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24화

해가 막 지평선을 밀어올린 광장이었다. 돌바닥 위로 분필 좌표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파스칼이 밤새 표시한 측량 기준점들이었다. 중심에는 빈 공간이 있었다.

영민들이 광장을 에워쌌다. 앞줄에는 작업복 차림의 남자들, 뒤로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여자들, 아이들은 어른들 다리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촛불을 든 이들도 있었다. 밤새 잠들지 않고 기다린 얼굴들이었다.

에리히가 광장 북쪽 단상 아래에 서 있었다. 붉은 기 도는 눈으로 영민들을 훑었다. 로즈마리가 광장 동쪽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도착한 무리를 안내했다. 크세니아는 성벽 쪽 그림자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도영이 광장 중앙으로 걸어들어갔다. 왼쪽 소매 아래로 문신의 푸른 빛이 옅게 스며 있었다. 손에는 분석 수첩을 들고 있었다. 발소리만 광장에 울렸다.

그가 멈춰 서서 천천히 수첩을 들어 올렸다.

“이것은 내 소환 계약이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아침 공기에 또렷하게 퍼졌다.

“계약의 원점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문신의 좌표계는 변경백령 전체를 덮고 있다.”

앞줄의 한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선 노인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광장을 훑고 지나갔다.

“내가 사라지면 계약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민 2만 명 전체가 이 좌표계에 묶이게 된다. 소멸의 대상이 한 사람에서 영지 전체로 확장된다.”

한도영이 수첩을 폈다. 빼곡히 적힌 도식과 숫자들이 햇빛에 드러났다.

“따라서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계약의 주체를 나에서 영민 전체로 전환한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한 여자가 앞으로 한 걸음 나오다가 멈췄다.

“무슨 뜻이오?”

중년 남성의 굵은 목소리가 군중 속에서 튀어나왔다.

“나를 죽이는 대신 모두가 계약의 당사자가 된다.”

한도영이 수첩을 내리지 않고 말했다.

“개인의 소멸이 아니라 집단의 합의로 계약을 떠받치는 구조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여러분의 합의가 이 영지의 새로운 법적 근거가 된다.”

침묵이 흘렀다. 아이 하나가 기침을 삼켰다. 바람이 광장의 먼지를 살짝 일으켰다.

에리히가 단상으로 올라섰다. 그의 목소리는 잠겼지만 또렷했다.

“나는 이 사람의 말을 지지한다. 이미 민의 헌장으로 영지의 주권은 여러분께 이양되었다. 이제 그 주권을 계약의 형태로 완성할 차례다.”

영민들 사이에서 팔이 하나 올라왔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팔이 올라왔다. 술렁임의 성질이 바뀌었다. 두려움에서 결정으로.

“어떻게 하는 거요?”

아까 그 중년 남성이 다시 물었다.

한도영이 파스칼을 돌아보았다. 파스칼이 기록부를 펼치며 앞으로 나왔다.

“광장 바닥에 그려진 좌표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동쪽 선을 따라, 여자들은 서쪽 선을 따라 걸으십시오. 어린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중심 원 안으로 들어오면 됩니다. 여러분의 걸음이 서명을 대신합니다.”

파스칼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지만, 문장 끝을 흐리지 않았다.

한도영이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를 찢었다. 계약 해독 공식이 적힌 종이였다. 그가 허리를 굽혀 광장 중앙의 빈 공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분필로 그려진 원의 정중앙이었다.

로즈마리가 곁으로 다가왔다. 오른손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이미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내가 매개가 될게.”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다만 어조가 한 톤 낮았다.

“네 마법을 의도적으로 열어야 한다.”

한도영이 말했다.

“알아. 이제 억누르지 않을게.”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자, 손바닥의 푸른 빛이 밝아졌다. 손끝에서 성에가 흩어졌다.

영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쪽 선을 따라 남자들이 줄을 지었다. 서쪽으로 여자들이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을 안은 부모들이 중심 원으로 모여들었다. 신발 소리, 맨발 소리, 샌들 소리가 분필 선을 따라 겹쳐졌다.

파스칼이 측량 문서를 보며 좌표를 확인했다.

“동쪽 첫 번째 교차점…… 밟혔습니다.”

“서쪽도요.”

파스칼의 목소리가 커졌다.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한도영이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문신의 격자 패턴이 아침 햇살에 드러났다. 푸른 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로즈마리가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폭발적으로 번졌다. 광장 바닥의 분필 선 위로 빛이 흘러내렸다. 마치 물이 고랑을 따라 퍼져나가듯.

냉기가 광장을 감쌌다. 영하의 온도가 아니었다. 살갗이 살짝 조이는 듯한, 정전기 같은 한기였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을 내리지 않았다. 푸른 빛이 광장 전체를 덮을 때까지, 그녀는 양팔을 벌린 채 서 있었다.

한도영의 왼팔 문신이 반응했다. 격자 하나가 소멸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노드가 꺼졌다. 푸른 빛이 아니라 은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문신이 선명도를 잃고 희미해졌다.

광장을 덮은 푸른 빛이 중심으로 수축했다. 한도영의 수첩 조각 위로 모든 빛이 모여들었다. 종이의 잉크가 반짝였다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왼쪽 손목에 희미한 은빛 문양이 떠올랐다. 격자 구조도, 측량 기호도 아닌, 단순한 원형 안에 교차된 두 개의 선이었다.

로즈마리의 무릎이 꺾였다. 그녀가 옆으로 기울었다. 한도영이 왼팔을 뻗어 어깨를 받았다.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서는 푸른 빛이 더 이상 억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끝났어.”

로즈마리가 작게 말했다.

문신이 사라진 자리에 은빛 흔적만 남았다.

광장이 조용해졌다. 영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중앙을 바라보았다. 파스칼이 문서를 가슴에 안고 서 있었다.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때, 발소리가 났다.

군중이 갈라졌다. 크세니아 발렌타인이 광장 중앙으로 걸어들어왔다. 걸음은 군인처럼 정확했지만, 오른손은 왼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한도영 앞 세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소멸했던 약지 자리에 희미한 흉터가 생겨 있었다. 살갗이 약간 오므라든 자국이었다.

“보이나.”

크세니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저주가 부분적으로 풀렸다. 네 계약 전환식의 여파가 혈서 계약까지 건드렸다.”

그녀가 왼손을 들어 광장의 모든 이에게 보였다. 영민들 사이에서 놀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도영이 흉터를 응시했다.

“완전한 해방은 아니다.”

“그래도 열두 명의 부하가 전부 사라지는 것보다는 낫다.”

크세니아가 손을 내렸다.

“나는 더 이상 적이 아니다.”

시선이 에리히를 향했다.

“변경백령의 용병대로서 새 계약을 맺고 싶다. 조건은 이전과 같다. 식량과 주거, 그리고 내 부하들의 계약 해방에 협력할 것.”

에리히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의 표정에는 더 이상 죄책감이 없었다. 계산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건부로 수용한다. 용병단의 영지 내 합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서류를 오늘 중으로 준비하겠다. 단, 영민에 대한 무력 행사 금지 조항이 포함된다.”

“당연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크세니아.

“이미 적은 따로 있다. 올리비에 후작 진영으로 떠난 네 상관이 돌아올 때까지, 나는 이 광장의 경계를 지킨다.”

그녀가 뒤돌아 광장 변두리로 걸어갔다. 군중이 길을 터주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광장 구석에서 누군가 박수를 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박수가 붙었다. 아이 하나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렸다.

환호성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에리히가 한도영 쪽으로 걸어왔다.

“해냈습니다.”

존대가 자연스러웠다.

한도영이 로즈마리를 부축한 채 고개를 들었다. 왼쪽 손목에 은빛 문양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계산서는 끝났습니다.”

한도영이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집행입니다.”

광장의 환호가 채 가시기 전에 파스칼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군중을 헤치고 나와 에리히와 한도영을 집무실로 먼저 안내한 뒤, 곧장 외곽 경비초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절의 깃발이 망루에서 확인된 지 채 한 시진이 안 된 시점이었다. 파스칼은 연합군 전령을 대동해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광장 의식이 끝난 후 집무실 안은 조용했다. 에리히가 협정 초안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있었고, 한도영은 벽 쪽 의자에 앉아 왼손 손목을 가볍게 문지르고 있었다. 문신은 거의 사라졌다. 희미한 은빛 선이 피부 아래로 스며드는 중이었다.

문이 열렸다. 파스칼이 먼저 들어왔다. 그 뒤로 낯선 남자가 한 명 섰다. 검은색 외투에 먼지 묻은 장화. 연합군 진영의 전령용 깃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올리비에 드 베르니에 후작님의 사절입니다.”

파스칼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똑바로 에리히를 바라봤다.

사절이 한 걸음 나왔다.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짧게 목례했다.

“올리비에 후작님의 공식 서한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에리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가락으로 탁자 모서리를 한 번 짚었다. 사절이 외투 안주머니에서 밀랍 봉인된 두루마리를 꺼냈다. 독수리 문장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두루마리를 받아 펼친 에리히의 눈이 종이 위를 빠르게 훑었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변경백령의 경제적 포위에 완전히 패배했으며, 모든 영토적 청구를 철회한다.”

목소리가 읽기를 멈췄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에리히가 두루마리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도영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탁자 옆으로 걸어가 협정 초안을 집었다. 눈으로 조항을 하나씩 짚어갔다.

“자치권 조항, 세 번째 줄. '상호 합의 하'에 '변경백령의 서면 통보 후 즉시 효력 발생'을 추가하는 게 좋겠습니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깃펜을 들어 초안에 한 줄을 더 썼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지 않고 두루마리를 사절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우리 조건이다. 변경백령의 자치권과 화폐 독립을 인정하는 별도 협정. 후작님께 전달해라.”

사절이 두루마리를 받아 품에 넣었다. 다시 한 번 목례하고 문 쪽으로 물러났다. 파스칼이 복도로 그를 따라 나갔다.

에리히가 탁자에 양손을 짚었다. 어깨의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끝났군.”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가로 걸어갔다. 밖은 정오의 햇살이 광장을 덮고 있었다.

에리히가 협정 초안 사본을 들고 옆방으로 향했다. 파스칼이 돌아와 뒤를 따랐다. 문이 닫혔다.

집무실에 두 사람만 남았다.

로즈마리가 한도영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광장에서 영민들이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몇몇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이 하나가 어머니 손을 잡고 흙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돌아갈 이유가 사라졌다.”

한도영이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더 이상 계산서의 답이 아니다. 이곳에 남겠다. 변경백령의 항구적 자문관으로.”

로즈마리가 고개를 돌렸다. 호박색 눈이 한도영의 옆얼굴에 머물렀다. 입술이 살짝 열렸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뻗어 왼손을 잡았다.

한도영의 손목에서 은빛 문양이 잠시 빛났다. 희미하게, 촛불보다 약한 빛. 로즈마리의 손가락이 그 위를 스쳤다.

“그럼 됐어.”

로즈마리가 말했다. 간단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한도영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다시 창밖을 향했다.

로즈마리가 손을 꼭 쥐었다.

한도영이 책상으로 걸어가 수첩을 집었다. 표지를 한 번 쓰다듬고 서랍을 열어 안에 넣었다. 서랍이 닫혔다.

더 이상 기록할 것은 없었다.

창밖 광장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먼지가 살짝 일었다. 영민 몇 명이 성 쪽을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한도영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이미 그들과 같은 땅 위였다.

한도영이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문신의 격자 패턴이 아침 햇살에 드러났다. 푸른 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로즈마리가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폭
변경백의 계산서2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