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17화

촛불이 다 타고 창밖은 회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도영은 수첩을 덮지 않은 채 집무실 탁자에 엎드려 잠깐 눈을 붙였다. 어깨에 걸친 담요가 미끄러졌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파스칼이었다. 품에 낡은 양피지 묶음을 안고 있었다. 눈가가 붉었다.

“들어와.”

파스칼이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양피지 묶음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밤새 정리한 겁니까.”

“네……. 어머니랑 아버지……. 그때 마을에서 기록한 겁니다.”

한도영은 수첩의 혈서 문양 스케치를 옆으로 밀고 양피지를 펼쳤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다. 글씨는 투박했지만 정리된 필체였다. 발병일, 증상, 사망일이 날짜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걸 여태 갖고 있었나.”

파스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바닥에 박혔다.

한도영은 지도함에서 토벤 마을 식수원 지도를 꺼냈다. 발병 지점과 우물 좌표, 개울물 경로가 표시된 지도였다. 탁자 위에 나란히 펼쳤다.

파스칼의 기록에서 첫 발병 지점은 마을 북쪽 우물 근처였다. 한도영이 토벤 마을 지도에서 같은 지점을 짚었다. 손가락이 멈췄다. 우물에서 시작된 발병이 개울을 따라 아래쪽으로 확산된 패턴. 두 지도에서 방사형 확산의 중심 좌표가 일치했다.

“북쪽 우물. 둘 다 같은 지점이다.”

한도영이 붓펜을 들어 수첩에 좌표를 옮겨 적었다. 지도 위에 숯연필로 가볍게 원을 그렸다.

“수로 상류의 동일 지점. 6년 전 네 부모님 마을, 그리고 지금 토벤 마을. 발병 패턴이 같다.”

파스칼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럼…… 우연이 아니라는 거죠.”

“자연 발생 확률은 0에 가깝다. 수로를 따라 확산되는 패턴, 동일한 잠복기, 동일한 증상. 누군가 상류에 병원체를 풀었다는 증거다.”

파스칼의 손이 떨렸다. 양피지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말해도 됩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도영의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파스칼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푸른 빛이었습니다.”

파스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밤이었는데…… 하늘 절반이 파랗게 변했어요. 빛이 아니라…… 안개 같은 거였죠. 냄새도 없고 소리도 없고 그냥…….”

파스칼이 자기 팔을 감싸 쥐었다.

“이튿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얼굴에 붉은 점이 생기고 열이 나고…….”

“붉은 점이 어디서 시작됐나.”

“팔 안쪽이요. 그리고 가슴으로 번졌어요.”

토벤 마을 환자들과 동일한 증상이었다. 한도영이 붓펜을 내려놓았다.

“사흘 만에 사망했다.”

파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떨렸다.

“아버지가 저를…… 마을 바깥으로 밀어내셨어요.”

파스칼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손이 제멋대로 허공을 더듬다가 테이블 모서리를 잡았다.

“크로이츠였습니다. 그 마을…… 크로이츠 변경백령 경계 안쪽이었어요. 푸른 빛이 번진 곳이…… 변경백령 쪽으로 흘러왔어요.”

한도영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조문의 협곡 방향이었다. 혈서 조각에 찍힌 좌표와도 겹치는 방향이었다.

“네 부모님 마을과 현재 토벤 마을. 둘 다 같은 변경백령 수계 상류다. 푸른 빛이 보이고 사흘 만에 발병했다.”

한도영이 일어서서 지도 위에 두 지점을 숯연필로 연결했다. 선이 개울을 따라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푸른 빛의 정체를 알고 있나.”

파스칼이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붉어지고 있었다.

“……마법이라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실패한 실험이라고. 크로이츠 변경백이…… 마법사를 고용해서 무언가 한다고…….”

파스칼의 목소리가 떨리다 끊겼다.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목울대가 몇 번 오르내렸다.

“그 빛 때문에…… 부모님이…….”

파스칼이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로 물기가 번졌다.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숨이 짧게 끊겼다 이어졌다.

“……6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눈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파스칼의 어깨가 작게 경련했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한도영이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회색 빛 하늘 아래 성벽 너머 안개가 엷게 깔려 있었다. 등 뒤에서 파스칼의 숨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네 증언으로 확정됐다. 이 역병은 자연 발생이 아니다.”

한도영은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변경백령의 수로 상류에 병원체를 살포했다. 6년 전 크로이츠 경계에서 시작해 이번에는 토벤 마을이다. 동일한 수법, 동일한 경로, 동일한 증상.”

파스칼이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럼…….”

“네 부모님은 살인당한 거다. 마법 실험의 부산물에 희생됐다. 그리고 지금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파스칼이 탁자에 엎드렸다.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목이 메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아무도…….”

한도영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탁자로 걸어가 파스칼 옆에 섰다. 어깨에 손을 얹지는 않았다. 그냥 곁에 서서 파스칼의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네가 유일한 목격자다.”

파스칼이 젖은 얼굴을 들었다. 충혈된 눈이 한도영을 올려다보았다.

“이걸 기록한다. 네 부모님 마을의 첫 발병일, 증상 패턴, 푸른 빛의 목격 위치 전부. 공식 증언으로 남길 거다.”

한도영이 붓펜을 들었다. 수첩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준비됐나.”

파스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 묶음을 한도영 쪽으로 밀었다. 손등에 맺힌 눈물이 양피지 위로 떨어져 번졌다.

한도영은 붓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 회색 빛이 탁자 위 지도들을 천천히 밝혔다. 두 개의 발병 지점, 하나의 수로, 6년의 간격. 그리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붉은 선이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기록을 마친 한도영이 수첩을 덮어 품에 넣고 파스칼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에리히와 로즈마리에게 직접 전달해야 한다.” 파스칼이 젖은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회의실에서 에리히는 이미 지도를 펼쳐놓고 있었다. 한도영이 들어서며 파스칼을 옆으로 들였다. 로즈마리는 탁자 반대편에 서서 작은 약초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파스칼이 멈칫했다. 로즈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파스칼, 괜찮아?”

파스칼이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이 작업복 옆구리에 묻은 흙먼지를 쓸었다.

“네, 아…… 괜찮습니다.”

에리히가 지도 위에서 손을 뗐다.

“상황을 듣겠다.”

한도영이 측량도를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삼각측량으로 표시한 발병 지점들이 붉은 잉크로 이어져 있었다.

“파스칼이 확인한 내용과 합치합니다. 6년 전 크로이츠 변경백령 경계 쪽 마을에서 동일한 증상, 동일한 발병 패턴이 있었습니다.”

파스칼이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입을 열었다.

“저희 부모님께서…… 같은 증상으로 돌아가셨어요. 열이 밤마다 심해졌다가 낮에는 좀 가라앉는, 그런…….”

에리히가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6년 전 변경백령 내 같은 증상의 기록은 없다. 누가 조사했지?”

파스칼이 말꼬리를 흐렸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치며 답했다.

“기록을 누군가 지웠습니다. 파스칼이 당시 목격한 푸른 빛과 현재 토벤 마을 발병 사이의 연관성은 명확합니다. 우물물을 매개로 한 인위적 확산. 자연적 역병의 계절성이나 잠복기 패턴과 맞지 않습니다.”

로즈마리의 손이 약초 주머니에서 멈췄다.

“인위적이라면…… 누군가 일부러 퍼뜨렸다는 거야?”

한도영이 지도를 짚었다.

“발병 지점 세 곳을 연결하면 정삼각형입니다. 좌표 체계를 가진 계획적 살포입니다. 외부 세력이 변경백령을 겨냥한 겁니다.”

에리히의 턱 근육이 굳었다. 몇 초간 지도만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증거는.”

“지난밤 확보한 혈서 조각의 좌표 체계와 동일한 기하학 구조입니다. 계약 문양과 역병 살포 지점이 같은 좌표를 공유합니다.”

에리히의 왼쪽 뺨 칼자국이 붉게 달아올랐다. 벽난로에 마지막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만 잠시 이어졌다.

“좋다.”

에리히가 지도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폈다.

“영지 전역에 방역령을 발동한다. 마을 간 모든 이동을 통제하고, 발열 증상자는 즉시 격리한다. 토벤 마을과 동부 농경지 사이 길목에 감시 초소를 증원하라.”

파스칼의 어깨가 떨렸다. 에리히가 그에게 몸을 돌렸다.

“네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지금부터 너는 영지의 핵심 증인이다. 보호 병력을 붙이겠다.”

“……감사합니다.”

파스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물이 맺히지는 않았지만 오른쪽 귀가 붉어졌다.

로즈마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별 구호 물자 재분배는 내가 맡을게. 식량과 약초 모두 격리 구역부터 배정해야 하니까.”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이며 양피지에 서명했다. 붓을 내려놓을 때까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도영이 방역령 문구를 한 번 더 훑었다. 그 순간 왼팔에서 오른쪽 가슴 중앙을 가로지르는 문신이 냉기를 뿜었다. 작은 얼음 조각이 피부 아래를 긁는 듯한 감각이었다. 한도영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로즈마리의 시선이 한도영의 왼쪽 셔츠 소매에 꽂혔다.

회의가 끝나자 에리히가 파스칼을 데리고 먼저 나갔다. 방역령 문서를 집무실로 옮겨야 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로즈마리가 한도영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

복도로 나서자마자 로즈마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오전 햇살이 복도 창을 통해 돌바닥에 비스듬히 깔렸다.

“아까 회의 중에…… 문신. 움직였지.”

한도영이 걸음을 멈췄다. 로즈마리의 호박색 눈동자가 한도영의 소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추운 감각이야. 나도 느꼈어.”

그녀가 자신의 오른손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에 희미한 푸른 빛이 스쳤다. 아직 누군가 알아볼 수준은 아니었다.

“확장 속도가 빨라졌어. 일주일도 안 돼서…….”

“알고 있다.”

한도영이 소매를 약간 걷었다. 왼쪽 손목을 따라 가슴 쪽으로 뻗은 문신의 선들이 어제보다 더 선명해져 있었다. 붉은 발적이 문양 주변을 따라 팔꿈치 위까지 번져 있었다.

로즈마리의 숨이 짧게 끊겼다. 손을 내밀었다가 멈칫했다.

“만져도 될까?”

한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마리의 손가락이 문신에 닿았다. 마른 약초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닿는 순간 로즈마리의 손끝 푸른 빛이 한 번 깜빡였다.

“이 느낌…….”

그녀가 손을 떼며 손끝을 문질렀다. 손가락마다 냉기가 맺혀 있었다.

“어머니랑 같아. 마지막 날, 어머니 손에서 나던…….”

로즈마리가 말을 멈췄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숨을 내쉬었다.

“무서워. 이게 점점 커지면…….”

“그 재능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한도영이 소매를 내리고 그녀의 시선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마법을 통제하지 못했다. 하지만 너는 다르다. 이미 문신의 좌표와 공명하는 걸 감지할 수 있잖아. 그건 제어 가능한 감각이다.”

로즈마리가 손끝을 말아쥐었다. 푸른 빛이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방역에 쓸 수 있을까. 이 감각으로 뭔가.”

“가능성은 있다.”

한도영이 한 발짝 물러서며 복도 끝을 가리켰다. 구호 물자를 정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로즈마리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동안 손끝의 푸른 빛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밤.

한도영은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탁자 위에는 아침에 펼쳐둔 수첩과 역병 발병 지점 지도 사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촛불을 새 것으로 갈아 끼우고 붓펜을 집었다.

수첩의 빈 페이지 위에 왼쪽 팔뚝부터 가슴까지 퍼진 문신의 패턴을 축소해 그렸다. 60도 교차각으로 갈라진 격자 구조, 원형 노드에서 뻗은 곡선들, 중심선을 기준으로 대칭을 이루는 노드의 간격. 그리고 그 옆에 토벤 마을 측량도에서 추출한 발병 지점 좌표를 동일한 축척으로 옮겼다.

두 패턴을 나란히 두자 선들이 맞물렸다.

한도영이 촛불을 가까이 당겼다. 교차점 패턴과 발병 지점 좌표는 같은 원점에서 갈라진 동일한 격자 구조였다. 우물 세 곳의 좌표와 문신의 오른쪽 가슴 노드가 60도 각도를 유지하며 하나의 닫힌 삼각형을 구성했다.

한도영이 붓펜을 들어 수첩 아래에 적었다.

‘역병 살포 좌표와 소환 계약의 편입 좌표는 동일한 근원에서 파생되었다. 계약이 이 세계의 좌표계에 나를 편입하는 장치라면, 역병은 같은 좌표계를 이용한 공격이다. 좌표계 자체를 해체……’

붓펜이 멈췄다. 문신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한도영이 왼쪽 소매를 재빨리 걷었다. 문신의 중심선에서 흘러나온 푸른 빛이 역병 지도 위를 더듬듯 스쳤다. 그리고 지도 우측 상단, 변경백령 북동쪽 경계선 너머의 한 지점에서 빛이 멎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이었다.

푸른 빛이 짧은 섬광으로 변했다. 문신의 선들이 오른쪽 어깨 방향으로 밀리며 목 뒤까지 타고 올라갔다. 차가운 통증은 없었다. 다만 왼쪽 팔뚝의 격자 구조 속에 있던 한 노드가 파열음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선분이 어깨 너머로 3밀리미터쯤 연장되었다.

촛불이 한 번 흔들리더니 다시 고요해졌다.

한도영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수첩의 마지막 문장을 지우고 새로 적었다.

‘좌표계 해체 불가. 대신 외부 가해자를 식별하는 경로로 전환 가능하다. 크로이츠 변경백령.’

붓펜을 내려놓고 지도 사본을 접어 수첩 사이에 끼웠다. 문신의 푸른 잔광은 여전히 오른쪽 어깨 언저리에서 숨 쉬듯 깜박이고 있었다.

변경백의 계산서1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