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15화
지하 재무 보고실은 차가웠다. 돌벽 사이 긴 탁자 위에서 등불 하나가 떨고 있었다. 한도영은 수첩을 펼쳤다.
숯연필을 쥔 손가락이 굳은살 밑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왼쪽 가슴이 욱신거렸다. 문신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 근육이었다.
통증보다는 압박감에 가까웠다. 한도영은 신경을 끄고 이전 기록을 훑었다.
토벤 마을의 발병 지점. 세 우물을 연결한 정삼각형. 60도 교차각의 격자 구조. 크세니아, 그 소멸한 약지.
연필을 멈췄다.
크세니아의 손가락은 계약 위반 결과였다. 그런데도 문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종료된 계약 흔적이 남는다.
한도영은 수첩 빈 페이지에 작은 점을 찍었다. 그 점을 중심으로 60도 각도의 선 두 개를 그었다. 이어서 동일한 간격으로 교차점들을 표시했다.
고대 측량 기호와 동일한 패턴이다. 자신의 문신도, 역병 발병점도 이 격자 위에 있었다. 크세니아의 약지에 남은 흔적 역시 같은 구조일 확률이 높았다.
계약은 조건 이행을 기록하는 문서가 아니다. 계약자를 이 세계 규칙에 편입시키는 등록 코드다. 문신 좌표는 개별 계약자의 고유 식별자다.
수첩에 적었다.
「계약 = 세계 편입 코드. 문신의 좌표는 개별 식별자.」
관찰된 사실들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켰다. 60도 격자, 확장 경로, 발병점 좌표, 크세니아의 잔류 문양. 논리적 비약은 없었다. 문제는 이 코드가 어디에 등록되는가다. 세계의 '규칙' 자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로즈마리였다. 한 손에 조그만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김이 올라왔다.
“이 시간에 여기 있을 줄 알았어.”
탁자 옆으로 와서 잔을 하나 내려놓았다. 약초차의 쓴 향이 났다.
“크세니아를 만나고 온 모양이네.”
한도영은 수첩을 닫지 않았다.
“용병 계약의 문양을 확인했다.”
로즈마리가 잔에 차를 따랐다. 액체가 흔들리지 않았다.
“약지는 계약 위반 대가였어. 문양은 지금도 남아 있고.”
로즈마리의 손이 잠시 멈췄다.
“위반해도 문양은 남는다.”
“종료된 계약의 표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도영은 수첩을 로즈마리 쪽으로 돌렸다. 방금 적은 두 문장이 등불 아래 드러났다.
“개별 식별자라면, 그 식별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라.”
“네트워크다.”
한도영이 말했다.
“역병 좌표, 소환 계약 문신, 용병 계약의 혈서 문양이 같은 격자 구조 위에 있다. 개별 코드들이 하나의 시스템에 등록된 거라면.”
“내가 느낀 게 그거야.”
로즈마리가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손목 위로 가져갔다. 실제로 만지지는 않고 손바닥을 몇 센티미터 위에 띄웠다.
“네 문신에 닿았을 때. 단순히 위치 좌표가 아니었어. 그 지점에서 뻗어나가는 실 같은 게 느껴졌어.”
로즈마리가 손을 내렸다.
“지금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어. 억누르지 않으면 저절로 감지돼.”
한도영은 그 오른손을 바라봤다.
“마법 감각이 예민해지고 있다.”
“숨기려고 했는데. 어머니 사고 이후로 한 번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네 문신이 방아쇠였던 것 같아.”
“노드.”
한도영이 입을 열었다.
“네트워크의 각 연결점. 네가 느낀 실 같은 감각은 노드 간의 연결선일 거다.”
그가 수첩의 격자 패턴 위로 손가락을 움직이며 교차점들을 하나씩 짚었다.
“내 문신은 하나의 노드. 크세니아의 남은 문양도 하나의 노드. 역병 발병점들도 동일한 좌표 위의 노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노드들이 공유하는 게 뭘까.”
“세계의 규칙이다. 계약은 개인을 그 규칙에 접속시키는 코드다. 모든 계약자는 같은 시스템에 로그인한 상태다. 그게 편입의 실체다.”
로즈마리가 잔을 내려놓았다. 찻물이 흔들렸다.
“그럼 크세니아는 왜 네게 회수 기한을 직접 말하지 않았지.”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첩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새 페이지에 적었다.
「크세니아의 거짓말은 회수 기한의 기밀이 아니라, 그 노드 위치일 가능성이 있다.」
로즈마리가 그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파훼가 아니라 계약 네트워크의 해체. 그게 목표가 돼야 할지도 몰라.”
한도영이 수첩을 덮었다. 왼쪽 가슴의 압박감이 다시 올라왔다. 등록 코드는 가만히 있었다. 아직은.
지하 재무 보고실은 성의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석벽이 습기를 머금었다. 촛불 세 개가 긴 탁자 위에서 흔들렸다. 벽 한쪽에는 낡은 장부가 쌓인 선반이 줄지어 있었다. 다른 쪽에는 녹슨 철제 궤짝 두 개가 바닥에 붙박여 있었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쳐 탁자 위에 올렸다. 왼쪽 페이지에는 자신의 문신 패턴을 베껴 놓았다. 오른쪽은 비워 두었다. 로즈마리가 탁자 건너편에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크세니아가 장화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오른손에는 단검도 장검도 없었다. 왼손엔 여전히 장갑을 끼고 있었다.
“심야에 호출이라니.”
평소와 같은 군인식 톤이었다. 한도영이 고개를 들었다.
“용병단의 계약서를 봐야 한다.” “내 약지로 부족했나.”
크세니아가 탁자 가까이로 걸어왔다. 촛불이 은발을 스치며 흔들렸다.
“약지는 결과다.” 한도영이 왼쪽 페이지를 가리켰다. “계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가 본론이다.” “계약서 전문은 보여줄 수 없다. 의뢰인 정보가 포함돼 있다.” “문양만으로 충분하다.”
회색 눈이 수첩으로 향했다. 그 시선이 한도영의 문신 스케치 위를 천천히 훑었다.
“저 패턴. 방금 전 무기고에서도 봤다. 네놈 팔뚝에 있는 것과 같군.” “그렇다. 이제 당신 차례다.”
크세니아가 왼쪽 장갑을 벗었다. 소멸한 약지 자리가 드러났다. 흉터조차 없는 매끈한 피부. 주변 피부에는 희미한 혈관 같은 붉은 선들이 손등 쪽으로 가지처럼 뻗어 있었다.
“계약서는 여기 있다.”
크세니아가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께를 짚었다. 가죽 갑옷 안쪽에서 접힌 검은 천 조각을 꺼냈다. 펼치자 가로세로 손바닥 두 배 크기의 양피지가 나타났다.
혈서로 적힌 계약이었다. 문자 부분은 검붉은 색으로 굳어 있었고, 하단에는 기하학적 문양이 찍혀 있었다. 원형 노드에서 60도로 갈라진 미세 곡선들.
한도영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왼쪽 가슴 문신과 동일한 격자 구조였다.
“좌표계가 같다.”
로즈마리가 탁자 옆으로 다가왔다. 그 손끝에서 푸른 빛이 스며 나왔다.
“이 양피지…….” 로즈마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살아 있어. 마법적 잔향이 아니라 뭔가가 지금도 흐르고 있어.”
크세니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빛. 네 어머니에게서 딱 한 번 봤다. 마을이 불타던 날 밤에.”
로즈마리의 손이 멈췄다. 한도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계약 위반 시 약지가 소멸했다고 했다. 그 소멸은 어디서 시작됐나.”
크세니아가 양피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오른손 검지로 문양의 중심점을 톡톡 두드렸다.
“여기다. 계약을 어겼을 때, 이 중앙 노드가 타들어가는 느낌이 먼저 왔다. 그리고 이 선을 따라 손등 쪽으로 열이 번졌다.”
그 손가락이 60도 분기선 하나를 따라 미끄러졌다.
“약지 첫 마디에서 멈추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통증은 없었다. 있다는 감각 자체가 소멸했다.”
한도영이 자신의 왼팔을 바라봤다. 셔츠 아래로 문신이 숨겨져 있지만 확장 경로는 외우고 있었다. 심장 방향으로, 좌표계의 중앙으로.
“저주가 아니라 흐름이다.”
그가 수첩의 빈 페이지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원형 노드 하나, 거기서 갈라진 가지들. 화살표 하나를 노드 반대편으로 그었다.
“계약은 피를 이 좌표에 편입시킨다. 세계가 이 좌표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거다.” “들리는군.” 크세니아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지.” “편입 방향이 있으면.”
한도영이 붓펜을 멈추고 그린 것을 들어 보였다. 화살표는 노드에서 바깥으로 향해 있었다. 두 번째 화살표를 반대 방향으로 그었다.
“반대 방향도 존재한다. 이탈 벡터다.” “역벡터.”
크세니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군인식 톤을 잃었다. 숨소리가 짧아졌다.
“그 역벡터를 따르면…….”
크세니아가 갑자기 움직였다. 양손이 한도영의 팔뚝을 붙잡았다. 오른손과, 약지 없는 왼손. 장갑을 벗은 채였다. 쇠처럼 단단한 악력이었다.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거냐. 내 약지를 되돌릴 수 있냐.”
한도영이 몸을 뒤로 젖히려 했지만 상대 손이 더 빨랐다. 탁자 위의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 로즈마리가 곧바로 한도영의 오른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손끝 푸른 빛이 약간 더 밝아졌다.
“크세니아.”
로즈마리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경고가 섞여 있었다. 크세니아가 로즈마리를 보지 않고 말했다.
“육 년 전. 내 부관이 계약을 어겼다. 의뢰주를 속이고 따로 돈을 받았다. 발렌타인의 송곳니 규율대로라면 목숨을 내놔야 했다.”
크세니아의 손가락이 한도영의 팔뚝에 파고들었다.
“내가 직접 처단했다. 칼을 든 순간, 이 문양이 발동했다. 열이 손목에서 손가락 끝까지 흘렀다. 잘못된 계약 주체를 바로잡는 느낌이었다.”
크세니아의 눈이 수첩 위로 돌아갔다.
“계약의 뿌리가 거기 있다. 위반한 자를 처분하는 게 아니라, 잘못 편입된 가지를 도려내는 거다. 마치 나무에서 썩은 가지를 자르듯이.” “그래서 약지가 소멸했다.” 한도영이 말했다. “당신이 당신 부하의 계약을 집행했기 때문에.” “그렇다. 같은 계약서에 묶인 자였다.”
크세니아가 마침내 손을 놓았다. 한도영의 팔뚝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역벡터가 진짜라면.” 그녀가 말했다. “그건 가지를 잘라내는 게 아니라 뿌리에서 분리하는 거다.” “가능성을 확인 중이다.” “확인이 아니야. 찾아내야 한다.”
크세니아가 양피지를 다시 접어 가슴께에 넣었다.
“조건을 걸겠다. 계약 파훼법을 찾으면, 먼저 나에게 적용하라.”
한도영이 크세니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회색 눈동자는 차가웠지만 그 바닥에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먼저 계약의 주체를 전환하는 방법을 찾겠다. 개인을 구속하는 계약 자체를 무효화하는 게 우선이다. 개별 적용은 그 다음이다.” “선후가 잘못됐다.” “내 계약은 아직 진행 중이다. 기한이 임박했으면 더더욱 그렇다. 나부터 살아야 돕든 말든 할 수 있다.”
크세니아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답군. 자문관.”
크세니아가 돌아섰다. 장화 소리가 문을 향해 규칙적으로 울렸다.
“소멸한 약지 자리에 열이 느껴진 건, 십 년 만에 처음이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을 던졌다.
“실망시키지 마라.”
문이 열리고 닫혔다. 장화 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멀어졌다.
로즈마리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 손끝 빛이 사그라들었다.
“저 여자, 뭔가 숨기고 있어.”
탁자 모서리를 짚고 섰다. 손가락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역벡터 얘기가 나왔을 때, 저 반응. 절망이 아니라 기다렸다는 눈빛이었어.”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붓펜으로 빈 페이지에 적었다.
‘크세니아의 약지 — 계약의 근원 좌표와 연결됨. 소멸의 흐름은 중앙 노드에서 말단으로. 저주가 아니라 교정 작용.’
붓펜을 내려놓고 로즈마리를 보았다.
“복도에서 들은 얘기가 있다. 회수 기한이 임박했다. 크세니아가 다른 누군가와 소환된 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소환된 자라면…… 너 말이지?”
한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었어. 내 계약의 결말을. 그리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그럼 역벡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저렇게 달려든 이유가……”
로즈마리가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한도영의 팔뚝에 남은 붉은 자국을 살짝 짚었다.
“아프지?” “조금.”
한도영은 수첩을 접어 허리 주머니에 넣었다.
“크세니아는 아군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적도 아니다. 역벡터를 원하는 속내를 알기 전까지는.”
촛불 하나가 바닥까지 타들어 가며 꺼졌다. 탁자 위에는 두 개의 불꽃만 남았다.
“내일 아침, 에리히 백작에게 보고해야 한다.” 한도영이 말했다. “용병 계약과 소환 계약이 같은 좌표계를 쓴다는 것. 그리고 계약 파훼의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 채권 문제와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같은 ‘계약’이니까.” “좋아. 나도 갈게. 내 감각이 더 예민해지고 있어. 좌표계를 직접 느낄 수 있으니까, 뭔가 놓친 부분을 찾을지도 몰라.”
한도영이 나머지 촛불을 집게로 끄려다 멈췄다.
“고맙다.”
로즈마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그게…… 도움이 된다.”
로즈마리의 볼에 있던 주근깨가 촛불 아래서 짙게 드러났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앞니가 드러나는 웃음이었다.
“드문 말을 하네. 자문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