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22화

한도영이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수첩을 덮어 허리 주머니에 넣었다.

로즈마리의 오른손 손바닥에서 푸른 잔영이 거의 사라졌다. 숨소리가 깊어졌다. 탈진 상태 그대로 얕은 잠에 빠진 것이다. 한도영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받쳐 침대 쪽으로 옮겼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방 안의 촛불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불었다.

이 연결을 당분간 비밀로 해야 한다. 로즈마리의 마법이 계약 격자망과 동일한 파장으로 반응한다는 사실. 어머니가 '세계 규칙에 저항하다 사망한 마법사'라면, 그녀의 딸이 같은 규칙에 편입된 자와 공명한다는 건 의미가 다르다.

정보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은 작전이 먼저다.

한도영이 문손잡이를 조용히 돌렸다. 복도로 나서며 문을 닫았다.

복도는 어두웠다. 벽을 짚고 걷자 왼팔 문신이 다시 한 번 깜박였다. 로즈마리에게서 거리가 멀어지면서 빛이 약해졌다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자 멈췄다.

거리 의존 반응. 수첩을 펼쳐 한 줄 추가했다.

'잔영 소멸 후 문신 반응 중단. 반응 강도는 로즈마리와의 거리에 비례. 계약 좌표가 마법 계승자의 생체 신호를 감지하고 있음.'

수첩을 닫았다.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 빛이 집무실의 좁은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탁자 위에는 크세니아가 용병단을 통해 보낸 양피지가 펼쳐져 있었다. 보급로 지도와 적 마차 대열의 이동 시간표.

에리히 아렌트 백작이 탁자 반대편에서 일어섰다. 눈 밑이 어두웠다. 잠을 못 잔 얼굴이다.

“로즈마리는?”

“탈진. 안정됐다.”

에리히가 천천히 앉았다.

“환율은?”

“어제 오후 두 시 반등 시작. 밤사이 40퍼센트 회복.”

한도영이 탁자 앞에 섰다. 양피지의 보급로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크세니아의 정보. 적 보급 마차 세 대열이 오늘 정오 조문의 협곡을 통과한다. 호위 병력은 대열당 열 명 안팎.”

“그 협곡을 막으면 보급이 적어도 사흘 묶인다.”

에리히가 지도를 내려다봤다.

“파스칼의 설계는?”

“철제 마름쇠와 목재 장애물. 폭이 좁은 길목 세 곳이다. 바퀴가 걸리면 마차가 기울어 뒤 대열이 전멸하지는 않지만 통과할 수 없다.”

한도영이 주머니에서 접은 설계도를 꺼내 탁자에 펼쳤다. 파스칼이 밤새 완성한 그림. 장애물의 배치 각도, 마름쇠의 길이, 매립 깊이까지 적혀 있었다.

“이 위치는 내가 예전 측량 때 확인한 지점이다. 길 폭이 가장 좁고 양옆이 암벽이라 우회로가 없다.”

에리히가 설계도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침묵.

“백작께서 말씀하신 공동 성명 건.”

한도영이 물었다.

에리히가 고개를 들었다.

“작위를 내려놓는 대신, 영민과 함께 설 수 있는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나 혼자의 사죄가 아니라 영지 전체가 버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문서. 농민 대표, 상인 대표, 대장장이 조합장…….”

“병행합시다.”

한도영이 말을 끊었다.

“오늘 보급 차단 작전을 실행한다. 크세니아가 현장에서 결과를 확인할 거다. 작전이 성공하면 적 내부에 혼란이 생긴다. 그사이 영민과의 성명 초안을 완성하시죠.”

“네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계산 중입니다.”

한도영이 왼팔을 움직였다. 문신이 옷소매 아래서 약하게 깜박였다. 에리히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묻지 않았다.

“알겠다.”

에리히가 빈 양피지를 한 장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잉크병 뚜껑을 열었다.

“파스칼에게 전령을 보내겠다. 즉시 출발하라고.”

대장간 거리. 아침 공기 속에 쇠와 숯 냄새가 섞여 있었다.

파스칼이 수레 옆에서 마지막으로 설계도를 확인했다. 철제 마름쇠 스무 개가 수레 바닥에 포개져 있고, 목재 장애물 세 개가 밧줄로 묶여 옆에 실려 있었다. 대장장이 셋이 각자 연장을 챙겼다.

“파스칼 님, 이거 다 싣고 협곡까지 가는 데 두 시간은 걸립니다.”

대장장이 하나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정오 전에 설치를 끝내야 하니까…… 조금 서두르는 게…….”

파스칼이 말끝을 흐리며 설계도를 수레 위에 올렸다.

성 쪽에서 전령이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종이를 건넸다. 한도영의 서명이 찍힌 출발 명령서. 딱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조문의 협곡 첫 번째 지점. 경사 2도 지점에서 우측 암벽 기준 3미터 폭.'

파스칼이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손이 떨렸다.

“……출발합니다.”

수레가 덜컹이며 움직였다. 대장장이들이 뒤를 따랐다.

조문의 협곡 입구까지 길은 농경지를 가로질렀다. 수레 바퀴가 마른 흙을 밟으며 느리게 나아갔다. 파스칼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도를 들여다봤다. 한도영이 알려준 세 지점. 전부 지난달 측량 때 본 곳이었다.

첫 번째 지점은 협곡 시작점에서 300미터 안쪽. 길 폭이 마차 한 대 반 너비로 좁아졌다. 양옆이 5미터 높이 암벽이다.

두 번째 지점은 거기서 200미터 더 들어간 모퉁이. 커브 직전이라 마차가 속도를 줄여야 하는 곳.

세 번째는 협곡 중간의 움푹 팬 바닥. 비가 오면 물이 고이는 곳인데, 이번 주는 건조해서 마른 진흙이 갈라져 있었다.

도착은 정오 직전이었다.

파스칼이 첫 번째 지점에 멈춰 섰다. 땅에 말뚝을 박아 한도영이 표시한 위치를 확인했다.

“마름쇠 먼저. 설계도 순서대로 박아 주세요.”

대장장이들이 마름쇠를 수레에서 내렸다. 쇠망치로 땅에 박자 마른 흙이 퍼석거렸다. 마름쇠 아홉 개를 세 줄로 배치했다. 말발굽이 아닌 마차 바퀴 폭에 맞춘 간격.

두 번째 지점과 세 번째 지점에는 목재 장애물을 가로로 눕혔다. 한쪽 끝을 암벽 틈에 고정하고 반대쪽은 쐐기로 받쳤다. 마차 바퀴가 들이받으면 장애물이 밀리지 않고 바퀴살을 파고들도록 각도를 조정했다.

파스칼이 땀을 닦으며 마지막 장애물의 쐐기를 확인했다.

그때 협곡 바깥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파스칼의 귀가 빨개졌다. 대장장이 하나가 곡괭이를 내리려다 멈췄다.

“……적입니까.”

“기다리세요.”

협곡 입구로 들어선 것은 크세니아 발렌타인이었다. 갈색 망토를 두르고 검은 말을 탔다. 왼손 약지가 없는 손으로 고삐를 쥐었다.

“첫 번째 대열. 15분 후 도착한다. 보급 마차 4대. 호위 11명.”

파스칼이 침을 삼켰다. 대장장이들이 서로 얼굴을 봤다. 크세니아가 말에서 내리지 않고 협곡 안쪽을 훑었다.

“설치 다 됐나.”

“네, 네…… 방금 끝났습니다.”

크세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협곡 옆 바위 뒤로 몰아 숨겼다.

“너희도 물러나. 저 위.”

그녀가 협곡 서쪽 능선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파스칼과 대장장이들이 연장과 빈 수레를 끌고 경사면을 올랐다. 바위 뒤에 엎드렸다.

15분.

협곡 아래에서 마차 바퀴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멀었다가 점점 가까워졌다. 말 울음소리.

병사들의 대화 소리. 밀가루 포대를 실은 마차 네 대가 줄지어 들어왔다. 호위병들은 방패를 등에 걸고 편하게 앉아 있었다. 매복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 행군이다.

첫 번째 마차가 마름쇠 지점에 이르렀다. 좌측 앞바퀴가 쇠에 걸렸다. 바퀴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마차가 왼쪽으로 기울며 멈춰 섰다.

말이 놀라 앞발을 들었다.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뭐야 이게──!”

두 번째 마차가 멈추지 못하고 앞 마차의 옆면을 들이받았다. 세 번째 마차가 급정거하며 짐칸의 포대가 도로 위로 쏟아졌다. 네 번째 마차는 커브 전에 겨우 멈췄다.

호위병들이 방패를 뽑아 들고 주위를 살폈다.

“매복이다! 대형 갖춰!”

하지만 공격은 없었다. 마차 세 대가 뒤엉켜 길을 막았을 뿐이다. 첫 번째 마차의 부러진 바퀴를 빼내려면 최소 한 시간. 두 번째 장애물까지는 200미터 남았다. 세 번째 장애물은 그 뒤다.

크세니아가 능선 위에서 내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돈줄이 막혔다.”

그녀가 품에서 작은 신호용 호루라기를 꺼내 짧게 두 번 불었다. 협곡 반대편 능선에서 그녀의 잔류 용병 하나가 깃발을 흔들었다. 확인 신호다. 이 정보는 한 시간 안에 성으로 전달된다.

크세니아가 말을 돌려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움직였다. 나머지 두 대열의 도착 예정 시간을 보고하러 가는 것이다.

파스칼이 바위 뒤에서 손을 떨었다. 성공했다.

오후, 아렌트 성 앞 광장.

보급 마차 차단 소식이 전해지자 광장에 모인 영민들의 웅성거림이 낮은 북소리처럼 깔렸다. 에리히 백작이 성 입구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왼편에는 파스칼, 오른편에는 상인 길드 대표가 자리했다.

한도영은 광장 측면에서 로즈마리와 함께 기둥에 기대 서 있었다. 로즈마리의 얼굴엔 아직 탈진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두 발로 서 있었다.

에리히가 양피지를 펼쳐 올렸다.

“변경백령은 3년 전 가뭄 구호금 은화 3천 닢을 내 부채 상환에 썼다. 그로 인해 280명의 영민이 죽었다.”

군중 사이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몇몇 노인이 고개를 숙였다. 젊은 남자 하나가 주먹을 쥐었다.

“그 죄에 대해 작위 반납서를 써 두었다.”

에리히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땅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그가 다른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두꺼운 질감이 오후 햇살 아래 그림자를 드리웠다.

“변경백령 민의 헌장. 첫째, 영지의 주요 결정은 영주와 영민 대표의 합의로 정한다. 둘째, 영민 대표는 매년 마을별 선출로 교체한다. 셋째, 영주 가문의 부채는 영민의 세금으로 상환하지 않는다.”

파스칼이 앞으로 나섰다. 목 끝까지 빨개진 채였다.

“토벤 마을을 대표하여…… 이 헌장에 서명하겠습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마지막까지 흐리지 않았다. 계단 아래서 누군가 박수를 쳤다. 한 번, 두 번. 이내 광장 전체가 환호로 뒤덮였다.

한도영은 광장의 소리를 들으며 수첩을 꺼냈다.

'자발적 합의 기반 계약. 계약 주체가 개인이 아닌 집단과의 상호 서약. 형식은 혈서가 아닌 문서, 집행은 치외법권이 아닌 공개적 감시 아래. 이 구조——'

숯연필이 멈췄다.

'——소환 계약이 개인을 구속하는 것과 대칭적이다. 하나의 의지가 아니라 다수의 합의가 계약을 떠받친다면, 구속의 방향은 반전될 수 있다.'

로즈마리가 옆에서 수첩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서명하는 파스칼 얼굴. 처음 본 표정이야.”

“자신의 이름을 걸었다.”

한도영이 수첩을 덮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에리히가 파스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돌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환호가 한 차례 더 커졌다. 이번엔 아이들도, 상인도, 농부도 함께였다.

저녁, 아렌트 성 집무실.

촛불 세 개가 책상 위 지도를 비추고 있었다. 에리히는 민의 헌장 사본을 책상 왼편에 내려놓았다. 한도영은 오른편에 앉아 수첩을 펼쳐 두었다. 로즈마리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크세니아 발렌타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왼손 약지의 흉터가 촛불에 반짝였다.

“잔류 용병단 보고다. 조문의 협곡 장애물에 걸린 적 보급 마차가 총 열두 대. 현재 첫 번째 장애물에서 완전히 멈췄고, 두 번째 지점에선 수레바퀴가 부러진 차량이 길을 막고 있다.”

파스칼이 뒤이어 말했다.

“세 번째 지점에서는…… 마부들이 짐을 내려 인력 운반을 시도 중입니다. 하지만 경사 때문에 진척이 더뎌요.”

“식량 상태는.”

한도영의 질문에 크세니아가 턱을 짚었다.

“정찰조가 입수한 정보론, 적진에서 이미 하루치 배급만 남은 부대가 있다.”

에리히가 지도 위에 손을 짚었다.

“협곡을 못 넘으면 우회로는 북부 능선뿐이다. 거긴 경사 23도. 마차는 못 올라간다.”

“그렇다면 적 연합군의 선택지는 둘이다.”

한도영이 지도를 가리켰다.

“협곡에 발이 묶여 식량이 바닥나길 기다리거나, 능선으로 보병만 보내 전투력이 분산되거나.”

“어느 쪽이든 유리해졌군.”

에리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한도영의 왼팔 문신이 불꽃처럼 타올랐다. 청색 섬광. 옷소매 아래서 번쩍.

한도영이 왼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숨이 짧게 끊겼다.

로즈마리가 창가에서 돌아섰다. 오른손 손바닥의 푸른 흔적이 바래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아까…… 광장에서도 깜박였어. 뭔가가 연결되고 있어.”

“통증은.”

“48시간.”

한도영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이마엔 땀이 솟았다.

“기한이 그쯤으로 좁혀졌다. 더 정확히는…… 내일 해가 지기 전이다.”

파스칼이 숨을 들이켰다. 에리히가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멈췄다.

한도영이 수첩을 펼쳤다. 손가락이 떨렸다. 그래도 숯연필은 정확했다.

'로즈마리의 마법 잔영과 문신의 공명, 시간 경과에 따라 빈도 증가. 마법 계승의 격자망이 소환 계약의 좌표계와 동일 원천이므로, 하나의 노드를 이탈시키는 역벡터를 마법 파장에 동기화할 수 있다——'

펜이 멈췄다. 그 너머는 아직 기호로 남길 수 없는 가설이었다. 그는 수첩을 덮지 않고 책상 위에 펼쳐 두었다.

로즈마리가 다가왔다. 굳은 표정이었다. 손바닥의 푸른 빛이 한도영의 왼팔 쪽으로 희미하게 흘렀다. 문신이 다시 깜박였다. 공명이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로즈마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당신의 계획을 믿어요. 함께 하겠습니다.”

크세니아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잔류 용병단도 움직이겠다. 정보 수집은 계속한다.”

파스칼이 수첩 옆에서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에리히가 민의 헌장 사본을 한 번 쓰다듬었다.

“좋다. 이 영지는 오늘부로, 영주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다.”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팔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잦아들었다. 수첩 위로 촛불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는 다시 숯연필을 집어 한 줄을 추가했다.

'계약 전환——내일 해가 지기 전에.'

변경백의 계산서2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