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5화

아침 햇살이 회의실 긴 탁자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수맥 발견 이틀째. 한도영은 왼쪽 소매를 한 번 더 끌어내렸다. 붉은 발진이 천에 스치자 미세한 따끔거림이 일었다. 회의실 문 앞에서 에리히 백작의 전령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작님께서 원로회를 소집하셨습니다. 자문 임명 건입니다.”

한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첩을 품 안에 밀어 넣었다. 전령이 무거운 참나무 문을 열자, 방 안의 공기가 먼저 밀려 나왔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노인 특유의 약초 향이 섞여 있었다.

탁자에는 원로 일곱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했다. 그중 한 명이 한도영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광대뼈가 도드라진 마른 얼굴의 노인이었다. 헤르만.

에리히 백작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제복은 여전히 낡았지만 오늘은 가슴의 독수리 문장 브로치가 반짝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착석하게.”

한도영은 벽 쪽에 놓인 의자로 걸어갔다. 헤르만은 그 움직임을 시선으로 따라붙었다.

“본 건은 간단하오.” 에리히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이방인 한도영을 변경백령 내정 자문으로 정식 임명한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헤르만이 곧바로 탁자를 짚었다. 관절이 굵은 손가락이 나무판을 긁었다.

“이방인에게 영지의 살림을 맡길 수 없소. 귀족도 기사도 아닌 자에게.”

양옆의 원로 두 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은 팔짱을 끼거나 탁자만 내려다봤다.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에리히가 헤르만을 똑바로 보았다.

“그 이방인이 영지에서 3년 만에 처음으로 새 수원을 찾아냈네.”

“한 번의 성공일 뿐입니다.” 헤르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지하에 뭍힌 물줄기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미리 알고 있었을 수도 있소.”

“터무니없는 소리.”

“검증되지 않은 자에게 곡창과 관개, 보급 경로를 맡기자는 말씀이십니까. 영지의 경작지와 물길이 적혀 있는 문서를 이방인 손에 쥐여 주자는 겁니까.”

원로 하나가 입을 열었다. “헤르만의 말이 과하지만, 신중함은 필요합니다. 이곳은 지난 3년간 외부인을 자문으로 둔 적이 없습니다.”

한도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왼쪽 팔뚝에 은은한 열감이 느껴졌다. 통증이라기보다 자각이었다. 문신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정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끄는 소리에 헤르만의 말이 멈췄다.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한도영은 품에서 수첩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페이지마다 빼곡한 도형과 숫자,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잉크가 아니라 숯연필의 거친 선이었지만, 기울기 각도와 거리 비율은 정확했다.

“황무지 측량 기록입니다. 지형 경사, 토양 수분, 식생 분포를 수치화했습니다.”

손가락으로 한 페이지를 짚었다.

“여기가 수맥 발견 지점입니다. 주변보다 습도가 15퍼센트 높았고, 표토 30센티 아래 암반층에 균열이 있었습니다. 지형상 이 균열은 북동쪽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지하수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헤르만이 탁자 건너편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눈이 수첩을 훑었다.

“읽을 수 없군요.”

“측량을 모르는 분이 읽을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원로 중 한 명이 작게 기침했다. 다른 이의 눈빛이 수첩과 헤르만 사이를 오갔다.

한도영은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기존 관개 수로의 문제도 기록했습니다. 수로 바닥이 지형보다 평균 40센티미터 높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수로가 거꾸로 설계되어 있으니 물을 퍼 올려야 하는 겁니다.”

에리히의 눈썹이 올라갔다.

“수치가 정확하군.”

“측량의 기본입니다.”

헤르만이 탁자를 쳤다. 소리가 컸다.

“그게 무슨 근거가 된다는 겁니까. 수첩 하나로 영지의 내정을 맡긴다는 건 전례가 없소!”

“전례가 없는 건 이 가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도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도가 붙어 있었다.

“3년간 농업 생산량 40퍼센트 감소. 인구 2만 중 3천이 아사 직전. 이 수치는 전례가 없지 않습니까. 전례만 따지다간 한 달 안에 3천이 죽습니다.”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움직였다.

원로 하나가 에리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작님께서는 이 청년의 지식이 영지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보십니까.”

에리히가 답하려던 순간, 회의실 문이 열렸다.

문고리가 아니라 어깨로 밀어젖힌 듯한 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로즈마리였다.

그녀는 평소의 리넨 블라우스가 아니라 더 낡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소매 끝에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한 손에 물병을 쥐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백작님.”

숨이 약간 가빴다. 계단을 뛰어올라온 게 분명했다.

“듣고 있었습니다. 문 밖에서.”

헤르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는 원로회다. 민중 대표가 낄 자리가 아니야.”

“영민이 죽고 있는데 무슨 원로회입니까.”

로즈마리가 물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유리병이 무거운 소리를 냈다.

“이 물입니다. 그가 찾은 우물에서 길어온 물이에요.”

그녀가 한도영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고, 바로 떨어졌다.

“제가 간호하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4일 전만 해도 물을 못 구해 탈수 증세가 심했어요. 이 물을 먹이고 나았습니다.”

로즈마리가 원로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췄다.

“지식으로 생명을 구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신뢰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회의장이 술렁였다. 노인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로즈마리.” 에리히의 목소리에 약간의 당혹이 섞여 있었다. “네가 이런 자리에...”

“압니다. 제 자리가 아닌 거.” 그녀가 말을 잘랐다. 하지만 존댓말이었다. “그래도 말해야 했어요. 지금 영지에는 신중함이 아니라 물이 필요합니다.”

한도영은 그녀의 손을 보았다. 물병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문 밖에서 얼마나 오래 듣고 있었는지,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손톱 자국이 손바닥에 선명했다.

헤르만의 입가가 비틀렸다.

“로즈마리 양. 그대의 열의는 알겠소만...”

일부러 말을 끊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헤르만의 눈에 잠시 잔혹한 빛이 스쳤다.

“당신 어머니도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마을 하나를 불태우지 않았소.”

공기가 얼어붙었다.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원로 하나가 탁자 아래로 손을 내렸다.

로즈마리의 얼굴이 굳었다.

입술이 열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온기가 그 얼굴에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물병을 내려놓은 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떨리던 그 손이 허벅지 옆에서 멈췄다. 손가락이 천천히 구부러졌다.

주먹을 쥐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힘이 빠진 손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반응한 건 에리히였다.

“헤르만.”

백작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사 시절의 거친 발성이 번지듯 깔렸다.

“그 입 조심해.”

헤르만이 어깨를 으쓱이며 상체를 뒤로 뺐다. 그러나 입을 닫지는 않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마법의 피는 대대로...”

“닥쳐.”

에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더는 말하지 마.”

헤르만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이 실룩거렸지만, 영주를 향해 직접 반박하지는 못했다. 대신 한도영을 노려보았다.

로즈마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꾸도, 변명도, 부정도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한도영은 그 옆모습을 보았다. 주근깨 아래로 창백해진 피부가 보였다. 손가락만 여전히 구부러진 채였다. 자신을 변호하러 들어온 여자가 침묵으로 무너지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돌아서서 회의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에리히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그가 원로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더 논의할 사항은 없소. 본 건은 원로회의 조언을 들었으나, 최종 결정권은 영주인 나에게 있소.”

원고 한 명이 입을 열려다 에리히의 시선에 닫았다.

“한도영을 변경백령 내정 자문으로 임명한다. 이 결정은 오늘부로 공식 효력을 발휘한다.”

손바닥으로 탁자를 짚었다.

“회의는 끝이오.”

의자들이 바닥을 긁으며 원로들이 일어났다. 헤르만이 가장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문을 지나칠 때 한도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빛에는 악의가 아니라 계산이 담겨 있었다. 이 결정을 어디에 알릴지, 이 패배를 어떻게 뒤집을지 저울질하는 표정이었다.

문이 닫혔다.

에리히는 잠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피로가 얼굴에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생했네, 자문.”

“백작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네가 숫자를 가져왔다. 원로들은 숫자로는 움직이지 않아. 하지만 숫자는 나를 움직였다.”

한도영은 수첩을 접어 품에 넣었다. 왼쪽 팔뚝의 열감이 한 번 더 맥박처럼 뛰었다. 그는 소매를 슬쩍 만졌다. 천 사이로 미세한 온기가 번졌다.

회의실을 나서자 복도는 비어 있었다. 그는 로즈마리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복도 끝 창문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먼지 알갱이들만 그 빛 속에서 천천히 돌았다.

한도영은 빠르게 걸었다. 복도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성 입구 홀에서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로즈마리.”

그녀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깨가 살짝 굳었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도영은 그녀의 앞을 가로막지 않고 나란히 걸었다. 3보쯤 같이 걷다가 입을 열었다.

“증언.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로즈마리의 걸음이 느려졌다.

“내가 신뢰한 건 당신의 지식이야.”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거리가 느껴졌다.

“당신이 아니야.”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옆얼굴이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걸 확실히 해두고 싶었어.”

한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허벅지 옆에서 붙어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로즈마리가 돌아서서 영민 구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도영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보았다.

숙소로 돌아오자 방 안은 어두웠다. 아침에 켰던 촛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녹은 밀랍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창문 틈으로 점심 무렵의 빛이 한 줄기 들어와 바닥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았다.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리자 붉은 발진이 그대로였다. 색이 조금 더 짙어져 있었다. 연분홍에서 분명한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숯연필을 집었다. 수첩을 펼치고 새 페이지에 문신의 일부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른 부위였다. 어젯밤 확장된 2밀리미터의 선분뿐 아니라 그 위쪽, 원래 문양의 중심부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 패턴도 스케치했다.

곡선 두 개가 만나는 지점. 거기서부터 바깥으로 뻗은 직선이 3밀리미터 정도 더 나가 있었다. 어젯밤에는 분명히 없던 선이었다.

'2차 확장. 길이 약 3밀리미터. 기존 분기점에서 외부 방향.'

숯연필이 종이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도형 하나, 선 여섯 개, 교차점의 작은 표시. 문양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증거가 한 페이지 더 쌓였다. 불규칙한 곡선처럼 보였지만, 미세한 지점들을 연결하면 반복되는 기하학적 구조가 드러났다. 3밀리미터 간격으로 등간격 점이 찍히고, 그 점들을 잇는 선의 각도가 거의 일정했다.

문신은 쓰여지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그의 팔 위에서, 어떤 규칙에 따라.

한도영은 숯연필을 내려놓고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문양의 붉은기가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통증은 지금 이 순간에는 없었다. 하지만 열감은 남아 있었다.

바로 그때, 창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다. 이내 두세 마리가 합쳐졌다. 급박한 리듬이었다. 말이 뛰고 있었다. 돌바닥에 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성문 앞에서 말이 멈추는 소리. 안장이 삐걱거렸다. 누군가 땅에 내려섰다. 중무장한 부츠 소리였다.

전령의 목소리가 성벽을 타고 올라왔다.

“외부에서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크로이츠 변경백의 사절이라 밝혔습니다!”

숙소의 창문 너머로, 성벽 아래 먼지구름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변경백의 계산서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