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4화

새벽 안개가 황무지를 덮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옅은 회색. 한도영은 허리에 찬 물통을 한 번 두드렸다. 반쯤 찼다. 파스칼이 어깨에 측량대와 줄자를 걸친 채 뒤따랐다.

“저기까지가 어제 측량한 끝 지점입니다.”

한도영이 오른쪽 언덕을 가리켰다. 파스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꾸는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였다. 긴장한 모양이었다.

“잠을 못 잤나.”

“아, 아닙니다. 잤습니다. 조금…….”

파스칼의 귀가 붉어졌다. 한도영은 더 묻지 않았다. 어제 그 빛을 봤을 리 없었다. 로즈마리와 달리 그는 천막 안에서 손을 펴 보인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파스칼의 시선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측량 지점에 도착했다. 한도영이 무릎을 굽혀 땅을 짚었다. 흙이 바짝 말랐다. 손바닥으로 쓸자 먼지가 일었다.

“삼각기.”

파스칼이 삼각기를 건넸다. 한도영은 수평을 맞추고 북쪽 바위를 기준점으로 잡았다.

“거기까지 거리. 줄자로 재.”

파스칼이 바위 쪽으로 달려갔다. 운동화도 없는 맨발이었다. 발바닥이 마른 땅을 박차는 소리가 작게 났다.

줄자를 길게 풀며 무릎을 굽혔다. 그는 줄자를 팽팽하게 당겼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도영이 눈금을 읽었다.

“12미터 40.”

파스칼이 줄자를 감으며 중얼거렸다. “12하고 40…….” 마음속으로 되뇌는 눈치였다.

같은 방식으로 남쪽과 동쪽을 재고, 각도를 기록했다.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한도영은 수첩에 수치를 옮겼다.

대략적인 경사가 잡혔다. 지하수가 흐르려면 경사가 완만한 분지 쪽일 거다. 그걸 찾는 중이었다.

세 번째 측량 지점으로 이동할 무렵이었다.

파스칼이 걸음을 멈췄다.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여기…… 흙 색이 달라요.”

한도영이 다가갔다. 발 주변의 흙이 반경 1미터쯤 짙은 갈색이었다. 주변은 회색 모래뿐이었다. 손가락으로 찔러보았다. 흙이 손톱 밑에 들러붙을 정도로 촉촉했다.

“습도 차이다.”

파스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저 바위 밑까지…… 이어져 있어요. 색이.”

보이지 않았다. 한도영의 눈에는 똑같은 회색 땅이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확신했다.

“어떻게 알아.”

“어, 그게…… 흙 알갱이 크기가……”

파스칼이 머뭇거리며 설명했다. 습한 흙은 알갱이가 더 동글고, 바람에 날리는 잔모래가 덜 섞인다는 거였다. 한도영은 잠시 그를 보았다. 이건 학습이 아니었다. 타고난 감각이었다.

“따라가자.”

파스칼이 앞장섰다.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20미터쯤 갔을까.

바위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지점에서 멈췄다. 그 주변에만 잡초가 몇 포기 돋아 있었다. 황무지 전체에서 유일한 푸른 기운이었다.

한도영은 바위 옆에 쪼그려 앉았다. 손바닥으로 땅을 덮었다. 미세하게 차가웠다. 지하의 온도였다.

“여기다.”

파스칼이 눈을 크게 떴다.

“물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가능성이 높다. 경사와 토양 조건이 일치해.”

파스칼은 대답 없이 바위 근처에 쪼그려 앉았다. 숯검댕이 같은 손가락으로 습한 흙을 한 줌 쥐었다. 코에 가져갔다. 냄새를 맡고 있었다. 한도영은 수첩에 최종 좌표를 기록했다.

“마을에 가서 사람을 불러와. 장정 세 명이면 충분해.”

파스칼은 흙을 도로 내려놓고 일어났다. 손에 묻은 진흙을 바지에 닦으며 뛰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오르고, 그림자가 짧아질 무렵.

파스칼이 세 명의 장정을 데리고 돌아왔다. 곡괭이와 삽을 든 중년 남자들. 한 명은 파스칼을 보며 낮게 웃었다.

“꼬마가 또 헛짓거리 하는 거 아니냐.”

파스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도영을 바라보았다. 시선에 기대가 섞여 있었다. 한도영은 땅에 표시한 세 개의 X자 중 첫 번째를 가리켰다.

“여기부터 수직으로 파 내려간다. 반경은 1미터.”

장정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곡괭이를 들었다. 첫 번째 삽날이 흙을 찍었다. 마른 표토가 부서졌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삽날쯤 흙이 무거워졌다.

“축축한데.”

한 장정이 허리를 굽혔다. 손으로 흙을 파헤쳤다. 스무 번쯤 더 파 내려갔다. 땅이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삽날이 깊어질수록 흙탕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다음 순간.

땅속에서 희뿌연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가늘게, 하지만 분명하게. 물은 검은 흙을 따라 흘러내리며 웅덩이를 만들었다.

“물이다!”

곡괭이를 든 장정이 소리쳤다. 다른 둘이 달려왔다. 손으로 물을 퍼서 얼굴에 끼얹었다. 누군가 웃기 시작했다. 웃음은 금세 셋으로 번졌다.

“물 나왔다! 이방인이 물 찾았다!”

한 장정이 마을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며 연거푸 소리쳤다. 파스칼은 웅덩이 옆에 우두커니 섰다. 손을 씻지도 않고 물 표면만 바라봤다.

“제가…… 찾은 겁니까.”

한도영은 그의 어깨를 한 번 쳤다.

“네가 흙 색을 봤다.”

파스칼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들숨이 새어 나왔다. 어깨가 떨렸다.

소문은 빨랐다. 영민 구역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먼저 온 자들이 증인이 되었다. 늦게 온 자들이 증인에게 캐물었다.

“진짜 물이야.”

“저기, 웅덩이 보여.”

“이방인이 찾았대.”

“꼬마도 같이 찾았대.”

물이 솟은 자리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에 로즈마리가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소리 없이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웅덩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넣었다. 물을 한 움큼 떠서 입에 댔다. 잠시 머금고, 삼켰다.

“석회 냄새가 약간 나긴 하지만.”

일어서며 옷자락에 손을 닦았다. 그녀가 한도영 쪽으로 걸어왔다. 주변의 영민들이 길을 터줬다.

“어떻게 알았어.”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호했다. 한도영은 수첩을 품에 넣었다.

“지형이 말해준다. 경사, 토양, 식생. 물은 지형을 따라 흐르니까.”

“그게 다야.”

“측량의 기본이다.”

로즈마리는 잠시 그를 응시했다. 밤과 낮이 바뀐 듯한 시선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경계와 무시뿐이었는데, 지금은 날것의 호기심이었다.

“파스칼도.”

한도영이 덧붙였다.

“네.”

“파스칼이 흙 색 변화를 감지했다. 그가 없었으면 이 지점은 놓쳤다.”

로즈마리는 파스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스칼은 여전히 웅덩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한참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도영을 향했다.

“그 지식으로 다른 마을도 도울 수 있어.”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측량은 지식이 닿는 곳까지 가능하다.”

로즈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 처음 보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웃음이었다. 말은 없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빨랐다. 어깨가 평소보다 올라가 있었다. 해야 할 말이 생긴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향하는 곳은 영민 거주 구역 내 간호소였다.

파스칼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 어깨에 걸친 측량대와 줄자를 다시 추슬렀다. 그리고 로즈마리와 반대 방향, 영민 거주 구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한도영은 영주성 내 임시 거처로 돌아왔다. 좁은 방이었다. 침상 하나, 탁자 하나. 촛불 하나. 창문 너머로 성벽의 윤곽만이 어둠 속에 떠 있었다.

탁자 위에 수첩을 펼쳤다. 측량 데이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삼각 측점의 각도.

거리. 고도 차이. 물이 솟은 지점의 토양 특성.

모든 것을 순서대로 기록했다. 숯연필이 종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페이지를 넘겼다. 새 페이지 왼쪽에 오늘 날짜를 표기했다.

‘수원 발견. 측량 데이터와 파스칼의 공간 감각 조합 결과. 지식의 검증 완료.’

숯연필을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왼쪽 팔뚝에서 뜨거운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듯한 감각이 번쩍였다. 한도영은 숨을 들이켰다. 통증이었다. 날카롭고 국소적이었다. 그는 재빨리 소매를 걷어 올렸다.

계약서 문신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피부 위로 문양이 솟아오른 듯했다. 한도영은 손가락으로 문신을 짚었다. 체온보다 뜨거웠다. 만지자 피하 깊은 곳에서 두 번째 통증이 울렸다.

길었다. 열 번 심장 박동 동안 지속되었다. 그다음 갑자기, 칼로 자른 듯 멈췄다.

한도영은 천천히 손을 떼었다. 문양 주변 피부가 미세하게 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통증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열감이 남았다.

수첩을 다시 집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겨 새 페이지를 폈다. 숯연필을 쥐고 문신의 일부를 스케치했다. 곡선 하나, 사선 둘, 교차점의 작은 원.

‘통증 1회차. 지속 약 10초. 패턴 변화 관찰 시작.’

문자 옆에 작게 도식화된 도형을 그렸다. 문신의 부분 확대도였다. 정밀하지는 않았지만 기하학적 패턴은 분명했다. 불규칙한 장식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구조를 가진 상징 체계였다.

숯연필을 내려놓고 셔츠 소매를 내렸다. 천천히. 통증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있었지만 오지 않았다.

한도영은 수첩을 덮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 왼쪽 팔뚝에서 다시 한 번 통증이 예리하게 솟구쳤다. 아까보다 짧고 강력했다. 칼끝으로 한 번 긋는 듯한 강도.

촛불을 잡아당겨 팔뚝을 비췄다.

문양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였다. 잠시 후 열기가 가라앉았다. 한도영은 숨을 내쉬며 팔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문양의 끝부분이 수 시간 전보다 미세하게 연장되어 있었다. 2미리미터쯤. 새로 생긴 선분이 원래 곡선의 끝에서 팔꿈치 방향으로 짧게 뻗어 있었다. 주변 피부에 옅은 분홍빛 발진이 퍼졌다.

한도영은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이 굳어졌다. 확장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신은 자라고 있었다. 목숨, 기억, 종속. 그 셋 중 하나로 수렴해가는 과정이 지금 이 선분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한도영은 수첩을 다시 폈다.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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