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2화
밤이 넘어갔다.
한도영은 새벽녘에 잠에서 깼다. 오른팔 문신이 여전히 낮은 열기를 띠었다. 수첩을 재킷 안주머니에 밀어넣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몸은 무거웠으나 누워 있을 틈이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한도영 님, 백작님 분부입니다. 아침 식사 후 현장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참모의 목소리다. 한도영은 문을 열었다.
“바로 가죠.”
“식사는……”
“현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복도를 걸으며 팔뚝을 한 번 더 만졌다. 소매 안쪽에서 문신이 욱신거렸다. 기한이 짧다. 식사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의식장 입구에 에리히 백작이 서 있었다. 그는 한도영의 얼굴을 보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식사는.”
“괜찮습니다.”
에리히는 더 묻지 않았다. 앞장서서 걸었다. 참모 한 명과 호위병 둘이 뒤를 따랐다.
의식장 밖으로 나서자 마른 흙먼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땅은 갈라져 있었다. 길 양옆 목조 건물들은 기둥이 기울었고 창문마다 판자가 덧대어져 있었다.
영민 거주 구역은 생각보다 넓었다. 의식장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길게 늘어선 마을 형태였다. 에리히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설명했다.
“3년째다.”
“비가.”
“그래. 작년 수확량은 평년의 절반도 안 됐다.”
한도영은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길바닥에 앉은 영민들의 얼굴이 보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노인. 팔이 가늘어진 여인. 아이들은 울지도 않고 모래를 만지작거렸다.
모두가 굶주렸다. 지도 위 숫자가 아니라 실제 살과 뼈로 증명된 기근이었다.
에리히가 걸음을 멈췄다. 관개 수로 입구였다.
“여기다.”
한도영은 수로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수위는 바닥에 가까웠다. 흙벽으로 만든 측면은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경사를 눈으로 추적했다. 지형보다 수로 바닥이 높았다.
“이건 흘러내리는 구조가 아닙니다. 퍼 올리는 방식이죠.”
“알고 있다. 만든 지 오래됐으니까.”
한도영은 수로를 따라 십여 미터를 더 갔다. 중간쯤에서 쪼그려 앉아 바닥에 손을 짚었다. 흙은 바싹 말랐다. 곳곳에 깃털처럼 갈라진 틈새가 보였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측량 도구가 있습니까.”
에리히가 참모를 돌아봤다. 참모가 고개를 저었다.
“대장간에 있습니다만…… 작동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 2년간 써 본 적이 없어서요.”
“보고 싶습니다.”
대장간은 구역 남쪽 끝에 있었다. 벽돌 굴뚝엔 금이 가 있었고 풀무는 녹슬어 있었다. 문을 밀자 먼지 냄새가 확 끼쳐왔다.
구석에 측량 도구들이 쌓여 있었다. 삼각기 하나는 다리 하나가 빠졌다. 줄자는 표면에 녹이 슬었고 눈금도 군데군데 지워졌다. 측량대는 두 개뿐이고 끝부분이 썩었다.
한도영은 삼각기를 집어 들었다. 빠진 다리를 만져보고 경첩을 움직여봤다. 손으로 돌리자 삐걱거리며 열렸다.
“고칠 수 있겠나.”
에리히의 물음에 삼각기를 내려놓았다.
“대장장이가 이 부품을 다시 만들 수 있다면요. 줄자는 눈금을 새로 새겨야 합니다.”
에리히를 향해 돌아섰다.
“3일 안에 새 수원 위치를 찾겠습니다.”
에리히의 눈썹이 올라갔다.
“3일.”
“측량 지점 세 군데만 잡으면 지형 분석이 가능합니다. 수로 신설 위치도 그때 확정할 수 있습니다.”
“조건이 있을 텐데.”
“측량 도구 수리. 그리고 인력 한 명.”
에리히는 잠시 그를 응시했다. 대장간 안은 조용했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게 다인가.”
“지금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에리히는 팔짱을 풀었다. 곁의 참모에게 손짓했다.
“대장장이에게 전해. 이틀 안에 저 도구들을 고치라고.”
참모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백작의 시선이 다시 한도영에게 꽂혔다.
“3일 뒤, 결과를 가져와라. 없으면……”
말을 끊었다. 이방인에 대한 신뢰와 의심이 공존하는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에리히는 뒤돌아섰다. 호위병 둘이 그를 따라 대장간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풀무 옆에 한도영 혼자 남았다.
측량 도구들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삼각기, 측량대, 줄자.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세계에선 이것들뿐이었다. 수학과 관측으로 싸워야 하는 땅이다.
대장간을 나서자 마을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영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떤 노인은 그가 지나가자 물통을 끌어당겼다. 한 여인은 아이를 품에 안고 뒤로 물러섰다.
의심. 당연한 반응이었다.
발을 멈췄을 때 좁은 골목에서 움직임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띄었다. 어깨까지 오는 풍성한 머리칼이다. 마른 체형에 낡은 리넨 블라우스와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 차림이었다. 허리에는 약초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스물둘 정도의 여자다. 코와 볼에 주근깨가 흩어져 있었고 손끝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골목을 급히 걸어오다 우뚝 멈춰 섰다. 한도영을 발견한 게 분명했다.
호박색 눈이 그를 훑었다. 관찰이 아니라 평가였다.
“또야.”
낮고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시선이 한도영의 복장을 훑고 얼굴에 머물렀다.
“귀족의 장난감인가. 이번엔 동양인을 소환했나 보네.”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근깨 낀 얼굴에 경멸이 떠올랐다.
“영주님 취미도 참 다양하셔.”
여자는 한도영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약초 주머니가 허리에서 흔들렸다. 걸음은 빠르고 목적이 분명했다.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데 몇 초 걸리지 않았다.
한도영은 그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장난감. 그 단어가 귀에 남았다.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려다 멈췄다. 지금 기록할 내용이 아니었다. 적대감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부터 측량이다. 3일은 짧다.
오른팔의 문신이 다시 한 번 욱신거렸다.
해질녘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른 땅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해질녘까지 한도영은 측량 계획을 점검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망치 소리를 따라 성곽 바깥으로 발을 옮겼다.
하늘은 붉은 기운을 머금었지만 따뜻하지 않았다. 바람이 먼지를 일으켜 발목께를 때렸다.
성 바깥쪽 길을 따라 대장간을 찾았다. 쇠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리듬이 일정했다. 숙련된 손이다.
대장간 입구에는 연장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낫, 괭이, 말편자. 농기구가 대부분이었다. 안쪽에서는 덩치 좋은 중년 남자가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한도영이 문간에 서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방인이 여긴 무슨 일이오.”
“측량 도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삼각기, 줄자, 추.”
대장장이가 풀무 손잡이를 놓았다.
“삼각기는 하나 있다. 작년에 부러진 걸 고쳐 썼는데……”
구석으로 걸어가 천으로 덮인 도구를 꺼냈다. 삼각기 다리 하나가 다른 재질의 쇠로 용접되어 있었다. 각도 조절 나사엔 녹이 슬었다.
“줄자는요.”
“가죽 줄자라면 있다. 하지만 오차가 꽤 날 거요.”
벽에 걸린 줄자를 내렸다. 눈금이 희미했다. 가죽이 늘어난 흔적이 역력했다.
한도영은 삼각기를 살폈다.
“이걸로 수평을 잡을 수 있습니까.”
“글쎄요…… 정밀한 일이라면 어려울 겁니다.”
대장장이는 팔짱을 끼었다. 이방인이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한도영은 삼각기 다리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추를 매달아 수직을 확인할 수 있는지 점검했다. 각도가 틀어지지 않게 쐐기를 박았다.
“괜찮습니다.”
“뭘 할 생각이오.”
“지형 측량입니다. 수원을 찾아야 합니다.”
대장장이는 코웃음을 쳤다. 악의는 없었다. 그냥 믿지 않는 얼굴이었다.
“물은 땅속에 있는데, 그걸 쇠붙이로 찾겠다는 말이오.”
“직접 파기 전에 어디를 파야 할지 찾는 겁니다.”
한도영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간단한 삼각 측량도를 그렸다. 두 지점에서 같은 목표물을 관측해 각도 차이로 거리를 구하는 방식이었다.
대장장이는 그림을 물끄러미 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이 뭘 할 수 있을지 내 알 바는 아니오. 도구가 필요하면 빌려주겠소. 단, 부수면 물어야 하오.”
“이해했습니다.”
빌릴 도구 목록을 수첩에 적었다. 삼각기 하나, 가죽 줄자, 쐐기 다섯 개, 추 세 개. 전부 영지에서 수리 가능한 물건이었다.
대장간을 나섰을 땐 해가 거의 졌다.
밤. 바람이 멎고 공기는 차가웠다. 한도영은 잠자리를 찾아 영민 거주 구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내 객실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발걸음이 멈췄다.
어둠 속에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임시로 친 천막이었다. 찢어진 방수포를 기둥에 묶고 바닥에는 짚을 깔았다. 그 안에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스무 명쯤. 대부분 아이와 노인이었다.
등불을 든 사람이 보였다. 붉은 머리. 로즈마리였다.
한도영은 천막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섰다. 어둠에 가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로즈마리는 아이 하나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체온을 재는 듯 천천히 손을 옮겼다.
“뜨거워졌네.”
목소리는 담담했다.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말린 약초를 찢어 물에 적신 다음 아이 입술에 떨어뜨렸다. 아이가 칭얼거렸다.
“참아. 아직 밤은 길어.”
곁에 있던 노파가 기침을 했다. 로즈마리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노파의 등을 두드려주며 숨을 가다듬게 했다. 한 손으로 약초를 빻는 절구질도 멈추지 않았다.
구석에서 배고픈 듯 우는 아이가 있었다. 네댓 살쯤 되어 보였다. 로즈마리는 허리춤에 묶인 보따리를 풀었다. 검은 빵 한 조각이 나왔다.
아이 입에 빵을 쥐여주고 남은 부스러기는 다른 아이 손바닥에 나눠주었다. 자기 몫은 보이지 않았다.
한도영은 그 모습을 보며 손이 주머니 속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낮에 만났을 때 그녀는 경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방인에게서 공동체를 지키려는 태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로즈마리는 달랐다. 병상 하나하나에 무릎 꿇고 제 몫의 빵을 떼어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존만 생각했던 하루가 갑자기 가볍게 느껴졌다. 기한을 따지고 계약을 분석하고 수첩에 기록하던 일들. 그것들은 필요했다. 하지만 이 천막 앞에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하급 조제사가 약초 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로즈, 해열제가 바닥이야.”
“야생 박하 뿌리라도 캐올게.”
“밤에 위험해.”
로즈마리는 대답 없이 약초 주머니를 챙겼다. 랜턴을 들고 천막을 나서려다 우뚝 멈췄다. 무언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종이 조각을 꺼냈다.
“이거, 내일 아침 약초상에게 전해줘. 외상 적어놨어.”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했다.
한도영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발소리를 죽여야 했다. 로즈마리가 눈치채지 않도록.
뒤에서 기침 소리가 이어졌다. 로즈마리의 발걸음 소리도 약초를 캐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영주성 집무실.
에리히 백작은 책상 위에 어젯밤 한도영이 수정한 지도를 펼쳐두고 있었다. 벽난로에는 장작이 탔지만 방 안은 서늘했다.
한도영은 문을 열고 들어서며 가볍게 목례했다.
“수원 탐사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해 보게.”
책상 앞으로 걸어가 수첩을 폈다. 대장간에서 빌린 도구 목록과 측량 방식을 간략히 적은 페이지였다.
“우선 영지 북서쪽 구릉에서 시작합니다. 지형 경사를 따라 지하수 흐름을 추정하고 삼각 측량으로 거리를 보정하면서 유력 지점을 좁힙니다.”
“측량은 혼자 하겠단 말인가.”
“보조가 한 명 필요합니다. 무거운 장비를 옮겨야 해서요.”
에리히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파스칼이라는 젊은이가 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녀석인데 공간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그 대장간에 계신 분 말입니까.”
“알고 있었나.”
“어제 도구를 빌리러 들렀습니다. 그분은 아니었습니다만…… 대장간 분위기나 도구 손질 솜씨는 확인했습니다.”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뜸을 들였다.
“자네에게 내줄 시간은 많지 않네. 사흘. 그 안에 결과를 내지 못하면……”
“알고 있습니다.”
한도영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 말을 끝으로 협상은 정리되었다. 에리히가 손을 내저었다. 약속의 의미였다.
바로 그때, 왼쪽 팔뚝에서 낮은 열기가 올라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피부 안쪽에서 작은 숯불이 옮겨붙은 듯한 감각. 통증이라 할 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반응했다.
한도영은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팔을 자연스럽게 몸 쪽으로 붙이며 백작을 향했다.
“오늘 중으로 파스칼과 만나겠습니다.”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게 하지. 직접 데려가라.”
한도영은 다시 목례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손이 재킷 안주머니로 향했다. 수첩을 꺼냈다. 페이지를 넘겼다. 어젯밤 기록한 문신 패턴 옆에 새 장을 폈다.
숯연필로 빠르게 적었다.
‘계약 문신, 발열 반응 최초 발생. 통증 수준은 경미. 발생 시점——에리히 백작과 3일 기한 합의 직후.’
‘변수: 기한 자체에 문신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아니면 구두 합의가 계약의 어떤 조건을 건드렸는지 불명.’
연필을 멈추고 팔뚝을 만져보았다. 열기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다만 통증이 심해지지는 않았다.
수첩을 접어 품에 넣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3일. 이 세계에서 내 지식이 통하는지 아닌지, 그걸 증명할 시간이다.’
복도 창밖으로 메마른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다. 오직 말라붙은 땅만이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파스칼을 찾으러 가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