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7화

에리히 아렌트 백작은 검은 제복에 독수리 브로치를 달고 집무실 긴 탁자 앞에 앉았다. 맞은편에 외부 귀족의 사신 헤르만이 양피지를 사이에 두고 미소 지었다.

“3년 전 왕실 지원 자금의 실질적 채권자가 발렌 가문이라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소.”

“인장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증서의 진위는 다투지 않겠소. 하지만 상환 일정은 별개의 문제요.”

탁자 왼편에서 원로 세 명이 몸을 움직였다. 가장 연장자인 마르틴이 입을 열었다.

“영주님, 그 이방인 하나만 넘기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에리히는 마르틴을 외면한 채 헤르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영지 내정 자문을 타국 사인에게 넘기는 것은 영주권 침해요. 한 번 선을 넘으면 앞으로 어떤 요구도 거절할 근거가 사라지오.”

“그 자문이 도착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습니다.” 마르틴이 반쯤 일어났다. “물을 찾았다지만 파스칼이라는 대장장이 견습이 같이 한 일입니다. 누구 덕인지 분명하지 않소.”

뚱뚱한 체구의 원로가 거들었다. “어제 저녁 복도에서 쓰러졌다는 보고도 들었습니다. 몸 약한 자문을 붙들 여유가 있습니까.”

에리히의 턱 근육이 움찔했다. “몸 상태가 영지 기여도와 무슨 상관이오.”

헤르만이 몸을 기울였다. “3일 후까지 은화 2천 닢을 상환하신다면 담보 요구를 철회하겠습니다.”

“3일은 충분치 않소. 5일을 요구하오.”

헤르만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4일입니다.”

집무실이 조용해졌다. 에리히가 고개를 돌렸다. “좋소. 4일 후 은화 2천 닢을 상환하겠소. 단, 그 기간 한도영 자문에 대한 어떤 접촉도 허용하지 않소.”

헤르만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시계는 오늘 아침부터 돌아가고 있습니다.” 기사가 문을 열어주었고 발소리가 복도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마르틴이 완전히 일어섰다.

“영주님, 이것은 이방인 한 명 때문에 영지 전체를 담보로 잡히는 일입니다.”

에리히가 탁자를 한 번 두드렸다. “앉으시오, 마르틴.”

“앉지 않겠습니다.” 마르틴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나머지 원로 둘도 따라 일어났다. “원로회는 공식적으로 요구합니다. 한도영을 헤르만에게 인도하고 이 위기를 끝내십시오. 그 자가 찾은 물만으로는 3천 명의 아사 직전 영민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 자가 아니었으면 물조차 없었소.” 에리히도 일어섰다. 키는 에리히가 반 뼘쯤 더 컸다.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마르틴은 물러서지 않았다. “증명된다 해도 영지 생존이 한 이방인의 지식에 달렸다는 사실이 더 큰 위험입니다.”

에리히의 왼손이 탁자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목소리는 귀족의 위엄을 되찾았다.

“원로회 의견은 기억해 두겠소. 물러가도 좋소.”

마르틴은 물러서지 않았다. “원로로서 이 결정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겠습니다. 이 이방인 때문에 영지에 손해가 생기면 책임은 전적으로 영주님께 있습니다.” 고개도 숙이지 않고 등을 보이며 문을 향했다. 다른 원로들이 뒤를 따랐다.

문이 닫혔다. 에리히는 서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채권 증서 사본이 바람에 살짝 들렸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자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랍에서 은종을 꺼내 두 번 흔들었다.

“한도영 자문을 모셔오게. 외상이 있다면 치료 먼저 받도록 하고.”

자신의 서명이 담긴 쪽지를 건넸다.

‘4일을 벌었네. 준비하게.’

집무실 문이 닫혔다. 무거운 목재음이 복도에 울렸다.

원로 셋이 한도영을 향해 걸어왔다. 가운데 선 자는 헤르만의 측근이었다. 한도영을 보자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방인. 네가 물을 찾은 건 운이다.”

옆의 다른 원로가 덧붙였다.

“측량 같은 건 필요 없어. 이 땅은 우리가 안다.”

한도영은 오른쪽으로 반 걸음 비켜서며 길을 내줬다. 말은 하지 않았다.

세 원로가 등을 보이며 지나갔다. 마지막 한 사람이 어깨를 스치듯 지나며 짧게 내뱉었다.

“영주님이 너를 지키게 하는 동안에나 뭘 하든 해라.”

발소리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다. 한도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 않았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복도에는 정적만 남았다. 한도영은 왼팔을 접어 가슴 쪽에 올렸다. 천 아래 문신이 여전히 욱신거렸다. 허리춤에 손을 내리자 그을린 가죽의 거친 감촉이 손끝을 스쳤다. 왼팔의 통증이 잠시 강해졌다가 느려졌다.

아까 로즈마리가 병사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해 질 녘부터 영민 거주 구역에서 야간 간호를 돈다고—이미 성을 나섰겠지.

평민이 아무리 약초를 나르고 간호해도, 원로들 앞에서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위로를 바란 건 아니었다.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제가 가진 건 이 수첩 하나입니다.”

한도영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정치력과 군사력은 없어도 이 수첩만은 아무도 뺏을 수 없다. 지식은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결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는 발걸음을 숙소 방향으로 옮겼다. 남쪽 복도를 지나 층계참으로 향했다. 품 안으로 측량 도구 가방을 한 번 끌어당겼다.

이쪽에서는 실력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

계단을 오르며 심장 박동이 문신 위에서 뛰는 듯했다. 가방 끈이 어깨를 압박했다.

방 안은 어두웠다. 테이블 위에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한도영은 의자에 앉아 수첩을 폈다. 왼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뚝에서 손목까지 문신이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통증은 잦아들었지만 피부 아래 열기는 남아 있었다.

수첩에는 4화부터 기록한 패턴이 빼곡했다. 첫 확장 당시의 분기점. 2mm 연장된 선의 각도. 원형 노드에서 갈라진 곡선들. 앞선 사건에서 확인된 1cm 확장과 손목 방향의 새로운 노드.

한도영은 페이지를 넘기며 패턴들을 훑었다.

확장은 무작위가 아니었다. 매번 동일한 각도로 선이 뻗어나갔다. 60도 교차각. 원형 노드 간격은 일정한 비율을 유지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의식장 바닥에서 본 고대 기호가 떠올랐다.

그는 빈 페이지에 의식장 바닥 무늬를 그렸다. 파스칼과 측량하던 날, 입구에서 잠깐 스쳐본 문양이었다. 중앙 원에서 방사상으로 뻗은 선들. 60도 교차 격자.

팔을 들어 촛불 아래 가져갔다. 그림과 문신을 번갈아 보았다.

구조가 같았다. 노드의 배치. 선의 교차각. 원과 곡선의 상대적 위치. 문신은 의식장 문양을 더 작은 축척으로 압축한 형태였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의식장 문양은 땅 위 한 지점을 표시하는 고대 측량 기호였다. 그렇다면 문신은—

숯연필이 빠르게 움직였다.

‘계약 문신 ≠ 단순 계약 표식. 고대 좌표 체계와 동일 구조.’ ‘패턴은 공간 기술 문법. 계약서는 피계약자를 세계 규칙의 특정 좌표에 편입시키는 위치 지정 문서.’

연필을 멈췄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 세계는 그를 이방인으로 남겨두지 않을 셈이었다. 규칙 안으로 끌어들이고, 좌표를 부여하고, 시스템의 일부로 재정의한다. 문신의 확장은 편입 진행도를 시각화한 것에 불과했다.

왼팔이 다시 욱신거렸다. 소매를 내리지 않았다. 팔뚝에서 손목까지 문신이 촛불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노드와 선이 생체 조직처럼 맥박에 맞춰 움직이는 듯했다.

테이블 위에 왼팔을 올렸다. 수첩을 옆에 펼쳐 마지막으로 비교했다.

손목 내측의 새 노드. 거기서 심장 방향으로 뻗기 시작한 1cm 선. 수첩에 그린 의식장 문양도 똑같은 위치에 노드가 있었다. 축척만 다를 뿐, 좌표 체계로서의 구조는 완전히 일치했다.

사본이 아니었다. 원본을 다른 크기로 구현한 동일한 설계도.

피로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수첩을 덮지 않았다. 왼팔을 테이블에 올린 채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것은 기록이었다.

‘좌표 각인.’

촛불이 깜박였다. 숨소리가 느려졌다.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깊은 잠이 그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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