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18화
아침 햇살이 채 다 들어오기 전, 집무실 문이 열렸다.
에리히의 책상 위에는 방역령 보고서와 파스칼의 증언 기록이 쌓여 있었다. 한도영은 창가 쪽에 서서 수첩을 넘기고 있었다. 왼쪽 어깨 너머로 번진 문신의 잔광이 셔츠 아래에서 희미하게 깜박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게.”
에리히의 목소리는 짧았다. 문이 열리자 전령이 먼지 묻은 망토 차림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봉인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양손으로 받쳐 올렸다.
“올리비에 드 베르니에 후작님의 서한입니다. 급히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봉랍에는 후작의 매 문양 인장이 선명했다. 에리히가 손을 내밀었다. 두루마리를 받아드는 손가락이 살짝 굳었다. 그는 인장을 떼고 양피지를 펼쳤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에리히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서한은 세 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첫째, 3년 전 왕실에서 변경백령에 지급한 가뭄 구호 지원금 은화 3천 닢이 영지 개선에 쓰이지 않고 아렌트 가문의 대륙 상인 조합 채무 상환에 유용되었다는 사실. 둘째, 그 결과 영지의 농업 생산량이 3년 연속 감소하여 변경백령이 더 이상 자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 셋째, 외부 귀족 연합이 제안하는 공동 관리안.
에리히가 양피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전부 사실이다.”
한도영이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시선이 문장들을 빠르게 훑었다. 공동 관리안의 조항 중 하나가 눈에 걸렸다. '질서 유지를 위한 연합군 주둔.'
한도영이 양피지를 접지 않고 탁자 위에 다시 펼쳤다.
“군사 개입의 명분입니다. 과거의 실책을 조목조목 나열한 건 법적 빌미를 쌓는 거죠.”
에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원금은…… 다 갚았다고 생각했네. 상인 조합에 원금만 돌려막기한 걸, 그땐 최선이라 믿었다.”
“그 기록을 후작이 들고 있습니다. 어디서 입수했는지가 관건이지만,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한도영이 펼쳐진 양피지의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공동 관리안에 병력을 동반한다는 조항입니다. 숫자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인 거죠.”
에리히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탁자 위의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전쟁을 원하는 건가.”
“명분을 쌓는 중입니다. 먼저 칼을 뽑지 않고도 병력을 배치할 근거를 만드는 거죠.”
문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노크도 없이.
땀에 젖은 얼굴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상인 길드 대표였다. 손에는 장부로 보이는 낡은 책이 들려 있었다.
“영주님! 환율이…….”
에리히가 손을 들었다.
“숨부터 고르게.”
대표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러나 말은 끊지 못했다.
“아침 장이 열리자마자 크로이츠 은화 환율이 열 배로 뛰었습니다. 우리 은화 한 닢이 그쪽 동화 세 닢도 못 받습니다. 상인들이 은화 결제를 거부하기 시작했어요. 곡물 가격은…….”
그가 장부를 펼쳤다. 숫자들이 빼곡했다.
“어제 저녁보다 세 배입니다. 지금도 오르고 있습니다.”
한도영이 곧장 수첩을 꺼냈다. 왼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숯연필을 잡았다.
“정확한 수치를 말씀해주십시오. 어제 저녁 기준 환율과 현재 환율. 그리고 곡물 가격 변동 폭.”
대표가 장부를 더듬었다.
“어제 저녁은 은화 한 닢에 동화 여섯 닢이었습니다. 지금은 은화 한 닢에 동화 두 닢 반…… 아, 방금 전에 두 닢으로 떨어졌다는 전언이 왔습니다.”
“곡물은.”
“보리 한 포대가 은화 스무 닢입니다. 사흘 전에는 여섯 닢이었습니다.”
한도영이 숫자들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환율 변동 폭을 계산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침 장이 열린 지 한 시간도 안 돼 환율이 75퍼센트 가까이 폭락했다. 자연적 변동으로는 불가능한 속도였다. 동시에 곡물 가격이 정확히 같은 타이밍에 폭등했다.
한도영이 수첩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인위적 조작 가능성.'
에리히가 탁자 위의 양피지와 대표의 장부를 번갈아 보았다. 한 손이 천천히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서한과 환율이…… 동시에.”
“우연이 아닙니다.”
한도영이 수첩을 접지 않은 채로 말했다.
“외부 연합이 두 개의 축으로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서한은 군사 개입의 법적 근거를 만들고, 환율 조작은 우리 경제를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거죠. 하나가 실패하면 다른 하나로 끝내겠다는 계산입니다.”
대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곡물을 더 살 수도 없고, 은화를 받아도 아무것도 못 합니다. 상인들도 곧 문을 닫을 겁니다.”
에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떨리던 손이 멈췄다. 대신 턱에 힘이 들어갔다.
“군사적 위협과 경제적 포위를 동시에…….”
그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양피지를 집어 반으로 접었다.
한도영은 수첩에 환율 수치를 더 적어 내려갔다. 열 배 폭등 후 추가 폭락. 곡물 세 배 상승 후 지속 상승세. 그리고 그 옆에 적었다.
'동시 타격 — 한쪽 축 무너지면 다른 축 진입. 환율선 먼저 막지 않으면 보급 붕괴.'
오전 늦게, 아렌트 성 임시 행정실.
한도영이 용병단 호위 재배치 명령서를 작성하자 행정관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크세니아 발렌타인이 이탈한 뒤로 분대장들 간 명령 계통이 맞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보고해야 하는지 정해지지 않아……”
“실질 지휘권은.”
“각 분대가 따로 움직입니다. 서면 명령을 내려도 집행 책임자가 없습니다.”
한도영이 붓펜을 내려놓았다. 수첩에 ‘명령 체계 재편 - 분대장 중 임시 지휘관 선임’이라고 적었다. 행정관 옆에서 대기하던 파스칼이 측량 지도 사본을 탁자 위에 폈다. 손끝이 지도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동부 농경지 쪽 옛 도로가…… 지도에는 없지만 실제 지형은 완만해서 수레가 다닐 수 있습니다.”
“마차 통행 가능한가.”
“세 군데 확인했습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파스칼이 지도에 숯으로 작은 원 세 개를 그렸다. 북쪽 경계 감시대를 우회해서 변경백령 서부 곡창 지대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한도영이 지도를 끌어당겨 숯 표시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기존 보급로보다 반나절 단축. 지형 경사는.”
“5도 미만입니다. 측량 막대로 재확인했습니다. 다만…….”
“말해.”
“용병단 호위 없이 수송할 수 있을지…….”
파스칼의 목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로즈마리가 약초 주머니를 허리에서 풀며 나섰다.
“물자 분배는 내가 조직할게. 마을별로 한 사람씩 책임자 뽑아서 배분 순서 정하면…… 혼란은 줄일 수 있어. 필요한 건 명단과 분배 기준.”
“인원은.”
“열 명. 구호소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 위주로.”
한도영이 수첩을 넘겼다. 방금 전에 적은 ‘명령 체계 재편’ 아래에 ‘로즈마리 - 물자 분배 봉사 조직 승인’을 추가했다. 파스칼이 우회로 후보를 표시한 지도를 행정관에게 건넸다.
“지도 사본 한 장 더 떠서 영주님께 전달해.”
“알겠습니다.”
행정관이 지도를 들고 나갔다.
로즈마리가 걸음을 옮기다 멈추고 한도영을 돌아봤다.
“환율 건은…….”
“아직.”
짧은 대답에 로즈마리가 입술을 다물었다. 파스칼은 지도 원본을 조심히 말아서 가슴에 안았다.
“그럼 저는 우회로 현장 확인을…… 낮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파스칼이 문 쪽으로 물러나다 인사를 하고 나갔다. 로즈마리도 약초 주머니를 다시 허리에 차며 문을 향했다. 문간에 선 그녀가 다시 한 번 입을 열려다, 한도영이 이미 수첩으로 시선을 내린 것을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행정실에 한도영 혼자 남았다.
오후. 창으로 기운 햇살이 탁자 위 지도 사본 한 장에 닿았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쳐 앞 장에 그려둔 혈서 계약 문양을 손끝으로 짚었다.
중심선. 60도 교차각의 격자. 노드에서 뻗은 곡선.
그 옆에 크세니아의 용병 계약서에서 옮겨 그린 문양을 나란히 두었다. 저주 발동 시 소멸한 노드의 패턴은 혈서의 좌표 구조와 동일했다. 교차점 간격. 노드의 배치 밀도. 중심선에서 분기하는 각도——모든 수치가 일치했다.
수첩에 새로 한 줄을 그었다. 혈서 계약의 중심 노드 하나를 원으로 감싸고, 거기서 짧은 선을 오른쪽으로 뺐다. 선 끝에 ‘소멸한 약지’라고 적었다.
크세니아가 계약 위반 대가로 잃은 것은 단순한 신체 부위가 아니다. 계약의 구속력이 물질계에 직접 각인된 흔적이었다. 노드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흉터——그게 바로 계약의 본체에 닿을 수 있는 접촉 지점이다.
왼쪽 팔뚝에서 푸른 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도영이 소매를 걷었다. 문신의 격자 선들이 숨 쉬듯 깜박였다. 약 2초. 빛이 사그라들었다.
수첩의 도식 아래에 덧붙였다.
‘소멸한 약지 = 계약의 물질계 각인 단절 지점. 역벡터 적용 시 유일한 진입 경로.’
붓펜을 내려놓고 지도와 수첩을 포개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아렌트 성 에리히 집무실.
에리히가 책상 위에 양피지 한 장을 꺼내 올렸다. 작성은 이미 되어 있었다. 서명란만 비어 있었다.
“작위 반납서다.”
한도영은 앉지도 않고 책상 앞에 섰다.
“3년 전 발렌 가문에서 건넨 지원금…… 내가 개인 채권인 걸 알면서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했으면 부채가 확정되니까. 그 비겁함 때문에 지금 영민들이 굶고 있다.”
“그 책임을 지금 지는 방식이 영민을 버리는 겁니다.”
“외부 관리단에 넘기면 최소한의 구호 물자는 들어올 거다. 내가 놓는 게 가장 빨라.”
“누구 말입니까.”
에리히의 손이 작위 반납서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올리비에 후작의 서한…… 변경백령 자치권을 문제 삼으면서 작위 반납을 우회적으로 요구했다. 거부할 명분이 없어.”
“있습니다.”
한도영이 수첩을 폈다. 환율 데이터를 적은 페이지를 책상 위로 밀었다.
“인접국 세 곳의 은화 환율이 동시에 폭등했습니다. 자연적 변동 폭이 아닙니다. 누군가 변경백령 은화를 시장에 대량으로 풀어서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뜻.”
에리히가 페이지를 내려다봤다.
“그걸로 뭘 어쩌겠단 건가.”
“환율을 역이용합니다. 지금 은화 가치가 폭락한 건 이쪽만이 아닙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도 은화를 쓰고 있죠. 곡물을 은화로 결제하는 경로를 일시 차단하고, 대신 물물교환 기준을 재설정합니다. 파스칼이 찾은 우회 보급로로 실물을 이동시키면서 환율이 더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면…….”
“외부 상인들이 은화를 기피할수록 이쪽 실물 곡물의 가치는 올라갑니다. 그때 역으로 은화를 매입해 환율을 끌어올리는 거죠.”
에리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패하면.”
“영민들은 지금보다 더 굶지 않습니다. 이미 바닥입니다.”
에리히가 작위 반납서를 책상 구석으로 밀었다. 손가락이 양피지에서 떨어졌다. 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마지막 기회다. 더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회랑에 발소리가 멎었다. 로즈마리가 차 쟁반을 든 채 집무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가 새어 나왔다.
에리히가 작위 반납서를 서랍 속으로 밀어 넣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한도영의 목소리.
“수첩에 정리한 환율 대응 초안을 내일 아침 보고드리겠습니다.”
“기다리지.”
로즈마리가 쟁반을 가슴 앞으로 당겼다. 차 향이 깃든 김을 잠시 내려다보고는 발소리를 죽여 회랑 반대쪽으로 물러났다.
복도 창 너머로 붉은 석양이 성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늦은 밤. 한도영의 방.
촛불 하나가 탁자 위에서 타고 있었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쳐 환율 교란 전략의 세부 단계를 적어 내려갔다.
‘1단계: 영지 내 은화 곡물 결제 중단. 물물교환 기준표 배포. 2단계: 우회 보급로 확보 후 실물 곡물 비축량 측정. 3단계: 외부 상인의 은화 기피 심화 시점에서 역매입——’
왼팔 문신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타는 듯한 통증이 팔 전체를 짓눌렀다.
한도영이 왼쪽 소매를 재빨리 걷었다. 문신의 푸른 빛이 촛불보다 밝았다. 격자 선들이 중심선을 따라 위로 치솟더니 가슴 중앙에서 명치 아래까지 한 뼘 더 내려갔다.
새로 퍼진 경계선이 붉게 달아올랐다. 통증이 숨을 짧게 끊었다.
계약 기한이 3일 이내로 수축됐다. 어쩌면 24시간.
식은땀이 턱 끝에서 떨어졌다. 한도영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붓펜을 다시 집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첩의 전략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시간 부족. 24시간 가정으로 계획 압축.’
문신의 푸른 잔광이 명치 아래에서 깜박이며 밤 내내 꺼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