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20화

한도영이 촛불을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 지하 보고실은 차갑고 축축했다. 책상 위엔 수첩, 측량 원부, 물류 기록부, 환전소 현황 맵이 포개져 있었다.

파스칼이 회계 장부 세 권을 추가로 내려놓았다. 표지가 해지고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됐다.

“지난 3년 치입니다.”

한도영이 고개를 끄덕이고 측량 원부를 펼쳤다. 파스칼이 기록한 북부 경계 지형 수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경사 23도, 횡단면 기울기 15도 초과. 마차 통행 불가.

그 위에 연합군 보급 마차 이동 경로를 그린 투명 양피지를 겹쳤다. 올리비에 후작의 군대가 선택한 보급로는 두 개. 하나는 북부 대로를 따라 직선으로 내려오는 주경로, 다른 하나는——

손가락이 멎었다.

우회로다. 지도에는 완만한 구릉이라고 적혀 있다. 측량 수치는 정반대였다.

“파스칼. 이 지점 측량은 언제 한 거지.”

“사흘 전입니다. 진군 소식 듣고 바로······.”

파스칼이 다가와 지도를 들여다봤다. 한도영이 우회로 구간을 손톱으로 긋자, 눈이 커졌다.

“이거, 지도랑 다른데요.”

“알고 있었다.”

한도영이 환전소 현황 맵을 끌어당겼다. 변경백령 내 은화 유통량, 인접 3개국 환율 변동표, 군 보급을 전담하는 길드의 어음 발행 기록을 차례로 펼쳤다.

원부의 법인세 미납 데이터를 맨 위에 올렸다. 연합군에 물자를 대는 상인 길드 일곱 곳 중 네 곳이 변경백령 은화로 세금을 납부했다.

그것도 최근 6개월간 집중적으로.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왼팔 문신이 다시 욱신댔다.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작열감에 잠시 눈을 감았다.

“괜찮으십니까.”

“시간이 없다. 집중해라.”

한도영이 수첩에 빠르게 필기했다. 문신의 좌표 체계——중심선에서 60도 교차각으로 갈라지는 격자——를 그린다. 그 옆에 측량 데이터의 발병 지점 삼각형을 겹쳤다. 두 도형은 동일한 기하학 구조를 공유한다.

계약 문신과 역병 살포 좌표가 같은 격자에서 파생됐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다. 이제 그 격자 위에 경제 데이터를 올릴 차례다.

은화 환율이 아침 장 개장 한 시간 만에 75% 폭락했다. 인위적 조작이다. 누군가 변경백령 은화를 대량으로 매도해 가치를 폭락시킨 거다.

목적은 분명했다. 영지 경제를 마비시켜 작위 반납 압박에 추가 타격을 가하는 것.

하지만 매도한 은화는 어디로 갔나.

한도영이 환전소 현황 맵을 들어 올렸다. 인접국 세 곳의 환전소 중 변경백령 은화를 취급하는 곳은 열두 곳. 그중 여섯 곳이 최근 매수량을 급증시켰다.

“알겠나.”

파스칼이 지도를 가까이 들여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숫자를 하나씩 짚는다.

“은화를, 많이 샀다는 건······ 누군가 싸게 사들였다는 거네요.”

“그렇다.”

매도와 매수가 동시에 일어났다. 폭락시킨 은화를 특정 환전소에서 집중적으로 매수한 것이다.

한도영이 회계 장부를 펼쳤다. 법인세 미납 데이터와 어음 발행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 연합군에 붙은 상인 길드가 변경백령 은화로 세금을 낸 시점과, 매수량이 급증한 시점이 일치한다.

“같은 놈들이다.”

파스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인 길드가······ 자기들이 쓸 은화를 미리 사두려고?”

“환율을 의도적으로 폭락시킨다. 폭락한 가격에 은화를 대량 매수한다. 그 은화로 변경백령 내 물자를 구매하거나 세금을 납부한다. 그러면 은화 가치는 더 떨어진다. 악순환이다.”

한도영이 수첩에 선을 그었다. 은화 유통량——매도 폭——매수 집중——세금 납부. 네 지점을 연결하자 하나의 순환 구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환의 중심에 변경백령이 있었다.

영지는 단순한 통과지가 아니었다. 은화가 유통되는 경로의 허브. 인접국 세 곳의 상인들이 변경백령 은화로 결제하고, 세금을 내고, 물자를 구매한다.

이 순환을 역이용할 수 있다면——

한도영이 지도를 들어 올렸다. 북부 경계의 급경사 능선.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이 지형은 연합군의 우회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주경로만 남는다. 200명의 군대와 사흘 치 식량. 보급 마차는 하루에 한 번 지나간다.

만약 은화 유통을 교란하면?

“파스칼. 군 상단이 변경백령 은화로 구매하는 주요 물자는 뭐지.”

“곡물과······ 마초입니다. 말 사료용 건초가 가장 많아요.”

한도영이 회계 장부의 물자 거래 기록을 펼쳤다. 최근 6개월간 군 보급 길드의 구매 목록이 줄지어 있었다.

건초, 귀리, 밀가루. 보급 마차 한 대분의 양이 일주일에 세 번씩 변경백령을 통과했다.

수첩에 빠르게 계산한다.

변경백령 내 은화 유통량을 의도적으로 증가시키면 은화 가치는 더 떨어진다. 그러면 상인 길드가 보유한 은화 구매력이 급감한다.

동시에 영지에서 건초와 귀리의 거래 기준을 은화에서 물물교환으로 전환한다. 상인 길드는 폭락한 은화로는 물자를 살 수 없다.

보급 마차가 텅 빈 채로 돌아간다. 이틀만 반복되면——

“200명의 말이 굶는다.”

파스칼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 진군을 멈추겠네요.”

“멈추는 게 아니다.” 한도영이 지도를 짚었다. “북부 경계에서 변경백령 성문까지. 기병 기준 반나절 거리다. 하지만 보급 마차가 끊기면 그 반나절을 버티지 못한다. 말이 쓰러지고, 군량이 바닥나고, 퇴각로는 급경사 능선에 막혀 있다.”

“함정이 되는 거네요.”

“지형이 만든 함정이다. 우린 그걸 이용할 뿐.”

한도영이 수첩의 빈 페이지를 펼쳤다. 문신이 다시 깜박였다. 푸른 빛이 지도 위 북부 경계를 비추고, 그 너머 연합군 진영을 가리켰다.

통증이 어깨에서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아프십니까.”

“계속해라.”

한도영이 수첩에 최종 계산을 기록했다.

은화 덤핑——상인 길드 구매력 붕괴——보급 마차 공백——진군 불가. 여기에 지형 차단까지 더해지면 연합군은 보급선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정면 돌파를 시도하다 말 손실을 입는다.

어느 쪽이든 하루 안에 진군이 멈춘다.

은화 덤핑과 보급선 차단을 연계해 하루 만에 연합군의 발을 묶는다는 구상이었다.

파스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 환율과 보급선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따라오지는 못한 표정이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뢰가 담긴 고개 끄덕임이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한도영이 지도를 접었다. 수첩을 가슴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돌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에리히 백작을 깨워라. 지금 바로.”

에리히의 서재에 아침 햇살이 창틀을 넘어 막 들어오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여전히 작위 반납서와 최후통첩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사이에 한도영의 수첩이 펼쳐져 있다.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들었다. 왼팔 문신이 옷소매 아래서 푸르게 깜박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백작님.”

에리히가 책상 너머에서 고개를 들었다. 눈 밑이 어두웠다. 밤새 잠들지 못한 얼굴이었다.

“반납서는 아직 유효하지 않습니다.”

“뭐라?”

한도영이 수첩의 한 페이지를 가리켰다. 북부 경계의 측량 수치가 적힌 곳이다.

“어젯밤 파스칼의 측량 기록에서 발견했습니다. 지도에는 없는 급경사 능선입니다. 연합군의 진군 경로와 정확히 직각으로 교차하죠. 마차 통행 불가. 기병대도 대열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파스칼이 한 걸음 다가섰다. 측량 기록일지를 가슴에 안은 채였다.

“경사 23도, 횡단면 기울기 15도를 넘어서…… 보급 마차는 확실히 못 지나가요.”

에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도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북부 경계를 짚었다.

“이 능선…… 지난주 정찰대가 보고한 지형과 다르군.”

“정찰대는 지도를 기준으로 삼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지도는 20년 전 측량 기준입니다. 폭우와 토사 붕괴로 지형이 바뀌었어요.”

한도영이 수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연합군은 이 능선을 우회해야 합니다. 최소 반나절. 보급 마차 포함 시 하루. 그 시간이면 가능합니다.”

“무엇이 가능하다는 거지.”

에리히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한도영이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환율 교란입니다. 백작님의 부채 문서를 무기로 쓰겠습니다.”

서재 안의 공기가 멎었다. 로즈마리가 벽 쪽에 서서 숨을 들이켰다.

에리히의 손이 책상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내 부채를…… 역이용하자고?”

“채권자들은 지금도 백작님의 부채를 담보로 은화를 굴리고 있을 겁니다. 그 신용을 역으로 때리는 거죠.”

한도영이 수첩을 한 장 넘겼다. 환율 도표와 함께 계산식이 빼곡했다.

“변경백령이 지금 당장 은화를 대규모로 방출한다고 선언합니다. 채권자들이 보유한 채권의 담보 가치가 폭락합니다. 연합군에 자금을 대는 상인 길드의 신용도 연쇄적으로 무너지죠.”

에리히가 천천히 책상 뒤로 물러났다. 손이 서랍 손잡이에 닿았다.

“그 문서는…… 3년 전 빚이다. 내 가문의 치욕이지.”

“가문의 영광은 살아 있는 영민이 증명합니다.”

한도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280명이 굶주려 죽은 건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항복하면 또 다른 2만 명이 죽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서 아침 바람이 성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리히가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냈다. 가장자리가 바래고 접힌 자국이 선명했다.

부채 상환 증서. 3년 전 날짜와 금액. 은화 2천 닢.

“가져가라.”

에리히가 양피지를 책상 위로 밀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아렌트 가문의 이름은 빚 문서 한 장에 있지 않다. 이 땅에 산다. 그걸 네 무기로 써라.”

한도영이 문서를 받아 수첩 옆에 펼쳐 놓았다. 왼팔 문신이 다시 깜박였다. 통증은 없었다. 푸른 빛이 옷소매를 뚫고 새어 나왔다.

로즈마리가 자리에서 움직였다.

“한도영 씨.”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호박색 눈이 단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상인 길드와의 접촉은 내가 할게.”

한도영이 그녀를 돌아봤다.

“위험하다. 길드 연합은——”

“내가 무력하지 않다는 건 너도 알잖아.”

로즈마리가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에 미약한 푸른 빛이 맺혔다. 스스로도 놀란 듯 눈을 깜박였지만, 손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 마법이…… 무서워. 어머니처럼 될까 봐.”

로즈마리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도 가야겠어. 너만 싸우게 할 순 없으니까.”

한도영이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수첩에서 페이지를 찢어 내렸다. 환율 조작 예산과 거래 조건을 적은 쪽지다.

“이 금액과 조건을 지켜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로즈마리가 쪽지를 받아 품에 넣었다.

“알겠어.”

에리히가 서류 뭉치에서 승인 문서 하나를 꺼내 들어 올렸다. 붉은 밀랍 인장을 찍고 로즈마리에게 건넸다.

“변경백령의 공식 대리인 자격이다. 이 문서가 있으면 어느 길드든 너를 거부할 수 없어.”

로즈마리가 문서를 받아 들었다. 잠시 서재 안을 둘러봤다. 에리히의 얼굴, 파스칼의 긴장된 눈빛, 그리고 한도영의——

“돌아올게.”

짧게 말하고 그녀가 문을 나섰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멀어졌다. 서부 장터 쪽으로.

에리히가 허리춤의 검자루를 한 번 만졌다. 옛 기사 시절의 버릇이다.

“파스칼. 병참 교란을 위한 인력 배치를 시작한다. 너는 측량 기록을 바탕으로 우회 보급로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표시해라.”

“네, 백작님!”

파스칼이 측량 기록일지를 펼치며 서재 문 쪽으로 물러났다. 에리히가 그 뒤를 따랐다. 출구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겹쳤다.

한도영은 책상 앞에 홀로 남았다. 의자에 앉아 수첩을 집어 들자 왼팔 문신의 푸른 빛이 다시 깜박였다. 통증은 없었다. 대신 차가운 감각이 팔꿈치를 넘어 위팔 중간까지 스며든다.

빛이 옷소매 아래서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문신의 기하학적 패턴이 한 줄기 더 추가되어 있었다.

좌표의 끝자락이 완성되고 있었다.

한도영이 수첩의 마지막 남은 페이지를 펼쳤다. 숯연필을 들어 한 줄을 적었다.

‘한 방의 검격도, 신성 마법도 필요 없다. 그들의 돈줄을 먼저 태워 버리겠다.’

연필을 내려놓았다. 왼팔의 푸른 빛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문신은 식어 있었다. 어깨 너머로 번진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변경백의 계산서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