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1화
빛이 먼저였다.
눈을 찌르는 백색 섬광. 이어서 전신을 찢는 고통. 뼈마디가 뒤틀리고 혈관 속 무언가가 타들어 갔다. 한도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돌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볼에 닿았다.
“……성공인가.”
낯선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굵고 낮은 중년 남자의 음성.
한도영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하게 흔들렸다. 돌바닥에 새겨진 붉은 문양이 꺼져가고 있었다. 마법진.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이건 꿈이 아니다.
고통이 가라앉자 다른 감각이 밀려왔다. 오른쪽 팔뚝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상체를 일으켰다.
“소환된 자여, 일어나라.”
목소리의 주인은 중년의 남자였다. 푸른 눈, 백발이 섞인 금발.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칼자국. 그가 검지로 바닥을 가리켰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군.”
한도영은 대답 대신 팔뚝을 움켜잡았다. 소매 너머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소매를 걷자 거기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문신. 고대어 비슷한 문자들.
그중 가장 굵은 선으로 새겨진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문자가 아니라 그림처럼 생긴 기호. 하지만 그의 뇌는 직관적으로 이해했다. 저것은 기한이다.
숫자가 번쩍 빛나더니 시야에 각인됐다. 몇 초인지 분인지, 찰나의 인상만 남았다.
짧다.
턱까지 밀려온 말을 삼켰다.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일어나시오.”
한도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식장은 생각보다 좁았다. 벽에는 촛불 몇 개가 켜져 있었고, 천장의 돌은 그을음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오래된 장소였다.
중년 남자 뒤로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나는 검은 로브에 지팡이를 짚은 노인. 다른 하나는 갑옷 차림의 젊은 남자였다.
“나는 에리히 아렌트 백작. 이 변경백령의 영주다.”
남자는 자신을 소개하며 한 걸음 다가왔다. 기품 있는 말투였지만, 군인처럼 직선적이었다.
“그대에게 선택권은 없다. 소환 마법은 대가를 요구한다. 기한 내에 목숨, 기억, 또는 나에게 종속될 의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한도영은 침묵했다. 오른팔에 새겨진 문신이 욱신거렸다.
소환. 대가. 계약.
그가 바라던 귀환이 아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는 호흡을 고르고 에리히의 복장을 살폈다.
낡은 회색 제복. 가슴에 독수리 문장 브로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가문의 상징으로 보였다.
허리춤의 검은 실전용이었다. 손잡이에 마모 흔적이 선명했다. 이 남자는 장식용 귀족이 아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리히가 낮게 말했다.
“이곳은 변경이다. 전투 능력이 없는 자는 쓸모가 없지. 그대는 어떤가.”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전투는 못 합니다.”
“예상했다. 소환진이 그대를 택한 이유가 궁금하군.”
한도영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식장을 천천히 훑었다. 마법진의 소재, 벽난로의 배치, 천장 높이까지.
정보가 필요했다.
“영지에 지도가 있습니까.”
에리히의 눈썹이 올라갔다.
“지도?”
“볼 수 있다면 얘기가 빠를 것 같습니다.”
에리히는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참모에게 명령했다.
“간이 지도를 가져와라. 경작지와 수계가 표시된 것으로.”
참모가 의식장을 나갔다.
에리히가 다시 한도영을 향했다.
“설마 자네, 지도를 읽을 줄 아나. 변경의 영민들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물건이다.”
“읽습니다. 그리고 그리는 법도 압니다.”
에리히가 낮게 웃었다. 믿지 않는 웃음이었다.
“자신감은 좋군.”
기다리는 동안 한도영은 팔뚝의 문신을 살폈다. 소매를 살짝 들추자 고대어 문자들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참을 만했다.
기한. 저 굵은 숫자는 얼마일까.
그는 소매를 내렸다. 지금은 분석할 시간이 없다. 먼저 이 영지에서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참모가 돌아왔다. 품에 낡은 양피지 뭉치를 안고 있었다. 그는 탁자 위에 지도를 펼쳤다.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했다. 잉크가 번진 곳도 있었다. 하지만 산맥과 하천의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한도영은 즉시 본능적으로 분석을 시작했다.
등고선. 하천의 분기점. 경작지의 범위.
경작지가 하천을 따라 길게 뻗어 있었다. 관개 수로는 한 줄기. 그것도 하류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구조였다. 지형은 완만한 경사인데, 수로는 그 경사를 거스르고 있었다.
중력의 흐름을 무시한 설계.
“여기입니다.”
그는 목탄을 집어 들었다. 에리히와 참모의 시선이 집중됐다.
“기존 수로는 하류에서 물을 끌어올리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지형 경사를 역행하고 있어요.”
목탄이 양피지 위를 지나갔다. 거친 선이 경작지를 가로지르고 하천 상류로 이어졌다.
“이 지점에서 물길을 빼면 자연 낙차로 경작지 전체에 물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상류에서 새 물줄기를 끌어올 필요도 없고, 관개 거리도 3분의 2로 줄어듭니다.”
참모가 숨을 들이켰다. 에리히는 말이 없었다.
한도영은 계속 그렸다. 하천 상류에서 분기해 경작지 북쪽 경계를 따라 흐르는 새 수로. 기존 하천의 지류들을 연결하는 보조 수로들.
논리적인 물길이 양피지 위에 펼쳐졌다.
그가 목탄을 내려놓자 침묵이 찾아왔다.
참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가능한 겁니까. 이런 설계는 본 적이 없습니다.”
“지형을 본 적이 없어서겠죠.”
한도영은 에리히를 보았다. 백작은 여전히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새로 그려진 수로를 천천히 따라갔다.
“이대로라면 강 상류에서 물을 끌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네. 기존 하천 하나면 충분합니다.”
에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깊게 팬 눈에 무언가 반짝였다. 피로 속에서도 예리함이 살아 있는 눈이었다.
“하룻밤 묵어라.”
그의 목소리가 약간 낮아졌다.
“내일 아침, 직접 현장을 보여주겠네.”
한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만큼은 얻었다.
에리히가 참모에게 손짓했다.
“의식장 옆 방을 내주게. 식사도 가져가고.”
참모가 한도영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침상 하나, 작은 탁자, 촛불 한 개. 벽에는 금이 가 있었고 창문 틈으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식사는 곧 가져오겠습니다.”
참모가 문을 닫고 떠났다.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멀어졌다.
한도영은 촛불을 켰다. 심지가 타는 소리만 방 안에 남았다.
오른쪽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문신은 생각보다 선명했다. 고대어 문자들이 팔뚝을 휘감고 있었다. 대부분은 해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한을 나타내는 숫자만은 알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글자였는데도 머릿속에 그 뜻이 박혀 있었다.
이거다.
숨이 멈췄다. 짧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짧다.
몇 달이 아니다. 아마도 몇 주. 길어야 몇 달.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손때 묻은 검은색 표지. 이 세계로 올 때 가진 유일한 물건이었다.
촛불 아래에서 숯연필로 문신의 패턴을 그려나갔다. 고대어 문자의 획순과 굵기. 계약 문장의 분절 방식.
그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기한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지만 분석은 할 수 있다. 이 계약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계약을 깰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꼭 찾는다.”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촛불이 반쯤 줄었을 무렵, 그는 수첩을 덮었다.
밖에서는 바람 소리만 들렸다. 이 세계의 밤은 조용했다. 현대 도시의 소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첩을 가슴께 안은 채 침상에 누웠다. 손이 재킷 안주머니로 향했다. 수첩의 모서리가 손바닥에 닿았다.
눈을 감았다.
기한은 생각보다 짧다.
이 수첩의 패턴에서 답을 찾지 못하면 나는 이 세계에서 사라진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오른팔의 문신이 낮은 열기로 욱신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