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13화
촛불이 한 번 깜빡이고 다시 타올랐다. 한도영은 수첩을 펼친 채 지도 조각과 문신 패턴을 번갈아 살폈다.
오염된 식수원 지도에 발병 지점 세 곳이 표시돼 있었다. 토벤 마을 공동 우물. 영민 거주 구역 동쪽 우물. 오늘 새벽 파스칼이 보고한 세 번째 지점. 한도영은 이 세 점을 숯으로 이었다.
정삼각형.
숯연필을 멈추고 수첩의 문신 패턴 쪽을 넘겼다. 사흘 밤에 걸쳐 기록한 교차점들. 가장 굵은 중심선에서 60도로 갈라지는 미세 곡선. 손목에서 시작해 팔꿈치를 넘어 위팔까지 번진 격자 구조.
두 그림을 나란히 펼치자, 촛불 아래서 검은 숯 선들이 겹쳐졌다.
오른손 검지로 지도의 발병 지점을 짚었다. 다음엔 문신 패턴에서 똑같은 위치의 교차점을 눌렀다. 각도가 같았다. 삼각측량의 기본 원리. 하나의 원점에서 세 지점을 관측해 좌표를 고정하는 방식.
왼팔 문신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소매 너머로 붉은 빛이 천을 물들였다.
새 페이지를 펼쳤다. 첫째 줄에 적었다. 계약은 편입 메커니즘, 문신은 공간 좌표. 다음 줄에 세 가지 패턴을 나열했다.
1. 발병 지점과 문신 교차점은 동일한 삼각측량 격자. 2. 문신의 중심선은 세계 좌표의 원점 역할을 수행. 3. 좌표계의 반대 방향은 편입이 아닌 이탈의 벡터를 의미한다.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문신 부위의 붉은 발광이 옷감 위로 희미하게 번졌다가 가라앉더니 사라졌다. 한도영은 수첩을 덮고 일어섰다.
복도로 나왔다. 왼팔 통증 때문에 첫걸음이 살짝 기울었다. 오른손으로 벽을 짚어 걸음을 바로잡았다. 그대로 영민 거주 구역 쪽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동쪽 하늘엔 아직 빛이 없었다. 닭 우는 소리가 두어 번 들렸다.
간호소 앞에 로즈마리가 서 있었다. 어깨에 약초 바구니를 멘 채 막 나오던 참이었다. 밤새 간호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또렷했다.
한도영이 수첩을 내밀었다. 방금 적은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세 가지 패턴을 확인했다.”
로즈마리가 수첩을 받아 들었다. 숯 글씨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세 번째 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계약을 푸는 게 아니고.”
“이 세계의 규칙 자체를 해석해야 한다.”
한도영은 수첩을 도로 받으며 덧붙였다. “편입 장치인 이상, 같은 좌표계 안에 이탈 방향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로즈마리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호박색 눈이 무언가를 더듬었다.
“마법의 오작동이 아니었어. 세계의 규칙을 거슬렀기 때문이야.”
그녀가 왼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뒤집고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는 단순한 동작. 하지만 그 손끝에서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한도영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마법이 아니라 사람으로 싸우겠다.”
로즈마리가 손을 내렸다. 그리고 한도영의 오른손을 짧게 잡았다.
접촉한 순간, 손바닥에서 미약한 파동이 올라왔다. 통제되지 않은 진동이었다. 촛불 앞에서 손을 대면 느껴지는 열기와 비슷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각.
로즈마리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녀도 감지했다. 자신의 파동이 한도영의 문신 패턴에 반응한다는 것을.
“이게……”
“네 마법 감각이다. 문신 좌표에 공명하고 있어.”
로즈마리는 손을 놓았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쉰 뒤 바구니 끈을 다시 고쳐 잡았다.
“좋아.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분명하네.”
문신 부위의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한도영은 팔을 옆구리에 붙이고 서서 영주성 방향을 바라봤다.
“에리히 백작에게 보고한다. 지금.”
영주성 집무실에 이미 등불이 켜져 있었다. 탁자 위엔 긴급 소집을 알리는 전령 문서가 펼쳐져 있었다. 에리히 백작은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크세니아 발렌타인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에리히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왔군. 감염자가 스물셋으로 늘었다.”
한도영이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수첩에서 식수원 지도를 떼어내 지도 위에 펼쳤다. 세 개의 발병 지점과 삼각형 연결선. 그 옆에 문신 패턴에서 옮겨 그린 격자도를 붙였다.
“이 세 곳이 오염원입니다.”
에리히 백작이 지도를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확실한가.”
“세 지점 모두 공동 우물입니다. 발병 순서와 거리도 일치하고요. 우물 폐쇄와 격리 구역 지정이 필요합니다.”
크세니아가 한 걸음 다가서며 지도 위의 삼각형을 짚었다.
“격리 경계선, 이 삼각형 기준인가.”
“그렇습니다. 발병 지점을 연결한 이 구역을 외부와 차단해야 합니다.”
에리히 백작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물자는.”
한도영이 수첩을 한 장 더 넘겼다.
“동부 농경지 개울물을 대체 수원으로 씁니다. 단, 격리 구역 안으로 반입되는 모든 물은 끓여서 보급해야 합니다. 구역 밖 영민들에게도 당분간 적용합니다.”
“보급 경로는 방금 전 파견한 용병이 확인할 거다.”
크세니아가 보고하듯 말했다.
“동부에서 격리 구역까지 수레로 한 시간 사십 분. 두 개 조로 나누면 교대 가능.”
에리히 백작이 서랍에서 문서를 꺼냈다. 변경백령의 인장이 찍힌 공식 비상령 용지. 펜에 잉크를 찍어 서명하고 인장을 눌렀다.
“‘변경백령 보건 비상령.’ 격리 구역 설정, 오염 우물 폐쇄, 식수 비등 명령을 포함한다.”
그가 크세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용병단에게 격리 구역 경비를 공식 의뢰한다. 계약서는.”
“이미 준비했다.”
크세니아가 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계약 기간, 경비 범위, 보수 액수가 조항별로 적혀 있었다. 에리히 백작이 확인하고 서명했다. 크세니아도 단검으로 손가락 끝을 살짝 찔러 혈서를 찍었다.
한도영은 식수원 지도를 집무실 지도함에 끼워 넣었다. 에리히 백작의 부관이 다가와 등록 번호를 적고 문서 목록에 기재했다.
“한도영의 식수원 지도, 공식 문서로 등록.”
에리히 백작이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로즈마리가 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영주님, 격리 구역 안 간호는 제가 맡습니다. 약초와 격리로 대응할 수 있어요.”
“위험하지 않나.”
“위험을 피하려고 간호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로즈마리의 대답은 차분했다. 에리히 백작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세니아가 계약서를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가다 멈춰 섰다.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해 뜨기 전에 초소 배치한다.”
문이 닫혔다.
약제실은 약초 냄새와 식초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파스칼은 탁자 위에 리넨 붕대를 길이별로 분류해 놓고, 작은 솥에 말린 쑥을 넣고 있었다. 한도영이 문을 열자 파스칼이 얼굴을 들었다. 손에 쥔 쑥 묶음이 바스락거렸다.
“아, 자문님. 방역 물자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손을 멈춰도 되나.”
파스칼은 쑥을 내려놓고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한도영은 수첩과 식수원 지도를 탁자 한쪽에 펼쳤다. 그 옆에 빈 양피지 한 장을 따로 놓았다.
“네 고향 쪽 소식이다.”
파스칼의 손이 주머니로 갔다. 구겨진 쪽지를 꺼내 손가락으로 펼치는 동작이 더뎠다.
“외삼촌이 보냈어요. 사흘 만에…… 마을 절반이.”
그는 쪽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잉크가 번져 있었지만 붉은 진흙 같은 흔적은 읽을 수 있었다.
“증상은.”
“고열, 밤에 심해지고, 사흘째 되는 날…… 객혈이.” 파스칼의 목소리가 마지막 단어에서 가늘어졌다. “부모님하고 똑같아요.”
한도영은 수첩을 펼쳤다. 문신 패턴을 기록한 페이지와 토벤 마을 발병 증상을 정리한 쪽이 나란히 놓였다. 그는 오른손 검지로 문신의 가장 굵은 교차점을 짚었다.
“열이 나는 주기. 수원을 통한 확산. 그리고 발병까지의 시간.”
파스칼이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이건 자연적인 역병이 아니다.”
“……예?”
“계절과 맞지 않는 잠복기. 우물 단위로 발생하는 군집 패턴. 역병의 전형적 확산과는 다르다.”
한도영은 빈 양피지 위에 숯연필로 점을 세 개 찍어 선으로 이었다.
“누군가 우물에 무언가를 풀어 넣었거나, 만들어낸 것이 상류에서 흘러 들어왔다.”
파스칼의 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잡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만들어낸 거라면…… 마법 같은 건가요.”
한도영은 대답 대신 계속 점을 찍었다. 문신의 격자 구조를 따라 60도 각도로 선을 뻗었다.
“마법인지, 독소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네 부모님의 사인과 지금 이 역병은 동일한 기원일 가능성이 높다.”
파스칼의 호흡이 한 번 끊어졌다. 그는 주머니 속 쪽지를 다시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그게 무슨 뜻이죠.”
“누군가 6년 전 네 고향에서 시작한 실험을, 아직 끝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파스칼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걷혔다. 다시 올린 시선은 젖어 있었지만, 더듬거리던 목소리는 사라졌다.
“찾고 싶어요.”
그는 탁자 위의 쪽지를 한 번 더 폈다 접으며 말을 이었다.
“누군지, 뭘 한 건지. 아버지 어머니를…….”
파스칼은 말을 삼켰다. 대신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문질렀다.
“부모님을 죽인 것과 똑같아요.”
한도영은 숯연필을 멈추지 않았다. 양피지 위에는 문신의 교차점과 같은 패턴이 생겨나고 있었다. 각각의 선은 파스칼에게서 들은 토벤 마을의 발병 지점을 지나고, 그가 분석한 우물 위치들을 관통했다.
“이걸 봐라.”
한도영이 완성된 지도를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파스칼이 몸을 숙여 들여다봤다. 식수원 지도와는 달랐다. 수원이 아니라, 병이 발생한 지점 사이를 연결한 좌표망이었다.
“이 선들…… 익숙해요.”
“내 문신과 같은 구조다. 60도 교차, 삼각 측량점.”
파스칼이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이 양피지 위의 점을 따라 움직이다 멈췄다. 한도영의 왼팔 셔츠 소매 위로 붉은 빛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역병의 확산 경로와 내 계약 문신은 동일한 좌표 체계를 쓴다. 누군가 이 좌표계로 무언가를 배치하고 있는 거다.”
파스칼의 눈이 다시 젖었다. 그러나 이번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양피지 위의 점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진원지는…… 이 방향이에요.”
그의 손끝이 마을 북동쪽 빈 공간을 가리켰다. 한도영은 그 지점에 작은 원을 표시했다.
“우리가 함께 찾는다.”
파스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시울이 더 붉어졌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찾을게요.”
한도영은 완성된 지도 옆에 수첩을 펼쳐 새 페이지로 넘겼다. 문신의 격자 패턴과 역병 확산 경로가 같은 비율로 겹쳐지는 모양이 탁자 위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숯연필을 다시 집어 문신 중앙 노드와 지도 위 교차점을 점선으로 연결했다.
문이 열렸다. 로즈마리였다.
약제실 바닥의 짚단을 밟으며 다가왔다. 허리춤에 약초 묶음이 흔들렸고, 앞치마에는 약간의 물기가 배어 있었다.
“격리 구역 마무리했어. 우물 폐쇄 지시는 집무실에서 내려갔고.”
그녀가 탁자를 보며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한도영의 수첩과 양피지 사이를 오갔다.
“네 문신을 측량한 거네. 역병에 대입해서.”
“좌표계가 같다. 문신, 수원, 발병 지점. 세 개가 같은 기하학 구조를 공유한다.”
로즈마리의 손이 허리춤에서 멈췄다. 약초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탁자 쪽으로 뻗어왔다. 손끝이 양피지 위의 빈 공간, 한도영이 아직 점을 찍지 않은 자리에 닿았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빛이 번졌다. 약초를 다루느라 갈라진 손끝으로부터 실낱같이 가는 파장이 실내로 퍼졌다. 약제실의 촛불이 일제히 깜빡였다.
한도영은 오른손으로 수첩을 집으려다 멈췄다. 자신의 왼팔 소매 아래에서 같은 리듬의 진동이 올라왔다. 통증은 아니었다. 냉기도 열기도 아닌, 맥박과는 다른 규칙적인 울림이 팔꿈치에서 손목으로 뻗어나갔다.
로즈마리가 손을 거두려는 듯 움찔했다. 하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손끝은 여전히 지도의 빈 공간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빛을 반사해 짙은 녹색으로 바뀌었다.
“의지하지 않았는데…….”
로즈마리가 자신의 손끝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내가 해방한 게 아니야. 그냥, 이 지도에 손이 닿았는데.”
“공명이다.”
한도영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었다. 문신이 붉게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으면서, 로즈마리의 푸른 빛과 같은 주파수로 깜빡이고 있었다.
“네 마법 감각이 이 계약의 좌표계를 인식한 거다. 내 몸에 새겨진 좌표와, 이 지도 위의 패턴을 같은 것으로 알아본 거다.”
로즈마리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러나 평소의 그녀답게 긴 말은 없었다. 손을 내리고 한 걸음 물러서며 낮게 말했다.
“함께 싸우자.”
한도영이 수첩을 집었다.
“이미 그럴 생각이다.”
그는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 숯연필을 댔다. 촛불이 다시 안정되어 약제실을 고르게 비췄다. 파스칼은 여전히 양피지 위의 점들을 손끝으로 만지고 있었고, 로즈마리는 손바닥을 뒤집어 자신의 손끝에 남은 잔광을 관찰했다.
한도영은 수첩에 짧게 적었다. ‘좌표 해석 = 규칙 재정의’. 숯가루가 종이 결을 따라 미세하게 번졌다.
약제실 문이 다시 밀렸다. 군화 소리와 함께 크세니아가 들어왔다. 어깨에 먼지가 앉아 있었고, 장갑에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격리 구역 경비 배치 끝났다. 열 지점, 이십 명 배치.”
그녀가 탁자로 다가왔다. 허리에 찬 장검의 손잡이가 탁자 모서리에 살짝 부딪혔다. 회색 눈이 양피지에 그려진 좌표망을 훑었다.
“네 문신이다.”
“역병 확산 경로와 같은 구조로 연결했다.”
크세니아는 잠시 침묵했다. 장갑을 벗어 탁자 옆에 놓고, 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냈다. 용병 계약서였다.
“혈서 문양도 같은 좌표일지 모른다.”
그녀는 계약서를 펼쳐 양피지 지도 옆에 나란히 놓았다. 혈서로 찍힌 문양, 한도영의 문신, 그리고 역병 확산 좌표. 세 개의 문서가 약제실 탁자 위에서 포개지지 않은 채로 나란히 놓였다.
파스칼이 손가락으로 각각의 교차점을 번갈아 가리켰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같은 각도예요.”
크세니아가 낮게 숨을 내쉬었다. 세 개의 문서는 하나의 미완성 지도를 구성하고 있었다. 중앙에 빈 공간이 있었다. 점도 선도 없는,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자리였다.
로즈마리의 손끝에서 가라앉았던 푸른 빛이 다시 한 번 옅게 깜빡였다. 빛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라, 탁자 위 빈 공간 방향으로 미세하게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