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3화

잠은 오지 않았다.

한도영은 객실 침상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왼쪽 팔뚝의 열기는 한 시간쯤 지나자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감각이 남았다.

일어나 셔츠 소매를 걷었다. 문신은 여전히 선명했다. 손가락으로 문양을 따라 그어보았다.

어제 같은 발열은 없었다. 수첩을 꺼내 기록을 덧붙였다. '발열 지속 약 1시간.

이후 잔열 3시간. 현재 소멸.'

해 뜨고 한 시간 후, 한도영은 대장간 문간에 섰다. 중년의 대장장이가 고개를 들었다.

“측량 도구를 빌리러 왔습니다. 삼각기와 줄자, 추.”

대장장이는 구석에서 천으로 덮인 도구들을 꺼냈다. “수평은 겨우 잡힐 거요.”

그때 안쪽에서 젊은 남자가 손에 분필을 쥔 채 일어났다. 바닥에는 흰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대장간 정면에서 모루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평행선과, 손가락 길이만 한 간격으로 반복된 수직 눈금들. 한도영의 시선이 멈췄다.

“당신이 그렸습니까.”

파스칼은 연한 회색 눈을 내리깔며 어깨를 움츠렸다. “망치 놓을 자리를…… 그냥 감으로……”

“눈금 간격이 정확히 일정하군요.” 한도영은 바닥을 다시 훑었다. 세 평행선 사이 간격은 맨눈으로 보기에도 균일했다.

대장장이가 끼어들었다. “파스칼, 이분이 그 측량사다.”

한도영이 물었다. “간격을 어떻게 맞췄습니까.”

“처음 긋고…… 손으로 이만큼 떼서……” 파스칼이 굳은살 박인 손바닥을 펴 보이며 허공에 선 긋는 시늉을 했다. 손끝 궤적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측량 일을 해본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늘부터 하면 됩니다. 내 보조가 필요합니다.”

파스칼의 입술이 벌어졌다. “제가…… 측량을요?”

“저 선을 그린 손이면 충분합니다.”

파스칼의 귀가 붉어졌다. 분필을 주머니에 넣으려다 떨어뜨리고 급히 주웠다. “……가르쳐 주십시오.”

한도영은 대장장이에게서 삼각기와 가죽 줄자를 받고 추는 따로 챙겼다. 두 사람은 대장간을 나서 황무지로 향했다. 삼십 분쯤 능선 기슭에 도착하자 한도영이 첫 측량 지점을 정했다.

파스칼은 삼각기를 조심스레 펴 고정했고, 용접된 다리 쪽이 기울자 한도영이 쐐기 돌을 받쳤다. 추가 매달린 실이 흔들리고, 파스칼은 숨을 죽여 추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흔들림이 멈추자 한도영은 줄자를 뽑아 저 멀리 바위까지 거리를 쟀다. 파스칼은 줄자의 희미한 눈금에 얼굴을 바짝 댔다.

“열네 걸음 반쯤.”

“걸음이 아니라 미터입니다. 지금은 그 정도면 됩니다.”

파스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터……”

두 시간 남짓 측량이 이어졌다. 파스칼은 줄자를 곧게 펴는 역할을 맡았고, 반복할수록 움직임이 빨라졌다. “이쪽으로 한 뼘만 더 오른쪽.” “……이렇게입니까.” “정확합니다.” 파스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바로 그때 규칙적인 군화 소리가 들렸다. 여섯 명 정도. 황무지 저편에서 경장 갑옷 차림의 무리가 다가왔다. 선두는 은발을 짧게 자른 여성, 크세니아 발렌타인이었다.

용병들이 이십 미터 거리에서 멈추고 크세니아 혼자 다가왔다. 회색 눈이 삼각기와 줄자, 추, 수첩을 훑었다.

“측량인가.”

“그렇습니다.”

“에리히 백작이 고용했나.”

“임시 자문입니다.”

크세니아는 삼각기의 용접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런 걸로 뭘 잰단 말이지.”

“지형 경사와 수맥 가능 지점을 추정합니다. 물을 찾는 겁니다.”

크세니아의 시선이 파스칼을 스쳤다. 파스칼은 한 걸음 물러나 줄자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내 이름은 크세니아 발렌타인. 발렌타인의 송곳니를 이끈다.”

“한도영입니다.”

“들었다. 이방인이라지.”

뒤쪽 용병이 작게 중얼거렸다. “소환자잖아.” 크세니아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상관없다. 계약된 자는 내 영역이 아니다.” 그녀가 다시 한도영을 향했다. “다만 이 황무지에는 야생 늑대와 탈영병이 출몰한다.”

“위험은 감수하고 있습니다.”

크세니아의 눈매가 좁아졌다. “계약 파기는 자신 없고?” 한도영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용병 계약은 혈서로 한다.

계약 위반 시 생명력이 소멸하는 고대 저주가 걸려 있다. 사지가 멀쩡해도 숨이 멎지. 예외는 상호 합의 파기뿐.”

한도영의 오른손이 무의식적으로 왼쪽 팔뚝을 움켜쥐었다. 재킷 소매 아래 문신이 있는 자리였다. 어제와 같은 약한 열기가 피부에 감돌았다. 크세니아는 그 손 움직임을 주시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혈서 계약을 많이 체결해보셨겠군요.”

“수백 건.” 크세니아는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계약 조항이 애매하면 위반 여부도 애매해진다. 그래서 나는 한 줄 한 줄 명확하게 쓴다. 빈틈을 남기면 부하가 죽으니까.”

한도영은 수첩을 꺼내 속필했다. '혈서 계약 — 위반 시 생명력 소멸. 예외: 상호 합의 파기. 조항의 모호함이 위반 판정에 영향. 계약은 조항과 별개로 존재한다.' 팔뚝의 열기는 약해지지 않았다.

크세니아가 몸을 돌렸다. “측량에 흥미가 있다. 결과가 나오면 알려라.”

“알려드릴 의무가 있습니까.”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의무는 없다. 하지만 호위가 필요하면 대가를 받고 움직인다.” 용병들에게 손짓하자 일행은 왔던 방향으로 멀어졌다.

파스칼이 숨을 내쉬었다. “……무서운 분이네요.” 그리고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 “아, 죄송……”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말해도 됩니다.”

파스칼은 잠시 입을 열었다 닫더니 처음으로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작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한도영은 수첩을 품에 넣었다. 팔뚝의 열기는 여전했다. 태양이 중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시작합시다. 다음 지점으로 이동.” 파스칼이 삼각기를 양손으로 들었다. 두 사람은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 동안 능선을 따라 여섯 지점의 표고와 경사각을 측정했다. 파스칼은 점심 무렵부터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고, 한도영은 팔뚝의 열기가 사그라들 무렵 측량을 종료했다. 해가 지기 시작해 두 사람은 도구를 챙겨 거주 구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측량을 마치고 거주 구역으로 돌아오는 길, 해가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하루 종일 황무지를 걸은 다리가 묵직했다. 파스칼은 먼저 대장간으로 돌아가 도구를 정리하겠다며 서둘러 사라졌다. 한도영은 천천히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첩에는 오늘 잰 기울기 수치와 암반층 추정 위치가 적혀 있었다.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낡은 천막 옆, 흙먼지 쌓인 공터에 로즈마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아이 셋. 모두 일곱 살쯤 되어 보였다.

갈비뼈가 드러난 앙상한 몸. 로즈마리는 품에서 천으로 싼 빵 한 덩이를 꺼냈다. 크지 않았다. 어른 주먹만 했다.

“이거 먹어.”

그녀는 빵을 세 조각으로 뚝뚝 떼어 아이들 손에 쥐여주었다. 아이들은 말없이 받아들었다. 감사 인사도, 미소도 없었다. 그저 입에 넣고 우물거릴 뿐. 오래 굶주린 아이 특유의 무표정이었다.

로즈마리가 가장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흙투성이였다. 손톱 밑에 약초 즙이 말라붙어 검었다.

“내일은 더 가져올게. 약속.”

목소리는 담담했다. 위로도 동정도 아닌, 그저 사실을 말하는 어조.

한도영은 길가 수레 뒤편에 멈춰 섰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들의 볼을 한 번씩 쓰다듬고 일으켜 세웠다.

“이제 가봐. 해 떨어지면 추워.”

아이들이 흩어졌다. 로즈마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빵 부스러기가 묻은 천을 접었다.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지도 않았다.

한도영이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어젯밤도 그랬군.”

로즈마리의 어깨가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호박색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봤어?”

“우연히.”

“몰래 훔쳐보는 취미라도 있어?”

“그럴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한도영은 몇 걸음 더 다가갔다. 거리는 서너 걸음. 공터의 흙먼지가 바람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을 살리는 데 귀족과 평민의 벽은 무의미하다.”

로즈마리의 굳은 표정이 잠시 흔들렸다. 금방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뭘 알아.”

한도영은 허리춤에서 수첩을 뽑았다.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 기록한 경사 각도와 토양 수분 추정치가 빼곡했다.

“오늘 하루 종일 황무지를 걸었어. 지형 경사가 동쪽으로 2도쯤 기울어져 있고, 서쪽보다 동쪽 토양 함수율이 눈에 띄게 높더군.”

로즈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빛의 날카로움이 조금 무뎌졌다. 한도영은 수첩을 접어 품에 넣었다.

“난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여기 필요한 걸 찾아내는 거.”

“……필요한 거.”

“물을 찾는 건 내 지식이 통하는지 시험하는 일이기도 해. 하지만 그 물을 마실 사람들 얼굴을 봤다.”

로즈마리가 천천히 일어섰다. 접은 천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드러났다.

“당신은 이방인인데 왜 이러는 거죠.”

질문은 조용했다. 경계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어젯밤 자네가 아이들 먹이던 모습을 봤다. 오늘도 봤다.”

한도영은 로즈마리의 손을 보았다. 갈라진 손끝. 약초 얼룩. 그 손이 아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로 하는 동정은 흔해. 직접 빵을 떼어주는 사람은 다르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로즈마리는 잠시 침묵했다.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마침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대부분은 아니야. 영주님조차.”

“에리히 백작은 현실적인 사람이야. 빵을 나눠주는 것만으로 영지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맞아. 그래서 나 혼자 하는 거야.”

그녀가 접은 천을 허리춤에 꽂았다. 남은 빵 부스러기가 흙바닥에 흩어졌다.

“아까 말. 네 지식이 통하는지 시험하는 일이라고 했지.”

“그래.”

“시험에 실패하면.”

한도영은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땐 다른 방법을 찾는다. 지식은 도구니까.”

로즈마리의 시선이 그의 팔뚝 쪽으로 향했다. 소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문신 자리였다. 한도영은 알았다. 그녀가 알아챈 건 피부의 희미한 발열 자국일 거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로즈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아주 작게.

“네 지식이 먹히길 빌게.”

“빌지 않아도 돼. 확인하면 되니까.”

로즈마리가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엔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정도였다.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도 여기 올 건가.”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이들에게 약속했으니까.”

발걸음이 멀어졌다. 어스름이 공터를 채웠다. 천막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한도영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로즈마리의 뒷모습이 거리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첩을 다시 꺼냈다. 오늘 측량 데이터 밑에 숯연필로 짧게 덧붙였다.

‘사람을 살리는 지식.’

수첩을 덮어 품에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객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린 거주 구역. 등불 하나가 천막 앞에 홀로 흔들렸다.

로즈마리는 천막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린 채. 아까 그 이방인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사람을 살리는 데 귀족과 평민의 벽은 무의미하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사람을 살리는 데 벽은 무의미하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갈라지고 굳은살 박인 손. 약초 얼룩과 흙먼지.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빵을 찢고, 이마를 짚고, 약초를 적시는 것뿐.

그런데도.

로즈마리는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 눈빛이 단단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오른손 검지 끝에 희미한 빛이 스쳤다. 푸른빛. 촛농이 식는 순간처럼 금방 사라졌다.

로즈마리는 눈을 깜빡였다. 손을 뒤집어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어둠뿐. 손끝은 여전히 차갑고 거칠었다.

“……무슨.”

그녀는 손을 쥐었다 폈다. 다시는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끝의 미세한 저림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로즈마리가 가장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흙투성이였다. 손톱 밑에 약초 즙이 말라붙어 검었다.

“내일은 더 가져올게. 약속.”

목소리는 담담했다. 위로도 동정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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