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14화

이른 아침, 토벤 마을 광장.

안개가 발목까지 차올랐다. 한도영은 광장 중앙의 우물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펼친 지도에는 붉은 점 아홉 개가 찍혀 있었다.

파스칼이 우물터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손가락으로 마을 동쪽을 가리켰다.

“저기서 세 명…… 저쪽 개울가에서 두 명이요.”

“발병 순서는.”

“개울가가 먼저였어요. 사흘 뒤에 동쪽이요.”

한도영은 숯연필로 각 지점 옆에 날짜를 적었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는 경로가 아니었다. 동쪽 발병 지점은 개울에서 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물길이 아니야.”

파스칼이 지도를 들여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점들을 연결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분수령을 넘었어요…… 물은 저쪽으로 안 흘러요.”

한도영은 지도에서 고개를 들었다. 동쪽은 완만한 구릉 지대였다. 지하수 흐름도, 지표수도 개울과 연결되지 않은 구역이었다. 측량으로는 추적할 수 없는 패턴이었다.

그가 왼손으로 지도를 접으려다 멈췄다. 왼쪽 소매 안쪽에서 열감이 올라왔다. 손목을 뒤집자 문신이 드러났다.

팔꿈치를 넘어 위팔 중간까지 퍼진 검은 선들. 그리고 어젯밤엔 없던 새로운 가지 하나가 쇄골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가슴 중앙까지 닿은 선 끝은 희미하게 붉었다.

파스칼이 숨을 들이켰다.

“그게…… 더 번졌어요.”

“알고 있다.”

한도영은 소매를 내렸다. 문신 부위가 옷감에 스칠 때마다 미세한 열이 느껴졌다. 통증은 아니었다. 다만 자기 몸이 아닌 무엇이 안쪽에서 자리 잡는 감촉이었다.

그는 일어서며 지도를 접어 수첩 사이에 끼웠다.

“마을 우물은 전부 폐쇄했나.”

“네…… 에리히 백작님 명령으로요. 그런데……”

파스칼이 광장 건너편을 바라봤다. 임시로 세운 천막 세 개가 보였다. 천막 안쪽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격리됐다고 해도…… 이미 감염된 분들은……”

말끝이 흐려졌다. 한도영은 천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천막 입구에 로즈마리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말린 약초 뭉치를 꺼내고 있었다. 눈 밑이 어두웠다.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들어오지 마. 감염자 아홉 명이야.”

“증상은.”

“고열, 반점, 림프절 부기. 토벤 마을에서 보고된 것과 같아.”

한도영은 천막 앞에 멈춰 섰다. 입구 천을 살짝 젖히자 남자 셋, 여자 넷, 어린아이 둘이 짚단 위에 누워 있었다. 팔 안쪽에 붉은 반점이 번져 있었다.

로즈마리가 일어서며 그의 팔을 막았다.

“네 문신 어디까지 왔어.”

“가슴 중앙.”

“통증은.”

“아직 견딜 만하다.”

그녀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측량 결과는.”

한도영이 지도를 건넸다. 그녀는 지도를 펼쳐 점들의 위치를 훑었다.

“물길이 아니네.”

“그래서 성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여기서 더 얻을 건 없다.”

파스칼이 뒤에서 다가왔다. 발끝으로 땅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 남아도 될까요.”

한도영이 돌아봤다.

“이유는.”

“더 정확히 세어보고 싶어요. 발병 지점이랑…… 시간을요. 뭔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하지만 시선은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좋다. 저녁까지 정리해서 성으로 와라.”

파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에 찬 측량용 줄자를 만지작거리며 천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도영은 광장을 가로질러 마을 입구로 향했다. 흰 말 한 필이 말뚝에 묶여 있었다.

등자에 발을 걸려는 순간, 왼쪽 가슴에서 열이 올라왔다. 문신 부위가 심장 박동에 맞춰 욱신거렸다. 그는 안장에 오르지 않고 잠시 말 옆에 섰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두 번.

로즈마리가 광장 건너편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도영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안장에 올랐다. 고삐를 쥐자 말이 천천히 발을 뗐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길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왔다.

한낮, 아렌트 성 지하 재무 보고실.

촛불 두 개가 벽감에서 타고 있었다. 에리히 백작은 낡은 책상 앞에 앉아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십 년치 세입 기록과 채권 증서 뭉치였다.

장부에 적힌 숫자는 매년 줄어들었다. 가뭄 3년째, 농업 생산량 40% 감소. 그 감소분을 채우기 위해 빌린 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가 장부를 덮으려는데 문이 열렸다. 전령이 땀에 젖은 채 들어왔다. 손에 진흙이 묻은 양피지 두 장을 들고 있었다.

“보급 마차가 습격당했습니다. 동쪽 변경 도로에서요.”

에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해는.”

“마차 두 대 전소. 호위병 한 명 중상, 한 명 실종. 곡물 스무 포대 전손입니다.”

에리히의 턱 근육이 굳었다.

“누구 소행인가.”

“습격자들은 도주했습니다. 다만……”

전령이 양피지 한 장을 내밀었다. 봉인은 찢겨 있었다. 올리비에 드 베르니에 후작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사자와 뱀이 교차한 금색 인장.

에리히가 서신을 펼쳤다. 글씨는 정갈했고 어조는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은 칼날 같았다. 한 줄 읽을 때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은화 환율 폭락에 따라, 기존 채권의 명목 가치를 재평가한다. 전액 상환 기한은 이달 말일. 불이행 시, 변경백령의 영토권을 담보로 왕실에 청원한다.”

전령이 숨을 죽였다. 에리히는 서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두 번째 양피지를 집었다. 습격 현장 보고서였다. 마차에 실려 있던 물자 목록, 호위병 증언, 현장에 남은 말발굽 흔적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물자 손실은 얼마나 타격인가.”

“남은 곡물은 한 달 치…… 우회 경로를 찾지 못하면 다음 주부터 배급을 줄여야 합니다.”

에리히는 양피지를 책상 구석으로 밀었다. 벽에 걸린 변경백령 지도를 바라봤다. 동쪽 변경 도로.

왕국과 제국을 잇는 유일한 보급선이었다. 습격 지점은 정확히 변경백령 관할 구역의 가장 좁은 통로였다. 지리를 알고 치고 들어온 거였다.

에리히가 전령에게 말했다.

“자문관 도영이 토벤 마을에서 돌아오는 대로 집무실로 보내라.”

“예, 영주님.”

전령이 물러나자 에리히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서신을 접어 제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장부를 덮으며 손가락으로 표지를 한 번 쓸었다.

촛불 하나가 꺼졌다. 방 안이 반쯤 어두워졌다. 에리히는 일어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오후, 아렌트 성 집무실.

한도영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로즈마리는 이미 탁자 앞에 서 있었다. 에리히 백작은 창가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어깨가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문 닫아 주게.”

한도영이 문을 닫았다. 에리히가 돌아섰다. 제복 안주머니에서 접힌 서신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보급 마차가 습격당했다. 동쪽 변경 도로다. 그리고 이것이 습격 전에 도착한 서신이다.”

로즈마리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빠르게 훑고는 탁자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입술을 악물었다.

한도영이 서신을 집었다. 후작의 문장, 환율 폭락, 전액 상환, 영토권 담보. 그는 읽은 내용을 그대로 탁자 위에 다시 펼쳐 놓았다.

“부채 내용을 후작이 알고 있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만이 돌아가며 보고한 거겠지. 3년 전 왕실 지원금의 실질적 채권자가 발렌 가문이라는 걸 후작도 알게 된 거다.”

“환율 폭락은.”

“사흘 전부터 시작됐다. 변경백령 은화와 제국 금화의 교환 비율이 반 토막 났다.”

한도영은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창가로 걸어가 광장을 내려다봤다. 아래 마당에는 격리 구역에서 돌아온 용병들이 장비를 손질하고 있었다.

“후작은 영토 자체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로즈마리가 말했다.

“협박이야. 지금 갚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던진 거지.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어.”

“영지의 지정학적 위치일 수도 있지.”

한도영이 돌아서며 말했다.

“왕국 최동단. 제국과의 교역로가 지나는 유일한 통로다.”

에리히가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후작의 영지는 서쪽 내륙이다. 교역로와는 무관한 곳이야. 대체 왜 지금 와서 변경백령을 압박하는 거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도영이 탁자로 다가왔다.

“부채와 환율과 보급 습격이 동시에 일어났다. 우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건 전쟁 준비다.”

에리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군사를 굴리기 전에 경제부터 조이는 거다.”

로즈마리가 팔짱을 풀었다.

“문제는 전부 겹쳐 있어. 역병, 빚, 보급, 환율. 하나씩 풀다가는 시간이 없어.”

“맞다.”

한도영이 탁자 위의 서신을 가리켰다.

“하나의 공통된 원리로 접근해야 한다.”

“뭔데.”

“계약입니다.”

로즈마리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에리히도 고개를 들었다.

“후작의 채권 계약, 용병 계약, 소환 계약. 전부 계약이라는 형태로 사람을 구속하고 있다.”

그가 왼쪽 소매를 걷었다. 문신이 드러났다. 쇄골을 넘어 가슴 중앙까지 뻗은 검은 좌표선. 로즈마리가 숨을 들이켰다. 에리히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계약서다. 세계가 나를 이 장소에 고정하는 문서.”

한도영은 소매를 내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계약들도 구조는 같을 거다. 채권, 용병 계약도 누군가를 구속하는 문양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공통된 원리를 추적하면 돌파구가 보일 수도 있다.”

“누구부터 조사할 건가.”

“크세니아입니다. 용병 계약의 혈서 문양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에리히가 턱을 만졌다.

“그녀가 보여줄까. 계약 문양은 용병대장에게 가장 민감한 정보다.”

“그래서 제가 직접 묻겠습니다.”

로즈마리가 반 걸음 다가왔다.

“나도 같이 가.”

한도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계약 문양은 숫자가 적을수록 부담이 덜하다. 그리고 너는 격리 구역 담당이다.”

로즈마리가 잠시 입을 열려다 닫았다. 팔짱을 다시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무리하지 마. 문신이 가슴까지 왔으면 시간이……”

그녀가 말을 멈췄다. 에리히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자문관, 한 가지만 확인하겠네. 지금 이 상황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보나.”

한도영이 잠시 생각했다.

“확률은 말할 수 없습니다. 전략은 있습니다.”

에리히가 낮게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쓴 미소였다.

“기사 시절에 들은 말이 하나 있어. 확률을 계산하는 자는 지기 위해 계산하고, 전략을 말하는 자는 이기려고 말한다. 좋아. 자네 방식대로 해보게.”

“그 말을 한 사람은.”

“내 첫 대장이었다. 전투에서 죽은 뒤에야 그의 장부에서 빚더미를 발견했지. 전략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도 있다.”

그가 탁자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네 외에 다른 전략이 없어.”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탁자 위의 서신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사자와 뱀의 문장.

계약의 문양. 소환의 좌표.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

아직 선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패턴은 감지되고 있었다.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에는 로즈마리도 함께였다. 그녀가 한도영의 왼쪽 팔을 살짝 잡았다. 옷감 너머로 문신의 열이 전해졌다.

“약초라도 좀……”

“필요 없다. 아직은.”

“네 몸 상태를 내가 더 잘 알아.”

한도영이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팔에서 떨어졌다.

“무기고에 다녀온 뒤 약제실로 가겠다.”

“약속이야.”

그녀가 먼저 돌아섰다. 복도 저편, 격리 구역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한도영은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 무렵, 아렌트 성 무기고.

크세니아는 작업대 앞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장검 세 자루를 차례로 점검 중이었다. 숫돌을 기름에 적셔 칼날을 밀 때마다 규칙적인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신이 얼굴까지 올라왔나.”

한도영이 작업대 건너편에 섰다.

“아직은 팔과 가슴이다.”

“다행이군. 얼굴에 문신한 자문관은 영지 밖으로 못 내보내니까.”

그녀가 숫돌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회색 눈이 촛불을 받아 무채색으로 빛났다.

“용건은.”

“용병 계약의 혈서 문양을 보여 달라.”

크세니아의 손이 멈췄다. 장검을 조심스럽게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유는.”

“어젯밤 약제실에서 확인했듯이, 혈서 문양과 소환 문신과 역병 확산 경로가 같은 좌표 구조를 공유할 가능성이 있다.”

“그건 세 문서가 탁자 위에서 포개졌을 때의 관찰이다. 확증은 아니었지.”

“그래서 직접 확인하러 왔다.”

크세니아가 천천히 일어섰다. 작업대 옆의 랜턴 집게로 심지를 올렸다. 불빛이 넓어졌다.

“계약 내용을 말해.”

“문양의 구조와 발동 조건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게 목적이다. 계약 당사자나 의뢰인의 신원은 묻지 않겠다.”

“보고 대상은.”

“나와 파스칼. 그리고 필요하면 에리히 백작에게 구조적 사실만 전달한다.”

크세니아가 작업대를 한 바퀴 돌았다. 장갑을 낀 채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네 문신은 피계약자 본인의 것이다. 용병 계약은 다르다. 대장인 내가 부하들 앞에서 계약 문양을 직접 보여준 적은 없다. 항상 혈서만 징구했지.”

“그래서 내게도 안 보여주겠다는 건가.”

그녀가 잠시 침묵했다. 오른손으로 왼쪽 장갑 끝을 잡았다.

“아니다. 네게 보여줄 이유가 있다.”

그녀가 왼쪽 장갑을 벗었다. 가죽이 손가락에서 빠질 때 마찰음이 났다.

장갑 아래로 드러난 왼손. 검지, 중지, 소지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약지가 있던 자리는 없었다.

손바닥에서 뿌리째 사라진 자리였다. 피부는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고, 흉터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약지가 없었던 것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이게 대가다. 계약 위반 시 신체 일부가 소멸한다.”

그녀가 손을 뒤집었다. 손등에도 같은 흔적이 있었다. 소멸한 약지 자리 주변으로 희미한 혈서 문양이 손등까지 번져 있었다. 한도영의 문신과 같은 색조의 검은 선이었다. 패턴은 다르지만 선의 각도는 비슷했다.

“언제.”

“칠 년 전. 부하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계약 조건을 일부러 어겼다.”

“어느 부위가 사라지는지는 계약자가 선택할 수 있나.”

“아니다. 계약의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전투 계약은 무기를 쥐는 손가락, 추적 계약은……”

그녀가 말을 멈췄다. 왼손을 다시 장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 이상은 내일 말해주지.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

한도영이 작업대 위의 장검을 가리켰다.

“혈서는 어디에 찍나.”

“칼자루다. 계약자는 손바닥을 베어 피를 묻히고, 의뢰인은 반대편 칼자루에 같은 방식으로 서명한다. 양쪽의 피가 섞이면 문양이 발현된다.”

“문양은 칼자루에 남나.”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남는다. 계약이 종료되면 사라지지.”

그녀가 작업대 아래에서 단검 한 자루를 꺼냈다. 칼자루에는 검은 문양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한도영이 가까이 다가가 관찰했다. 60도 교차각. 고대 측량 좌표계와 같은 격자 패턴.

“이건 유효한 계약인가.”

“아니다. 작년에 종료됐다. 그래서 문양이 희미해진 거다.”

“종료된 계약의 문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크세니아가 단검을 다시 작업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네놈 질문은 항상 예상보다 하나 더 많군. 그 답은 내일.”

그녀가 작업대의 랜턴 집게를 내렸다. 불빛이 다시 좁아졌다.

“이제 가라.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와. 그때 더 알려주겠다.”

한도영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알겠다.”

그가 무기고 문을 향해 돌아섰다. 등 뒤에서 크세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문관.”

그가 멈췄다.

“계약 파훼법을 찾으면…… 제일 먼저 나에게 적용해라.”

사실 보고 형식의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어미가 살짝 낮았다.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무기고 문이 닫혔다. 복도는 어두웠다. 벽걸이 촛대 세 개만이 긴 통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가 성 안쪽으로 걸어가려다 발걸음을 멈췄다.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크세니아의 낮은 톤이었다. 방금 무기고 안에 있던 그녀가 다른 통로를 통해 먼저 모퉁이 쪽으로 간 모양이었다.

“……소환된 자의 회수 기한이 임박했다. 아직 통보는 하지 마라.”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크세니아가 그림자 속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계약이 가슴까지 왔다. 시간이 많지 않아. 회수 조건을 검토해둬.”

한도영은 벽에 등을 붙였다. 왼쪽 가슴의 문신이 다시 욱신거렸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복도 모퉁이 쪽에서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크세니아가 무기고로 되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이 다시 열리고 닫혔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한도영은 벽에서 등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기록은 나중에. 지금은 정보를 정리할 시간이었다.

‘회수’라는 단어. 크세니아는 소환 계약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한도영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가 복도를 걸어 약제실 방향으로 향했다. 왼쪽 가슴의 열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문신은 가만히 있었다. 당분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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