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19화

사흘째 아침, 집무실 창밖은 납빛 구름에 갇혔다.

한도영은 문신 번진 왼팔을 책상 아래로 내린 채 파스칼에게서 서면을 건네받았다. 북부 감시대 보고서였다. 봉납을 뜯자 거친 필체가 세 줄로 상황을 요약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 정규군 약 200, 북쪽 경계 10리 지점에 진주. 크세니아 용병단 잔류 부대와 합류 조짐 없음.”

보고서를 탁자 위에 펼쳤다.

“200명 확실한가.”

“감시대장이... 직접 세었다고 합니다.”

파스칼의 시선이 한도영 왼팔로 번졌다. 소매 위로 올라온 문신의 푸른 선이 셔츠 깃 안쪽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한도영은 그 눈길을 무시하고 서면을 다시 들여다봤다. 수첩을 꺼내 이전에 적어둔 환율 전략 초안 옆에 '북부 경계 200명'이라고 기입했다.

오른손이 붓펜을 쥐는 순간, 왼팔 전체로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문신의 격자선이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단번에 번지며 촛불조차 누렇게 바랜 청색 섬광을 내뿜었다.

숨을 짧게 들이켰다. 붓펜을 탁자에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문신은 이미 위팔 중간을 넘어 어깨 관절까지 도달해 있었다. 피부 아래 선들이 가슴 중앙을 지나 명치 아래로 향하고 있다.

“괜찮으십니까.”

“계속해.”

파스칼이 손톱으로 자기 손바닥을 꾹 눌렀다. 목소리가 가늘어졌다.

“성 내 경비병들 배급도 오늘 아침부터 중단됐습니다. 곡물 창고에... 이제 사흘치도 안 남았다고 합니다.”

한도영은 잠시 파스칼을 바라봤다. 광대뼈가 평소보다 도드라져 있었다. 성에 배급이 끊긴 지 이미 이틀째다. 손가락으로 수첩의 환율 계산란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사흘치 곡물에 북부 연합군 200명.”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기사 특유의 긴 보폭.

에리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고 있는 것은 양피지 한 장. 너비가 보통 서류의 두 배 가까운, 작위 문장이 상단에 찍힌 공식 양식이었다. 에리히는 집무실 탁자 앞에 멈춰 서서 한도영과 파스칼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있어야 할 자리군.”

양피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작위 반납서다. 위원회 제출용.”

파스칼의 어깨가 움찔 올라갔다. 탁자 위 문서를 보다가 에리히를 보다가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입술이 달싹였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도영은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반납서 하단은 아직 비어 있었다. 서명란. 에리히의 이름이 적히지 않은 공백.

“이유를 묻겠습니다.”

에리히가 푸른 눈으로 한도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지친 눈동자였으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3년 전 왕실 지원금. 은화 3천 닢. 서류에는 가뭄 구호용으로 기재되었다.”

파스칼이 고개를 들었다. 에리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실제로는 발렌 가문에 대한 부채 상환에 썼다. 영지 금고는 이미 비어 있었고, 지원금 없이는 이자조차 막을 수 없었다.”

탁자 위로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파스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뒤로 반 걸음 물러섰다. 목소리가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갈라졌다.

“그러면... 그때 돌아가신 분들은...”

에리히는 침묵했다. 파스칼은 한 걸음 더 물러서다 몸을 돌려 문을 향했다. 걷는 속도가 차츰 빨라졌다. 복도로 나가는 발소리가 뛰는 소리로 바뀌었다.

문이 닫혔다.

한도영은 에리히의 손이 양피지 가장자리를 잡은 채 멈춘 것을 보았다. 손가락 관절이 하얘졌다가 풀렸다. 에리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봄에 영민 280명이 아사했다. 곡물 비축량의 40퍼센트를 부채 상환으로 돌린 직후였다.”

“알고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장부에서요. 3년 전 봄 곡물 입고량과 배급 기록의 차이. 40퍼센트가 사라졌더군요. 파스칼의 부모님이 그해 돌아가셨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에리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잠시 후 펜을 집었다.

“서명하겠다. 북부 연합군은 200명이지만 이 성의 전투 병력은 40명이다. 영토권 분쟁으로 전쟁이라도 나면 이번엔 280명이 아니라 수천이다.”

한도영이 반납서 위로 손을 올렸다. 펜을 잡은 에리히의 손목을 누르진 않았다. 문서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반납서 옆 탁자 면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책임을 지금 지는 방식은 영민을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는 게 아니다. 내려놓는 거다.”

“결과는 같습니다. 이 문서에 서명하면 변경백령은 외부 관리 구역이 되고, 영민들의 배급·방역·방어는 후작이 임명한 관리자의 손에 달립니다. 그 관리자가 영민들을 위해 곡물을 풀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리히가 펜을 든 손을 멈췄다. 한도영은 왼팔의 통증을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200명에게 지지 않을 방법은 있습니다. 군사력 말고요.”

에리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쳐 방금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 '북부 경계 200명' 옆에 '환율 역이용 전략 2단계로 압축'이라고 쓰여 있었다.

“시간이 걸리느냐.”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실물 곡물 비축량만 확인되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에리히는 3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펜을 내려놓았다. 반납서는 탁자 위에 그대로였다. 서명란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정오의 햇살이 창을 통해 집무실 바닥을 가로질렀다.

한도영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수첩을 펼쳤다. 왼팔 문신은 셔츠 소매 아래서 은은한 푸른 빛을 새고 있었다. 통증이 맥박에 맞춰 울렸다.

책상 위 작위 반납 문서가 펼쳐진 채 놓여 있었다. 에리히가 서랍에서 꺼낸 그대로였다. 잉크병 옆에는 빈 잔이 하나.

수첩을 넘겼다. 환율 교란 전략 초안, 보급선 재배치 도식, 역병 확산 경로 좌표. 페이지마다 숫자와 선으로 빼곡했다.

마지막 장을 펼쳤다. 빈 여백에 붓펜을 댔다.

‘계약 문신 확장 속도: 24시간당 약 8cm. 현재 목 아래까지 도달. 이 추세 유지 시——’

잠시 멈췄다. 펜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소멸까지 40시간 추정.’

쓰고 나서 붓펜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에서 힘이 빠졌다.

창밖에서는 원로회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저 깃발 아래서 한도영이 설계한 관개 수로 공사가 멈춰 있었고, 그가 찾아낸 우회 보급로는 군사적 위협 앞에서 길을 잃었다.

측량도 환율도 보급선도, 3천 명의 연합군 앞에서는 계산 실수에 불과했다.

문신의 통증이 갑자기 아래로 번졌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무릎을 지나 발목까지. 한도영이 숨을 들이켰다.

오른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무릎이 꺾였다. 의자에 주저앉으며 수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표지가 젖혀진 채 펼쳐졌다.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문신의 격자선이 팔꿈치 안쪽에서부터 발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푸른 빛이 정맥을 따라 희미하게 깜박였다. 새로 확장된 선분들도 60도 교차각을 정확히 유지했다.

숨을 고르며 수첩을 집어 올렸다.

오후 늦게, 문이 열렸다.

로즈마리가 들어왔다. 어깨에 먼지가 앉아 있었다. 마을 방역 보고를 마치고 바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이 책상 위 작위 반납 문서에 닿았다.

잠시 멈칫하더니 한도영에게로 걸어왔다.

“팔.”

한도영이 천천히 왼쪽 소매를 걷었다. 문신은 이미 손목에서 어깨를 지나 셔츠 깃 아래로 번져 있었다. 푸른 빛이 방 안의 햇살보다 선명했다.

로즈마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었다.

한도영의 왼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당신이 옳았다는 걸 증명할 마지막 방법이 있다면.”

로즈마리가 숨을 들이켰다.

“함께하겠다.”

한도영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이 차가웠다.

“방법을 찾기 전에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이미 잃을 게 뭐가 더 있어.”

로즈마리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한도영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영민들은 바닥이고, 영주는 작위를 내려놓으려 하고, 당신은 사라지기 직전이잖아.”

한도영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로즈마리의 이마에 닿았다. 그녀의 피부는 따뜻했다.

문신의 푸른 빛이 한 차례 깜박이더니 한결 희미해졌다. 타는 듯한 통증이 잦아들고 둔한 저림이 그 자리를 채웠다.

로즈마리의 손끝에서 미약한 온기가 번졌다. 마법이라고 부를 만큼 뚜렷하지는 않았다. 닫힌 창문 앞에서 잠시 스친 바람 같은, 그런 정도의 온기였다.

“마을은.”

한도영이 이마를 뗐다.

“방역은 유지되고 있어. 네 명이 더 발열 증상을 보였지만 새 확산은 없었어.”

로즈마리가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저 문서는.”

“영주님이 아직 서명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유효한 거다.”

“그 전에 뒤집을 수 있어?”

“해야 한다.”

한도영이 수첩을 꺼내 들었다. 페이지를 넘겨 환율 교란 전략이 적힌 부분을 펼쳤다.

“은화의 가치가 7분의 1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영지 내 통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접국 상인들도 같은 은화를 쓰고 있다——”

말을 멈췄다. 문신이 다시 한 번 깜박였다. 이번에는 통증 없이, 좌표 격자 위로 새로운 점 하나가 반짝였다.

한도영이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그 점은 북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로즈마리가 그의 팔을 살폈다.

“좌표가 반응하고 있다.”

한도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낮은 마찰음을 냈다.

“북쪽 경계다.”

밤이 되었다. 로즈마리는 방역 지침 최종 확인을 위해 행정실로 내려갔다.

한도영은 혼자 집무실에 남아 수첩과 측량 기록을 펼쳐 놓았다. 파스칼이 낮에 두고 간 우회 보급로 답사 기록이었다. 숫자와 약도가 빼곡했다.

촛불이 하나 타고 있었다. 밀랍이 받침 접시에 조금 고였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성문 쇠사슬이 풀리는 둔탁한 소리. 말발굽.

한도영이 고개를 들었다. 붓펜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성문 앞 회랑에 횃불이 줄지어 켜졌다. 기병 세 명이 성 안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두의 기병이 긴 깃대를 들고 있었다. 깃발에는 올리비에 후작의 인장이 수놓아져 있었다.

뒤이어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에리히의 시종이었다.

“전령이 최후통첩을 전달했습니다. 영주님께서 집무실로 올리라 하셨습니다.”

한도영이 문을 열었다. 시종의 손에 양피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붉은 밀랍 봉인이 찍혀 있었다.

“내가 받는다.”

시종이 망설였지만 한도영의 눈빛에 양피지를 건넸다.

문을 닫았다. 봉인을 뜯었다. 두꺼운 양피지에는 단 세 줄만 적혀 있었다.

‘에리히 아렌트 변경백의 즉각적인 작위 반납.

변경백령의 무조건적 성문 개방.

일출까지 회신 없을 시, 북부 경계에서 진군을 개시한다.’

하단에는 올리비에 후작의 인장과 함께 연합군 지휘관 세 명의 서명이 줄지어 있었다.

한도영은 통첩 문서를 책상 위에 올렸다. 작위 반납 문서 바로 옆에 나란히 놓였다. 두 장의 양피지가 촛불 아래서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첩을 집어 들었다. 파스칼의 측량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우회 보급로 후보 지점의 지형 경사도, 마차 통행 가능 폭——

손가락이 멈췄다.

북부 경계의 한 지점. 지도에는 완만한 구릉으로 표시된 곳이 측량 수치에서는 달랐다.

경사 23도. 마차 바퀴 폭 1.2미터 기준, 횡단면 기울기 15도 초과.

그 지형에서는 마차가 통행할 수 없다. 보급 마차는 물론이고 기병대의 대열 유지도 불가능한 급경사였다.

한도영이 수첩과 측량 기록을 나란히 놓고 숫자를 다시 한 번 따라갔다.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는 능선 하나가 연합군의 진군 경로와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은 능선이었다.

문신이 다시 깜박였다. 북쪽 경계 방향을 가리킨 점이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한도영이 수첩을 가슴께로 끌어올렸다. 왼팔 문신의 통증이 다시 올라왔다. 어깨에서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는 작열감.

숨을 한 번 짧게 들이켰다.

“계산서는 끝나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책상 위 양피지 두 장이 촛불에 일렁였다. 작위 반납서와 최후통첩.

그 사이에 수첩을 펼쳐 놓았다. 펼친 페이지에는 방금 확인한 23도 경사면의 측량 수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위로 문신의 푸른 빛이 깜박이며 북쪽 경계를 가리키고 있었다.

변경백의 계산서19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