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10화
아침 햇살이 창틀 사이로 비스듬히 밀려들었다. 에리히 백작의 집무실 탁자 위에는 반쯤 마른 잉크병과 지난밤 작성한 이동 제한 명령 초안이 놓여 있었다.
한도영이 문을 두드렸다. 옆에는 파스칼이 서 있었다. 눈가는 여전히 붉었지만, 표정은 지난밤보다 정리되어 있었다.
“들어오게.”
에리히의 목소리는 이미 깨어 있었다. 한도영이 문을 열자 백작은 탁자 앞에 앉아 차가운 차를 들고 있었다. 푸른 눈이 두 사람을 훑었다.
“토벤 마을 상황을 다시 정리했습니다.”
한도영이 탁자 앞으로 걸어가며 수첩을 꺼냈다. 파스칼은 문 옆에 서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증상은 사흘 주기로 악화됩니다. 첫날 고열, 둘째 날 붉은 반점이 팔 안쪽에서 가슴으로 번집니다. 림프절이 붓고, 셋째 날 사망합니다.”
에리히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가 나무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계절성과 잠복기 패턴이 자연적 역병과 맞지 않습니다. 전파 경로도 불분명하고, 발병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릅니다.”
“독살 가능성인가.”
“확실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개울물을 통한 확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토벤 마을과 변경백령은 수로로 이어져 있습니다.”
에리히가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낮은 마찰음을 냈다. 창가로 두 걸음 걸어가더니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명령은 내렸다. 동부 농경지 개울물 사용 금지. 감시 초소 설치. 전 마을 발열 감시.”
잠시 멈췄다가 돌아섰다.
“로즈마리를 소집해야겠군.”
한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스칼이 작게 입을 열었다. “저는…… 뭘 하면 좋을까요.”
에리히가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잠시 파스칼의 붉은 눈가에 머물렀다.
“네가 가져온 소식 덕분에 대비할 수 있었다. 지금은 우선 네 건강을 챙겨라.”
파스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에리히가 탁자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서랍에서 새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헤르만에게 답을 줘야 할 시간이다.”
한도영의 시선이 양피지로 향했다.
“오늘 오전 중으로 거절 서한을 낭독하겠네. 원로회와 사신 앞에서 공식적으로.”
잉크병에 펜을 찍으며 에리히가 덧붙였다.
“자네도 배석하게.”
한도영이 숨을 가볍게 들이켰다. 왼팔의 문신 부위가 옷감 아래에서 미열을 띠고 있었다. 그는 팔을 움직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한 시간 뒤, 알현실.
높은 창으로 오전 햇살이 쏟아져 내려 돌바닥을 가로질렀다. 양옆에는 원로 넷이 자리 잡았고, 중앙에는 헤르만이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서 있었다.
문이 열리고 에리히 아렌트 백작이 들어왔다.
검은 제복에 독수리 브로치. 장화 굽이 돌바닥을 한 번, 한 번씩 짚었다. 뒤로 한도영과 로즈마리가 따랐다. 로즈마리는 집무실에서 이미 상황을 전해들은 상태였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헤르만의 눈이 한도영에게로 움직였다. 짧은 정적. 헤르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게 한 걸 보니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군요.”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현실 중앙의 긴 탁자 앞에 서서 손에 든 양피지를 폈다.
“변경백령 영주, 에리히 아렌트 백작의 이름으로 통지한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크로이츠 변경백의 사신 헤르만이 제출한 신병 인도 요구는 거절한다.”
원로 중 하나가 몸을 움직였다. 마르틴이었다. 입을 열려다 에리히의 다음 말에 멈췄다.
“한도영은 이 영지의 자산이다. 아렌트 가문의 명예를 걸고 보호한다.”
알현실 안이 조용해졌다. 창밖으로 새 한 로즈마리가 날아가는 소리만 났다.
한도영은 자신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느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왼팔 문신의 열기는 여전했지만 통증은 아니었다. 그 열기를 의식하며 숨을 내쉬었다.
헤르만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입가의 근육이 굳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영주님.” 헤르만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재정 위기를 겪고 있는 영지가 이런 선택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은화 가치는 이미 폭락했습니다. 상환 기한은 나흘. 그리고 지금은 역병까지——”
“역병은 이 영지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요.”
에리히의 말투가 한 순간 굵어졌다. 기사 시절의 습관이 스민 어조. 그는 곧바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변경백령의 내정과 영민 보호는 외부 사신이 관여할 사안이 아니오.”
마르틴 원로가 반 발짝 앞으로 나왔다. “영주님, 그래도——”
“결정은 끝났습니다.”
에리히가 원로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마르틴의 입이 닫혔다. 다른 원로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지만 누구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헤르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말 속에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 결정은 공식 기록으로 남을 겁니다.”
“기록하게.”
헤르만이 뒤돌았다. 장화 굽이 돌바닥을 날카롭게 쳤다. 두 기사가 따라 움직였다.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마지막으로 말했다.
“크로이츠 변경백께 이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유감입니다.”
문이 열렸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가 이내 닫혔다. 기사들의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정적.
에리히가 양피지를 접어 로즈마리에게 건넸다.
“영주 기록으로 보관하게.”
“알겠습니다.”
로즈마리가 양피지를 받아 품에 안았다. 그녀의 손이 잠시 양피지 가장자리를 꼭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마르틴이 탁자 옆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항의의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다른 원로들이 먼저 알현실을 나갔고, 마르틴도 잠시 뒤 발걸음을 돌렸다.
알현실에 에리히와 한도영, 로즈마리만 남았다.
에리히가 긴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탁자 위에 짚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도영은 몸을 돌려 백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앞으로 나흘 안에 은화 이천 닢을 마련해야 합니다.”
에리히가 피로에 젖은 눈으로 답했다.
“알고 있네.”
“환율 차익 계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의 은화 가치 하락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증명할 수 있나.”
한도영은 수첩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익숙한 가죽 감촉이 닿았다.
“수치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로즈마리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방역 준비는 내가 맡을게. 마을별로 발열 감시 체계를 정비해야 해.”
에리히가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친 얼굴 위로 잠시 안도가 스쳤다.
한도영은 자신의 왼팔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소매 아래에서 문신이 여전히 미열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열기는 어제의 칼날 같은 통증과는 달랐다. 계약은 진행되고 있지만, 서 있을 곳은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했다.
그는 수첩을 품에 넣고 알현실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야 할 계산이 산더미였다.
복도는 한산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인원들이 제각기 흩어진 뒤였다. 한도영은 왼팔을 약간 접은 채 걸었다. 문신 부위의 열기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발소리가 뒤에서 따라붙었다. 가볍고 빠른 걸음.
“잠깐.”
로즈마리의 목소리였다. 한도영이 돌아서자 그녀가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 손에는 약초 목록으로 보이는 종이 뭉치가 쥐여 있었다. 약제실로 가던 중이 분명했다.
“영주님의 그 말씀, 백작령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어.”
로즈마리의 호박색 눈이 복도 벽 촛불을 받아 흔들렸다.
“크로이츠 변경백이 그냥 넘어갈 리 없지.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로즈마리가 종이 뭉치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약초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계속 싸워줘. 영민들을 위해서.”
그녀의 눈빛에 더는 시험하거나 가늠하는 빛이 없었다. 거리낌 없는 직선의 시선. 한도영은 처음 보는 종류의 신뢰를 그 안에서 읽었다.
그는 팔을 내렸다. 문신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무시했다.
“싸울 거다.”
짧았다. 로즈마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었다. 볼에 흩어진 주근깨가 촛불 아래서 움직였다.
“고마워.”
금지된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투 규칙에도 없는 단어. 로즈마리는 돌아서서 복도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도영은 그녀의 등 너머로 약제실 쪽 복도가 어둑하게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촛불 아래서 한 번 흔들리고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복도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허리춤 수첩을 손끝으로 눌렀다. 여기서는 내가 물러설 자리가 아니다. 지식을 증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지킬 사람이 생겼다는 자각이 한순간에 스며들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숙소로 향했다.
숙소 안은 촛불 하나만 켜둔 채 어두웠다. 책상 위에는 파스칼 고향 쪽지 사본과 역병 증상 분석 초안이 펼쳐져 있었다. 수첩도 옆에 놓여 있었다. 한도영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셔츠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렸다.
문신의 붉은 선들이 손목에서 팔 안쪽으로 뻗어 있었다. 아까 복도에서보다는 열기가 다소 가라앉은 듯했다. 그는 왼손으로 수첩을 집어 들었다. 앞 페이지에는 이전까지의 확장 패턴이 연필로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 상태를 대조하려던 순간.
문신 전체가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빛을 발했다.
한도영은 팔을 움켜쥐었다. 숨이 짧게 끊어졌다. 통증은 옷에 불이 붙은 듯한 열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손가락 사이로 문양이 선명하게 빛났다. 붉은색도 아니고 푸른색도 아닌, 그 경계 어디쯤의 섬광.
빛이 사라지기 전에 그는 보았다. 문양의 가장자리가 손목을 지나 팔꿈치를 넘어가고 있었다. 가느다란 선들이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며 위팔까지 번지는 중이었다. 피부 아래로 붉은 선이 육안으로 퍼지는 속도가 전에 없이 빨랐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소리를 냈다. 한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 한쪽 벽에 걸린 작은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다소 휘청였다. 촛불이 거울 속에서 그의 모습을 비췄다.
소매를 완전히 걷어 올렸다.
문신이 팔꿈치를 넘어 위팔 중간까지 도달해 있었다. 붉은 발적이 문양 주변을 따라 번져 있었다.
손끝으로 만지자 열기가 느껴졌다. 통증은 정점을 지나 둔중한 욱신거림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책상으로 돌아갔다. 수첩을 집어 들었다.
급하게 연필을 쥐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새로운 선분들을 스케치했다. 원형 노드에서 갈라진 가지 패턴.
60도 교차각의 격자는 유지되고 있었지만 노드의 수가 늘었다. 가지들이 중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단일 격자였던 구조가 이제는 두 겹, 세 겹으로 포개지고 있었다.
확장 속도를 옆에 적었다. 1cm 미만 수준에서 단번에 팔꿈치를 넘어 위팔까지. 기하급수적 증가다.
그는 연필을 멈추고 거울을 다시 바라보았다. 문신의 새로 번진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따라가며 수첩의 스케치와 대조했다. 적어도 두 가지 패턴이 시차를 두고 덧입혀진 구조. 마치 측량 기호를 여러 번 겹쳐 인쇄한 듯했다.
순간 손가락 끝에 비정상적인 냉기가 스며들었다.
한도영은 손을 떼었다. 문신 부위의 피부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열을 품었던 자리에서 이제는 서늘한 감각이 손가락으로 전해졌다. 검지를 펼쳐 촛불 아래서 확인하자, 손가락 끝에 미세한 서리 막이 생겨 있었다.
그는 수첩을 내려놓지 못했다. 숙소 안은 고요했다. 촛불만이 조용히 흔들렸다.
손끝의 서리가 천천히 녹아 물방울로 맺히는 동안, 한도영은 문신의 마지막 패턴과 손가락을 번갈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 패턴은 단순한 각인이 아니었다. 측량 기호를 중첩해 어떤 지점을 공간에 고정시키는 좌표. 그 사실이 수첩의 스케치와 거울 속 문신 사이에서 추론으로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