤맨 그 곡이, 금지된 창으로 불리며 유씨 가문을 멸문으로 몰아넣은 그 선율이, 실은 어미의 노래였다니.

“어째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째서 이 곡이 금지된 겁니까.”

하태의가 잠시 눈을 감았다. 촛불이 그의 흰 눈썹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선왕비 마마께서 승하하시던 날 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침전에 이 선율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노래가 끝난 직후, 마마께서 각혈을 쏟으셨습니다. 제가 달려갔을 땐 이미 손톱이 파래지고 숨이 끊어진 뒤였습니다.”

유여연의 손이 악보에서 떨어졌다. 가면 아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걸…… 보셨습니까.”

“보았습니다. 저는 선왕비 마마의 시의로 침전 바로 옆방에서 대기 중이었으니까요.”

하태의의 목소리가 한 톤 더 낮아졌다.

“태후 마마께서 도착하셨을 땐 이미 상황이 정리된 뒤였습니다. 마마께서는 그 자리에서 이 곡을 금지하시고, 침전에 있던 악사와 시종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라 명하셨지요.”

“악사들을…….”

“사흘 뒤 전원 처형됐습니다. 그들이 속한 가문도 멸문이었고요.”

유여연의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그녀가 주저앉으려는 것을 하태의가 황급히 팔을 내밀어 받쳤다.

“유씨 가문도…….”

“그 악사들 중 한 분이 낭자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촛불이 일렁였다. 약장 너머로 소취의 숨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입구 쪽에서 한 발짝 다가서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말도 안 돼.”

소취가 중얼거렸다. 손에 쥔 붉은 팔찌가 떨렸다.

유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악보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하태의는 보았다. 그녀가 악보의 선율을 입술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첫째 마디, 둘째 마디, 그리고 전하가 침전에서 흥얼거리던 바로 그 대목에서 그녀의 입술이 멈췄다.

눈이 붉어졌다. 목울대가 한 번 움직이고 말았다.

하태의가 조용히 보자기를 들어 악보를 덮었다.

“십 년 동안 제가 숨겨왔습니다. 어느 날엔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감히 꺼내지 못했습니다.”

“왜…… 지금은 꺼내셨습니까.”

유여연의 목소리가 잠긴 채로 물었다.

하태의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눈빛이 단호했다.

“낭자께서 바로 그날 밤, 우물가에서 전하를 구한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유여연의 어깨가 굳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오직 나와 낭자뿐입니다. 하지만 이 악보를 전할 자격은 오직 그 아이에게만 있습니다. 전하의 생명을 구한 자에게, 이 자장가의 진실을 전하는 것이 선왕비 마마의 뜻이라 믿습니다.”

소취가 유여연의 곁으로 와 섰다. 그녀가 유여연의 소매 끝을 살며시 쥐었다. 유여연의 손이 소취의 손 위로 올라갔다. 손끝이 식어 있었다.

“태후께서는…….”

유여연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는 증인을 남기지 않으셨군요. 단 한 명도. 그래서 저희 가문이 멸문된 겁니다. 아버지가 알고 있었으니까. 이 곡이 저주송이 아니라는 걸.”

그녀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반말로 떨어졌다. 하태의는 바로잡지 않았다.

보자기가 다시 묶였다. 비단이 악보를 감싸는 소리만 약방에 남았다.

약방 안은 아직도 선왕비의 죽음이 남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유여연은 손에 든 전서를 내려다보았다. 먹물이 바랜 글씨가 촛불에 일렁였다.

소취가 문 틈으로 바깥을 살피다가 돌아섰다.

“아가씨.”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순찰대예요.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아요.”

하태의가 약장에서 작은 비단 보자기를 꺼냈다. 손끝이 바빠졌다.

“원본 악보는 이미 옮겨두었소. 이 전서만은 직접 지니시오.”

유여연이 고개를 들었다.

“그 호흡법. 제가 읽기엔 이해하지 못한 대목이 있었사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소.”

하태의가 전서를 그녀의 손에 눌러 쥐여주었다.

“단 하나만 기억하시오. 숨을 들이쉴 때 배꼽 아래 세 치를 의식할 것. 내쉴 때는 그곳에서 소리가 올라오게 할 것. 그렇게 하면 듣는 이의 맥박이 느려지오.”

유여연이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 깊이 전서를 밀어 넣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가시지요.”

하태의가 약장 아래 깔린 멍석을 발로 밀었다. 돌판 하나가 들어 올려졌다. 아래로 좁은 계단이 입을 벌렸다.

“약방 뒤편 수로까지 이어져 있소.”

소취가 먼저 계단으로 내려갔다. 유여연이 하태의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은혜, 잊지 않겠사옵니다.”

“살아서 만납시다.”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의 대감 계시오니까? 순찰대장이옵니다!”

하태의가 유여연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가 계단 아래로 사라지자마자 돌판을 원위치했다. 멍석을 덮고 나서야 어깨에 힘이 빠졌다.

문을 열었다. 순찰대장이 횃불을 든 병사 여섯을 이끌고 서 있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시오.”

하태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대장이 반절 고개를 숙였다.

“밤사이 약방 주변에서 의심스러운 인영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사옵니다. 한 번 둘러보았으면 합니다.”

“내 약방에는 환자도 없소.”

“절차일 뿐입니다.”

하태의가 문을 활짝 열어 보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들어오시오. 다만 약재를 건드리면 내 책임이 아니오.”

그 눈이 순찰대장의 등 뒤를 향했다. 약방 뒤편 수로 방향은 캄캄했다.

수로 갱도 안은 습한 돌 내음이 가득했다. 발밑으로 얕은 물이 흘렀다. 양옆 벽은 이끼에 덮여 손으로 짚으면 미끄러졌다.

유여연이 벽에 기대 숨을 골랐다. 가면을 잠시 들어 이마를 드러내니 땀이 흘러내렸다.

소취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가면 외곽 수구로 이어져요. 거기까지 가면……”

유여연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숨 좀, 한 번만.”

소취가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뒤를 살폈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도, 횃불 기척도.

“저……”

소취가 품에서 붉은 팔찌를 꺼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태후전에 저를 도와준 궁녀가 있어요. 제 팔찌를 보면 위험하다는 걸 알 거예요.”

유여연이 고개를 들었다.

“언제 그런 이를?”

“예전에 약을 구해주면서 인연이 닿았어요. 지금은 태후전 침방에 있어요.”

소취가 작게 부연했다.

“내명부 동향을 종종 전해줬어요. 이 팔찌를 보내면 저희가 위험하다는 신호로 알아볼 거예요.”

“그걸 어떻게 전하지.”

유여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소취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로 벽 한쪽에 작은 틈새가 있었다. 궁인들이 은밀히 물건을 주고받는 전서구용 빈 공간이었다.

“여기에 놓고 가면 내일 아침이면 닿을 거예요.”

소취가 팔찌를 그 틈에 밀어 넣었다. 붉은 매듭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유여연이 다시 가면을 내렸다. 숨소리가 고르게 돌아왔다. 그녀가 벽에서 몸을 떼자, 소취가 앞장서 걸었다.

태후전 깊숙한 암향각. 향로 하나만이 푸른 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상궁이 문턱을 넘기 전에 입을 열었다.

“확인했사옵니다.”

태후 민씨가 의자에 기댄 채 손가락 하나를 까딱했다.

“들어와.”

이상궁이 무릎을 꿇었다. 손에 든 문서 두루마리가 바닥에 닿았다.

“가면 97호의 등록 명부를 유씨 가문 진료부와 대조한 결과, 동일 가문 출신임이 확실합니다.”

태후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긁었다. 나무에 실금이 생겼다.

“유씨 집안에 살아남은 자식이 있었느냐.”

“진료부 초본에는 막내딸이 폐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사옵니다. 허나 그 사망 기록과 매장 일자가 일치하지 않사옵고, 같은 시기 절에서 치료받은 여아의 기록이 남아 있사옵니다.”

“이름.”

“유여연.”

태후의 눈이 가늘어졌다. 향로의 연기가 갑자기 꺾였다.

“네가 확인했느냐.”

“제 눈으로 일일이.”

이상궁이 말을 이으려다 잠시 멈추었다. 태후의 표정을 살피는 듯했다.

“대비마마. 그 계집은 지금 하태의의 약방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태의.”

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늙은 의원이 감히.”

목소리는 낮았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찻잔을 집어 벽으로 던졌다. 도자기가 산산조각 났다.

“내시별감대를 불러라.”

“예, 마마.”

“네가 직접 이끌어라. 그 계집을 내 앞에 무릎 꿇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이상궁이 고개를 조아렸다. 일어서는 동작에 망설임이 없었다.

태후가 부서진 찻잔 조각을 밟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밖은 어둠뿐이었다.

“유씨의 핏줄 하나가 아직 살아 있었다니.”

혼잣말이었다. 손톱이 창틀을 파고들었다.

수로 갱도. 물소리가 점점 커졌다. 바깥 수구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취가 앞서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저 앞이——”

말이 채 끝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가 켜졌다. 이어서 둘, 셋. 좌우로 여덟 개의 불꽃이 동시에 타올랐다. 돌벽에 갇혀 있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상궁이 내시별감대원들 사이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손에는 아직 칼을 쥐지 않았다. 필요가 없었다.

“거기까지다.”

목소리가 수로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몽희 97호.”

유여연의 발이 멈추었다. 등 뒤로 소취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대비마마께서 친히 기다리신다.”

유여연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전서를 감쌌던 손가락이 붉은 팔찌가 있어야 할 빈 자리를 더듬었다. 이미 틈새에 두고 왔다는 걸 떠올리자, 손끝이 약간 떨렸다.

가면 뒤로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어둠 속에서 횃불 하나가 켜졌다. 이어서 둘, 셋. 좌우로 여덟 개의 불꽃이 동시에 타올랐다. 돌벽에 갇혀 있던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이상궁이 내시별감대원들 사이에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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