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16화

숨소리가 먼저였다.

한도영은 잠들지 못했다. 지하 보고실에서 돌아온 뒤 왼쪽 가슴의 압박감이 누운 자세를 허락하지 않았다.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수첩을 펼친 채였다.

그림자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은발이 희미하게 빛났다. 크세니아였다. 왼손에 단검을 쥐고, 오른손은 허리춤의 작은 가죽 주머니 위에 걸쳐 있었다.

“움직이지 마.”

한도영은 수첩을 내려놓았다.

“복도에서 들었다. 회수 기한. 내 기한을 누군가와 상의하고 있었다.”

“목적이 뭐지.”

“역벡터다. 네가 찾은 역벡터. 계약을 거꾸로 돌릴 방법. 납치해서라도 확보한다.”

“네 약지를 위한 거냐.”

크세니아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달려오는 소리였다.

문이 밀려 열렸다. 로즈마리였다. 리넨 블라우스의 소매가 흐트러져 있었다. 한 손은 문틀을 짚고, 다른 손은 앞으로 뻗어 있었다.

“물러서.”

크세니아가 몸을 반쯤 돌렸다. 단검은 여전히 한도영 쪽을 향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로즈마리가 발을 내디뎠다.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왼쪽 가슴의 문신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열감이 아니라 냉기였다. 피부 위로 푸른 빛이 스며 나왔다.

로즈마리의 손가락 끝에서 같은 빛이 번졌다.

의지하지 않은 발현이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빛이 손목까지 올라갔다.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식었다. 탁자 위의 촛농이 굳었고 물항아리 표면에 성에가 끼었다.

크세니아의 단검이 1치쯤 내려갔다.

“마법.”

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로즈마리의 손을 보고, 손끝의 푸른 빛을 보고, 다시 얼굴을 보았다.

“억눌러 온 마법이군. 이런 규모는 처음 본다.”

로즈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 손, 통제 안 되고 있지.”

크세니아가 단검을 허리춤에 꽂았다.

“마법을 숨긴 약제사. 오늘 밤 계획은 중단한다.”

한도영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문신의 냉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크세니아가 로즈마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법에 대한 답은 나중에 듣는다. 지금은 저 자문관의 역벡터가 먼저다.”

로즈마리의 눈이 크세니아의 왼손을 향했다. 약지가 없는 자리.

“네 손. 그게 진짜 목적이구나.”

크세니아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소멸한 약지 자리. 매끄러운 흉터 대신 피부가 접힌 흔적만 남은 곳.

“십 년 됐다. 계약을 위반한 부하를 처단하지 않았다. 내가 대가를 치렀다. 약지 하나. 무기의 균형 감각이 영영 틀어졌다.”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지하 보고실에서 그려 둔 계약 문양의 복사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복도에서 네가 한 말. '계약 이행 준비를 하라'. 누구와 이행할 계약이지.”

“말할 수 없다.”

“계약 조건인가.”

“그렇다.”

한도영이 수첩 구석에 무언가를 적었다.

“네 약지 소멸 부위는 계약 문양의 중심 노드와 일치한다. 용병 계약서 혈서의 문양. 내 문신의 좌표계. 역병 발병 지점의 삼각 격자. 전부 같은 구조다.”

크세니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역벡터가 어디냐.”

“아직 모른다. 하지만 방향은 알았다. 편입이 아니라 이탈. 세계 좌표계에서 노드를 분리하는 벡터.”

로즈마리가 손을 내렸다. 손끝의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네가 숨긴 게 약지만이 아니구나. 소환 계약의 결말도 알고 있었지. 한도영의 기한이 임박했다는 것도. 그런데 왜 직접 말하지 않았어.”

크세니아가 로즈마리를 보았다.

“말했다면 저 자문관은 도망쳤을 것이다. 계약 파훼 방법을 찾기 전에. 나는 네가 여기 남아 있길 바랐다.”

한도영이 붓펜을 내려놓았다.

“내가 남아서 역벡터를 찾길 바랐다. 네 약지 때문만이 아니다. 방금 말한 계약 이행. 그 상대와의 조건에 내 계약 파훼가 포함되어 있다.”

크세니아의 입술이 얇게 당겨졌다.

“추측이 날카롭군.”

“사실 확인이다.”

로즈마리가 한 걸음 더 들어와 책상 옆에 섰다.

“혈서 계약서 원본. 보여줘. 약지 소멸 부위와 원본 문양을 비교해야 한다.”

크세니아가 허리춤 가죽 주머니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혈서로 그린 계약 문양이 드러났다. 검붉은 잉크. 원형 노드에서 60도로 갈라진 선들. 삼각 격자 구조.

한도영이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의 문신과 두루마리의 문양을 나란히 놓았다.

“동일하다.”

크세니아가 자신의 왼손을 계약서 옆에 가져다 댔다. 소멸한 약지 자리가 문양의 중심 노드 위에 정확히 겹쳐졌다.

“십 년 동안 이 자리에 감각은 없었다. 어젯밤. 네가 역벡터를 찾았을 때. 처음으로 열이 느껴졌다.”

로즈마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스커트 자락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달려든 거야. 네게도 기회였으니까.”

“기회라.”

크세니아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열흘 안에 두 번째 이행 조건이 발동된다. 내 부하 열두 명이 계약 위반으로 소멸한다. 약지 하나가 아니라 부하 전원.”

로즈마리의 손가락에서 푸른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호박색 눈이 크세니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거짓말은 아니네.”

“거짓말은 계약 위반이다. 혈서 앞에서는.”

한도영이 수첩의 새 페이지를 펼쳤다. 크세니아의 계약서 문양과 자신의 문신 복사도를 나란히 배치한 뒤 양쪽 노드 위치를 점으로 찍었다.

“네 계약서에는 노드가 열 개다. 하지만 혈서 계약을 체결한 용병은 열세 명. 부하 한 명의 노드가 계약서에서 소멸했다. 약지를 치른 그 날 이후로.”

크세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하의 노드는 더 이상 계약서에 묶여 있지 않다. 소멸로 계약이 종료됐다. 나는 그 종료의 방향을 역추적할 수 있다고 본다.”

한도영이 붓펜으로 소멸한 노드 자리에서 바깥쪽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역벡터의 시험 적용 대상. 네 부하의 소멸 지점.”

“그걸 찾으면 뭐가 나오지.”

“계약 네트워크의 해체 경로.”

크세니아의 오른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가 손을 허리 뒤로 감추었다.

“조건을 제시해라.”

“먼저 네가 말해라. 계약 이행 상대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크로이츠 변경백인가.”

크세니아의 눈빛이 경련하듯 흔들렸다. 침묵 자체가 확인이었다.

“알겠다. 지금은 더 추궁하지 않겠다. 대신 조건이 있다. 네 혈서 계약서 원본을 내일 아침까지 내가 보관한다. 비교 분석에 필요하다.”

크세니아가 두루마리를 응시했다.

“오늘 밤 이후에 돌려받지 못하면. 내 부하는 열흘 뒤 소멸한다.”

“내일 아침, 에리히 백작 앞에서 이 계약서를 설명 자료로 사용한 뒤 바로 반환한다. 역벡터 적용 실험 제안도 함께 보고한다.”

크세니아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남겨 두고 손을 뗐다.

“좋다.”

로즈마리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 사이로 아직 미세한 푸른 입자가 남아 있었다.

“내 손.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한도영이 로즈마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통제하지 않아도 된다. 네 마법 감각이 내 문신과 공명한다는 것. 그리고 혈서 계약 문양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증명했다.”

크세니아가 문 쪽으로 물러섰다.

“내일 보고 때 내가 참석한다. 계약서 공개에 이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네 마법 재능. 저 여자 혼자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마법사 비율 0.03%의 세계에서 저 정도 출력은 귀족 가문의 혈통이다.”

로즈마리가 손을 멈췄다.

“우리 어머니 얘기야.”

“그렇다.”

크세니아가 문을 열었다. 복도로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도영 쪽을 돌아봤다.

“역벡터 실험. 부하의 소멸 지점을 추적해서 계약 네트워크의 해체 경로를 증명한다. 성공하면 나는 네 편이다.”

문이 닫혔다.

한도영은 수첩을 다시 꺼내 펼쳤다. 혈서 계약 노드는 피계약자 수와 일치. 한 노드의 소멸이 계약 종료와 동일한 효과. 소멸 지점 추적은 역벡터 검증 가능.

로즈마리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입자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방금 뭘 한 거지.”

“공기를 얼렸다. 통제 안 된 발현으로.”

“이게 어머니에게서 유전된 거라면. 마을 하나를 불태운 게 아니라. 세계 규칙을 거슬렀던 거라면.”

“지금은 가설 단계다. 확인하려면 네 마법 감각과 계약 좌표계의 연결 패턴을 더 추적해야 한다.”

로즈마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쉬어야 해. 내일 아침 보고까지 얼마 안 남았어.”

그녀가 문고리를 잡았다가 멈추었다.

“크세니아 말이야. 아군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지금 적도 아니야. 그건 분명해.”

“동의한다.”

로즈마리가 문을 열고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 너머로 멀어졌다.

한도영은 탁자 위의 혈서 계약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수첩 옆에 두었다. 왼쪽 소매를 다시 걷었다. 문신은 잠잠했다. 팔꿈치 위까지 퍼진 문양이 촛불 아래서 검푸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붓펜을 들어 수첩 마지막 줄에 덧붙였다. 계약 네트워크 해체 경로의 시험 적용 대상은 크세니아의 소멸한 부하 노드. 성공 시 용병 계약과 소환 계약 모두에 동일한 역벡터 적용 가능. 상호 합의 조건 충족 여부는 별도 검토 필요.

붓펜을 내려놓았다. 촛불을 끄지 않았다.

탁자 위 수첩을 집어 들었다. 크세니아의 약지 소멸 부위를 스케치한 페이지를 펼쳤다. 문양의 교차각이 내 문신과 정확히 일치했다. 60도.

“뭔가······.”

로즈마리가 말을 끝맺기 전에 복도에서 군화 소리가 울렸다. 여럿이었다. 쇠 발걸음이 돌바닥을 박차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도영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로즈마리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도하지 않은 발현이었다.

문이 열렸다.

크세니아가 먼저 움직였다. 오른손으로 품에서 혈서를 꺼냈다. 양피지가 공기 중에서 스스로 펼쳐졌다. 가장자리에서 검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막아.”

크세니아가 짧게 내뱉었다. 혈서의 문양이 허공으로 번져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로즈마리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 사이로 푸른 파동이 퍼져나갔다.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며 복도 쪽 출입구에 얼음 벽이 솟아올랐다. 두께는 한 뼘. 천장까지 닿았다.

크세니아가 돌아보지 않고 왼손을 빙벽에 갖다 댔다. 소멸한 약지 자리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얼음 표면에 닿자 균열이 번개처럼 퍼졌다. 빙벽 전체가 바스라졌다.

“멈춰!”

로즈마리가 한 걸음 내디뎠다. 오른손을 다시 뻗으려던 순간, 무릎이 꺾였다. 두 번째 발현의 반동이 몸 전체를 관통한 탓이었다. 한도영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로즈마리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있었다.

크세니아가 복도로 나가기 직전,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이 움직였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내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경비병 세 명이 부서진 빙벽 잔해를 밟으며 들이닥쳤다. 선두에 선 자가 검을 빼 들고 방 안을 훑다가 바닥에 주저앉은 로즈마리를 발견했다.

“무슨 일입니까!”

한도영이 로즈마리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대답했다.

“크세니아 발렌타인. 혈서를 이용해 이탈했다. 방향은 동쪽 복도.”

경비병 한 명이 즉시 뒤돌아 복도로 뛰어나갔다.

“부상자는?”

“로즈마리. 마법······.”

한도영이 말을 멈췄다. 마법이라는 단어에 경비병의 눈빛이 바뀌었다. 로즈마리의 손끝에는 아직 희미한 푸른 잔광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설명하겠다. 지금은 추적이 우선이다.”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료에게 명령을 내렸다. “동쪽 출입구 봉쇄. 성문 경비대에 연락해.”

복도에서 무겁고 빠른 발소리가 들렸다. 에리히 백작이었다. 잠옷 위에 외투만 걸친 차림이었다.

“상황.”

“용병대장 크세니아 발렌타인, 혈서를 사용해 도주. 현재 동쪽 복도 방향으로 추적 중입니다.”

에리히의 시선이 바닥의 얼음 파편을 훑었다. 녹기 시작한 조각들 사이로 핏방울이 섞여 있었다.

“로즈마리.”

에리히가 무릎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로즈마리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조금······ 힘이 빠졌을 뿐.”

“의무병을 불러라. 회의실로 옮긴다.”

경비병 한 명이 로즈마리의 반대편 팔을 잡았다. 한도영과 함께 그녀를 부축해 계단을 올랐다. 로즈마리의 발걸음이 한 번, 두 번 비틀렸다.

“내가······ 할 수 있어.”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손끝의 푸른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회의실 탁자에 그녀를 앉혔다. 에리히가 뒤따라 들어왔다. 탁자 위에는 한도영이 저녁에 펼쳐둔 지도들이 그대로 있었다. 역병 발병 지점을 표시한 삼각측량도와 용병 계약 문양을 옮겨 그린 수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의무병이 도착하여 로즈마리의 맥박을 짚었다. 에리히가 탁자 가장자리에 손을 짚고 섰다.

“크세니아가 배신한 이유를 아는가.”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혈서 문양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배신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는 내 계약 분석을 자신의 약지에 적용하려 했다. 역벡터. 그게 목적이었다.”

“약지?”

“십 년 전, 계약 위반으로 소멸한 부위다. 그런데 오늘 밤, 그 자리에서 열을 느꼈다. 계약 후 처음이라고 했다.”

“소멸한 신체 부위가 반응했다······.”

“역벡터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의무병이 로즈마리의 어깨에 담요를 둘렀다. 로즈마리가 담요를 움켜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직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마법을 썼어요.”

로즈마리가 조용히 말했다.

“두 번이나.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왔어요.”

에리히가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마법 훈련을 받아야 하네. 내가 아는 인맥이 있다. 영지 밖이지만······.”

“싫어요.”

로즈마리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지친 몸과 달리 대답에는 빈틈이 없었다.

“마법사가 되는 게 두려운가.”

“어머니처럼 되는 게 두려운 거예요.”

촛불이 흔들렸다. 로즈마리의 얼굴에 주근깨가 짙게 드리웠다.

“나는 마법을 통제할 거예요······ 내 방식대로. 내가 선택해서 쓰는 마법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요.”

에리히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경비 책임자에게 몸을 돌렸다.

“성내 모든 초소에 경계령을 내린다. 크세니아 발렌타인의 신병을 확보하라고 전달해. 단, 저항하지 않으면 무력 사용은 금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리히가 탁자 위의 혈서 문양 스케치를 내려다보았다. “영지 내부 조사를 시작한다. 크세니아와 접촉한 자, 그녀의 지시를 받은 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계약 문서를 통한 정보 유출 경로도 확인하라.”

경비 책임자가 물러났다. 의무병도 로즈마리에게 약초 차를 건네고 퇴실했다. 회의실에는 세 사람만 남았다.

한도영이 수첩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붓펜을 들어 천천히 적기 시작했다.

'혈서의 문양 — 소멸 부위의 혈액이 마법을 무효화함. 계약의 대가 자체가 계약 시스템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전환 가능. 계약 주체가 개인에서 집단으로 변경될 경우, 소멸의 방향이 분산되는가?'

붓펜을 멈추고 탁자 위의 작은 양피지 조각을 집어 들었다. 빙벽이 부서질 때 얼음 파편에 묻어 떨어진, 크세니아의 핏방울이 번진 혈서의 귀퉁이였다. 불빛에 비추자 희미한 선들이 떠올랐다. 혈흔이 마르면서 점과 선의 배열, 교차각 등 일정한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삼각측량과 동일한 기호 체계였다.

한도영이 재빨리 지도함에서 측량 기록을 꺼냈다. 토벤 마을에서 작성한 원본 지도였다. 발병 지점과 우물 좌표가 표시된 문서. 양피지 조각을 지도 옆에 나란히 놓자 패턴이 겹쳐졌다. 혈서 조각의 좌표는 변경백령 북동쪽 경계선 바깥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문의 협곡······.”

한도영이 낮게 읊조렸다. 로즈마리가 몸을 일으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 지점을 짚었다.

“거긴 아무것도 없는 곳이야. 사람이 살지 않는······.”

에리히가 지도를 확인했다.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다. 하나 있다. 옛 감시탑.”

촛불 아래서 혈서 조각의 문양이 다시 한 번 희미하게 빛났다. 푸른빛도, 붉은빛도 아닌 무채색의 잔광이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변경백의 계산서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