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21화

지하 보고실의 공기는 차갑고 습했다. 한도영이 돌계단을 내려서자 에리히가 벽걸이 촛대에 불을 붙였다. 불빛에 드러난 보고실 한쪽 벽에는 철제 궤짝 세 개가 쌓여 있었다.

“여기 있는 게 전부요. 은화로 7천 닢. 그중 2천은 부채 상환용으로 따로 묶여 있소.”

에리히가 궤짝 뚜껑을 열자 은화가 줄지어 빛났다. 한도영이 은화 한 닢을 집어 들고 앞뒤로 뒤집었다.

“이 은화가 지금 시장에 풀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십니까.”

“가치가 떨어지겠지. 이미 폭락 중이니.”

“잠깐 더 떨어집니다. 상인 길드가 기다린 바로 그 지점까지. 그들은 은화 가치가 바닥을 찍은 뒤 대량 매수해 영지의 모든 거래를 장악하려는 구조입니다.”

에리히의 눈썹이 좁혀졌다. “그것을 알면서 왜 지금 은화를 풀겠다는 거요.”

“먼저 풀어야 합니다. 그들이 매수하기 전에.”

한도영이 수첩을 꺼내 환율 변동 수치가 적힌 표를 보여줬다. “우리가 3천 닢을 개장과 동시에 세 곳의 환전소에 분산 유통합니다. 은화 가치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폭락하면 상인 길드는 계획보다 싼값에 매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할 겁니다.”

“그들이 매수를 시작하면?”

“나머지 4천 닢을 추가로 풉니다. 매수 세력이 소화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는 순간, 은화에 대한 신뢰 자체가 무너집니다. 상인 길드가 쌓아둔 은화는 종잇조각이 됩니다.”

에리히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 4천 닢 중 2천은 부채다.”

“알고 있습니다.”

“부채를 먼저 갚지 않으면 채권자들이 영지 재산에 대해 압류를 신청할 수 있소. 작전이 끝나기 전에 영지가 먼저 무너질 수도.”

한도영이 수첩의 다른 페이지를 넘겼다. “채권자 중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이가 누굽니까.”

“······올리비에 후작이다.”

“적진의 지휘관이군요. 그가 압류를 신청하는 순간, 전쟁 명분이 채권 추심으로 바뀝니다. 귀족 평의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월권 행위입니다.”

에리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압류 자체를 정치적 자살로 만든다는 거군. 부채 상환을 미루는 것 자체가 방어 전략이다.”

에리히가 벽 쪽으로 두 걸음 물러났다. 촛불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렸다. 손가락이 다시 검자루를 더듬었다. 그가 서류 뭉치가 놓인 작은 탁자 앞으로 가 양피지를 집어 들고 깃펜을 잉크병에 담갔다.

“서면 승인이 필요하겠지.”

에리히가 은화 유통 권한, 환전소 이용 허가, 영주 직인 사용 승인을 빠르게 써 내려갔다. 마지막 줄에 서명을 내리고 붉은 밀랍 인장을 찍었다.

“가지고 가시오.”

한도영이 양피지를 받아 수첩 안에 접어 넣었다. 에리히가 궤짝 하나를 열어 안쪽 칸을 드러냈다. 한도영은 뚜껑째 꺼내 무게를 손으로 가늠했다. 한 궤짝에 천 닢 남짓.

“세 궤짝을 챙기겠습니다.”

에리히가 나머지 두 궤짝의 뚜껑을 직접 열었다. 은빛이 촛불을 받아 천장에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이 작전이 실패하면, 영지에는 은화 한 닢 남지 않소. 빚만 남습니다.”

한도영이 궤짝 뚜껑을 닫으며 대답했다. “실패해도 결과는 같습니다. 은화가 바닥나는 것과 은화가 무가치해지는 것뿐. 하지만 성공하면 적의 돈줄이 먼저 타 들어갑니다.”

에리히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오.”

한도영이 첫 번째 궤짝을 들어 올렸다. 왼팔 문신 부위가 무게에 반응해 잠시 저렸다. 통증까지는 아니었다. 그는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날이 밝고 있었다.

행정관 임시 사무실에는 아침 햇살이 창틀을 통해 길게 깔렸다. 파스칼이 측량대를 닦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한도영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탁자 위에는 측량 기록일지와 연합군 보급 경로 도표가 펼쳐져 있었다. 한도영이 궤짝 세 개를 탁자 옆 바닥에 내려놓고 수첩에서 페이지를 찢어 파스칼에게 건넸다.

“우회 보급로 중 가장 폭이 좁은 두 지점을 골라라. 거기에 설치할 장애물 설계도다.”

파스칼이 쪽지를 받아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마차 바퀴 폭을 기준으로 한 거군요. 바퀴가 빠지면 뒤따르는 마차가······.”

“길을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첫 번째 장애물에 걸린 마차가 두 번째 마차의 진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구조여야 한다.”

파스칼이 재빨리 지도 위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여기······ 경사가 5도 미만이고 양옆이 바위로 좁혀지는 구간입니다. 폭이 마차 두 대가 겨우 교차하는 정도.”

“정확하다. 거기에 설치한다.”

파스칼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크세니아 발렌타인은······ 아직 성 밖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잔류 용병단 막사에서 밤에 불빛을 봤다는 보고가······.”

“그걸 확인해야 한다.”

한도영이 다른 쪽지에 용병단 막사 접근 허가와 접촉 요청 내용을 적었다. “크세니아가 가지고 있는 적진 보급선 정보를 입수해라. 그녀가 이탈한 이유와 관계없이, 가지고 있는 정보만은 받아낸다.”

파스칼이 쪽지를 받아 품에 넣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지만 시선은 더 이상 바닥을 향하지 않았다.

“가겠습니다.”

그가 측량 장비를 정리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예전보다 빨랐다. 한도영은 탁자에 앉아 새 양피지를 펼치고 숯연필로 환전소 세 곳의 위치와 담당자 이름, 유통할 은화 액수를 적어 내려갔다. 파스칼의 발소리가 복도 밖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 후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들어온 것은 파스칼이 아니었다. 크세니아 발렌타인이 문턱에 서 있었다. 왼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약지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는 탁자 위의 지도를 한 번 훑고 입을 열었다.

“보급로를 막을 생각이라면,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놈들은 우회로가 막히면 인근 마을에서 짐수레를 징발한다. 장애물만으론 부족하다.”

“마을 쪽에도 손을 써야 한다는 거군.”

“이미 지시해뒀다. 내 부하들이 마을 수레 일곱 대를 사들였다. 수레가 사라졌으니 징발할 물건이 없다.”

한도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는 언제 넘길 거냐.”

크세니아가 품에서 접힌 양피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적진 보급 일정과 경계 교대 시간. 사흘 치 분량이다. 네놈이 그 보급로를 어떻게 막든, 내 부하들 소멸 예정 시한은 변하지 않는다.”

“알고 있다.”

“그럼 됐다.”

크세니아가 몸을 돌렸다. 문을 나서기 전에 잠시 멈췄다. “그 상인 명단. 두 번째 환전소 주인은 올리비에 후작의 사촌이다. 조심해라.”

문이 닫혔다. 한도영은 잠시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상인 접촉 명단의 두 번째 줄에 작은 별표를 하나 그렸다. 연필을 놓고 수첩을 집었다.

왼팔 문신이 옷소매 아래서 잠시 푸르게 빛났다가 사그라졌다. 새 페이지에 한 줄을 적었다. ‘작전 개시. 첫 물량 — 개장과 동시에 유통.’

정오 무렵, 조문의 협곡 입구.

마차 두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짚으로 덮인 상자 다섯 개가 차 위에 실려 있다. 은화 3천 닢 중 첫 유통분 5백 닢이다.

한도영이 마차 옆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크세니아가 보낸 정보에 따르면 이 협곡이 상인 길드의 임시 집결지다. 곡물 중개상 세 곳, 직물 도매상 두 곳, 환전상 네 곳이 매일 정오 무렵 모인다고 했다.

로즈마리가 주변을 살폈다. 협곡 양쪽 절벽 위로 바람이 불었다.

“사람이 없어.”

한도영도 고개를 들었다. 정오가 지났다. 집결지라면 상인들의 천막이나 마차가 보여야 한다. 길바닥엔 바퀴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함정이다.”

“뒤늦었어.”

바위 뒤에서 석궁 줄이 울렸다.

첫 번째 화살이 마차 옆 나무 기둥에 박혔다. 두 번째 화살은 한도영의 왼쪽 귀 옆을 스쳤다. 피가 살짝 났다.

로즈마리가 몸을 날렸다.

“엎드려!”

한도영의 어깨를 잡아 마차 뒤로 밀어붙였다. 동시에 협곡 양쪽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뛰어내렸다. 여덟 명. 전부 단검을 뽑고 있다.

로즈마리가 마차 덮개 아래에서 막대기를 움켜잡았다. 손잡이 나무가 부러져 날카로운 단면이 보인다.

“가까이 오지 마!”

습격대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들었다. 석궁 둘이 동시에 겨냥했다.

“은화를 내려놔라. 그럼 놓아주마.”

한도영이 로즈마리 뒤에서 말했다.

“섣부르게 움직이면 안 된다. 협상——.”

석궁 줄이 동시에 울렸다.

두 발의 화살. 하나는 마차 덮개를 뚫었고, 하나는 한도영의 가슴을 향해 날아왔다.

로즈마리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터졌다. 원형으로 퍼지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섭씨 영하의 냉기가 3미터 반경을 덮쳤다. 화살이 느려졌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리고 멈췄다.

공중에 떠 있는 두 발의 화살 주변으로 반투명한 막이 형성되었다. 가장자리는 하늘색이고 중심으로 갈수록 짙은 코발트색으로 변했다. 막의 직경은 약 2미터. 완전한 구형이다.

땅바닥에 성에가 끼었다. 습격대원들의 발밑까지 하얀 서리가 뻗어갔다.

“마, 마법……!”

“저 여자 마법사야!”

대장이 뒷걸음질 쳤다. 단검을 든 손이 떨렸다.

“물러서! 전원 물러서!”

협곡 서쪽 입구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상인 행렬이었다. 두 대의 마차가 협곡 안으로 들어서다가, 화살이 공중에 떠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멈춰 섰다.

“환율 교란이 사실이었군!”

“은화를 풀고 있다는 게 진짜야……!”

상인들의 목소리가 협곡에 울렸다. 습격대는 혼란에 빠졌다. 마법사가 있다는 소문만으로도 용병 계약을 파기할 명분이 된다. 대장이 손을 내저으며 절벽 쪽 바위틈으로 도망쳤다. 다른 일곱 명도 따라 달아났다.

로즈마리가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의 푸른 빛이 스르르 사라졌다. 보호막도 함께 희미해지며 공중에 떠 있던 화살 두 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깡통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로즈마리.”

한도영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져 있다. 피부가 급속히 식어갔다.

“일어서.”

“……화살은.”

“막혔다. 다 도망갔어.”

로즈마리가 웃으려다 실패했다.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나도…… 나도 마법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고개가 앞으로 떨어졌다. 의식을 잃은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한도영이 그녀를 받았다. 왼팔 문신 부위에 로즈마리의 손등이 닿았다. 찬 감각이 전해졌다. 마치 얼음덩어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마부 하나가 뛰어왔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아니다. 내가 한다.”

한도영이 로즈마리를 번쩍 안아 올렸다. 예상보다 가벼웠다. 사람 하나를 안고 서 있는데도 균형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차 뒤쪽 짚더미 위에 그녀를 눕혔다. 손목을 잡아 맥박을 확인했다. 약하지만 규칙적으로 뛰고 있다.

“성으로 돌아간다. 은화는 그대로 두고.”

“하지만 상인들이…….”

“지금 목격한 장면이 오늘 장터에서 가장 확실한 환율 교란 소식이다. 은화는 필요 없어졌어.”

마차 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도영은 로즈마리의 오른손을 들어 살폈다. 손바닥 중앙에 푸른 빛의 잔영이 남아 있다. 피부 아래 모세혈관이 미세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빛은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앞선 사건에서 로즈마리의 손끝에 스쳤을 때, 앞선 사건에서 그녀가 문신을 감지했을 때.

한도영이 수첩을 꺼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펴서 한 줄을 적었다.

'보호막 개시: 석궁 화살 두 발에 대한 생명 위협 감지. 무의식 발동. 반경 1미터. 색깔은 코발트 블루. 표면에 60도 격자 패턴 흔적 있음.'

호흡을 한 번 고르고 이어 적었다.

'격자 패턴이 내 문신의 기하 구조와 일치. 색깔도 동일. 단, 온도 저하 및 냉기 동반은 계약 문신엔 없는 현상.'

연필을 멈췄다. 왼팔 문신이 욱신거렸다. 아까 로즈마리의 손등이 닿은 부위다. 푸른 빛이 옷소매 아래서 한 차례 깜박였다. 문신이 그녀의 마법에 반응하고 있었다.

해질녘, 아렌트 성 로즈마리의 방.

한도영이 의자에 앉아 수첩을 덮었다. 침대 위에 누운 로즈마리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했다. 탈진 상태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호흡이다.

파스칼이 문간에 서 있었다.

“상인 길드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조문의 협곡에서 마법사 한 명이 석궁을 막아냈다고…… 은화 환율이 오후 두 시부터 반등하기 시작했어요.”

“좋다.”

“로즈마리 씨는…… 괜찮을까요.”

“의식은 곧 돌아온다. 탈진일 뿐이다.”

파스칼이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장애물 설계도, 크세니아 님에게 전달했습니다. 용병단 막사에서 대기 중입니다.”

“알았다. 에리히 백작에게도 보고해. 습격은 있었지만 작전 첫 단계는 성공했다고.”

파스칼이 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로즈마리가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야.”

“성이다. 네 방.”

한도영이 수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로즈마리가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올려다봤다. 손바닥에 푸른 잔영이 아직 남아 있다.

“내가…… 마법을.”

목소리가 가늘었다.

“그래.”

“어머니처럼.”

로즈마리가 손을 내려 침대 시트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떨렸다. 잔영이 스며드는 것처럼 서서히 옅어졌다.

“나는 마법을 싫어했어. 어머니가 그 불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런데…….”

말을 멈추고 천장을 바라봤다.

“네가 죽을 뻔했을 때, 생각하지도 않고 손이 나갔어.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어.”

한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거다. 통제하려 한 게 아니다.”

“그게 더 무서워. 통제할 수 없는데 나온 거잖아.”

한도영이 수첩을 집어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아까 마차 안에서 적은 메모를 조용히 소리 내 읽었다.

“생명 위협 시 무의식적 발동. 반경 1미터 구형 보호막. 코발트 블루 발광. 온도 저하 및 성에 현상 동반.”

손가락으로 수첩의 빈칸을 한 번 짚었다.

“격자 패턴——여기까지만 확인했다. 나머지는 분석이 더 필요하다.”

로즈마리가 팔꿈치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분석…… 할 수 있어?”

“일부는.”

한도영이 왼팔 소매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문신이 팔 전체를 덮고 있다. 어깨 너머 가슴까지 기하학 패턴이 이어졌다.

“네 보호막 표면에 나타난 격자 구조. 이 문신과 같은 체계다. 60도 교차각, 동일한 노드 밀도.”

로즈마리의 호흡이 멈췄다.

“내 마법이 네 계약과 연결돼 있다는 거야?”

“연결인지, 동일한 뿌리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네 어머니——”

한도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고른다.

“네 어머니의 마법 기록과 지금 네 보호막은 발현 조건이 유사하다. 위기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발동한 점도 같고.”

로즈마리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면 이건…… 나 혼자만의 재능이 아니란 뜻이야.”

“그렇다. 대대로 이어진 가능성이다. 다만——”

한도영의 왼팔 문신이 다시 한 번 깜박였다. 로즈마리의 손바닥에 남은 잔영도 동시에 깜박였다. 두 개의 빛은 같은 파장이었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쳐 급히 적기 시작했다.

'로즈마리의 마법 잔영과 내 계약 문신, 동일 파장 반응 관찰. 잔영의 노드가 문신 진행 방향으로 미세하게 끌림. 두 좌표계가 물리적으로 상호작용 중.'

숯연필을 내려놓지 못했다.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계약의 편입 경로와 마법의 발현 경로가 동일한 격자망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이 격자망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소환 계약과 마법 계승은 같은 원천에서 갈라진 것이다.'

로즈마리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잔영이 거의 사라졌다.

“나도 무서워. 이 힘도, 연결됐다는 것도. 어머니처럼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한도영이 수첩을 닫았다.

“하지만 이 마법은 네가 선택한 게 아니다. 네 몸이 먼저 반응한 거다. 그 반응이 주는 정보를 무시할 수는 없어.”

로즈마리가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그럼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아무 때나 마법이 나올 수 있는 거야?”

“조건은 분명하다. 네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려는 순간.”

한도영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네 마법은 그 순간에만 발동한다. 그리고 빛의 파장은 내 계약 문신과 같다. 어머니의 기록에도 같은 현상이 있었는지, 이제부턴 그걸 확인해야 한다.”

로즈마리의 눈이 살짝 젖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침대에서 다리를 내렸다.

“알겠어.”

목소리는 다시 침착해졌다.

한도영이 탁자 위에서 작은 물컵을 들어 건넸다. 로즈마리가 받아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창밖으로 해가 거의 졌다. 방 안이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로즈마리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터졌다. 원형으로 퍼지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섭씨 영하의 냉기가 3미터 반경을 덮쳤다. 화살이 느려졌다. 마치 물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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