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백의 계산서
8화
아침 해가 훈련장의 단단한 흙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한도영은 막사 입구에서 멈춰 섰다. 수첩을 왼손에 쥔 채였다. 오른팔의 문신이 옷감 아래서 미열을 띠고 있었다.
훈련장 중앙에서 크세니아 발렌타인이 막 검술 대련을 끝내고 목검을 내려놓는 참이었다. 상대였던 용병 둘이 숨을 몰아쉬며 물통 쪽으로 흩어졌다.
크세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회색 눈이 한도영을 한 번 훑고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자문이 아침 일찍 볼일이냐.”
목소리에는 환영도 적대도 없었다. 사실 확인이었다.
한도영은 다섯 걸음 앞에서 멈췄다.
“계약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크세니아는 왼손으로 목검을 거치대에 걸었다. 약지 없는 손이었다. 동작에 망설임은 없었다.
“어떤 계약.”
“혈서 계약. 용병단에서 쓰는 계약의 작동 방식.”
크세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답 대신 한도영의 얼굴을 2초쯤 응시했다. 전장에서 상대의 의도를 가늠하는 시선이었다.
한도영은 수첩을 펼쳤다. 어젯밤 자신의 문신과 의식장 바닥 문양을 비교 분석한 페이지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것은 의식장 문양을 그린 새 페이지였다. 문신의 확장 패턴과 60도 교차각을 재구성한 스케치였다.
“이 구조를 봤습니다. 개인적인 조사 중에 발견한 패턴인데.”
크세니아는 수첩을 바라보지 않았다. 여전히 한도영의 눈을 보고 있었다.
“고대 측량 기호다.”
“알고 계셨군요.”
“용병 계약에는 그걸로 만든 게 있다.” 크세니아는 허리춤에서 물통을 뽑아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계약을 알고 싶다고 했나.”
“문신과 측량 기호 사이의 연결 고리가 혈서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
크세니아는 물통을 내려놓고, 막사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턱짓으로 훈련장 구석의 나무 그늘을 가리켰다.
“거기서 얘기하지. 여긴 귀가 많다.”
둘은 훈련장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마른 땅에서 먼지가 살짝 일어났다.
큰 느릅나무 아래 그들이 멈췄을 때, 크세니아는 다시 그를 정면으로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지 않았다. 오른손은 검의 손잡이 근처에 자연스럽게 걸려 있었다. 경계가 아니라 오랜 습관처럼 보였다.
“질문해라.”
한도영은 수첩과 숯연필을 꺼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피로가 남아 있었다. 그는 떨림을 무시하고 첫 장을 펼쳤다.
“혈서 계약서에 새겨지는 문양도 측량 기호인가요.”
“그렇다.” 크세니아의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계약을 맺으면 피와 함께 문양이 뜬다. 형태는 계약 종류마다 다르다.”
“어디에 새겨집니까.”
“왼손등.” 크세니아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였다. 손등에는 가느다란 흉터들이 여러 겹으로 덮여 있었다. 오래되고 새로운 것들이 뒤섞인 자국이었다.
“계약이 끝나면 흉터로 남는다. 위반하면 다르지.”
“위반하면.”
크세니아는 왼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였다. 그리고 약지가 있어야 할 자리, 매끄럽게 아문 피부를 그가 볼 수 있도록 그대로 유지했다.
“생명력이 소멸한다. 먼저 문양 부위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마치 훈련 교범을 읽어주는 것 같았다. “열이 오르고, 피부 밑에서 문양이 스며 나온다. 그 다음엔 손가락부터 사라진다. 한 마디씩. 통증은 없다. 사라지는 부위의 감각도 같이 없어지니까.”
한도영은 왼팔의 옷소매를 움켜쥐지 않았다. 대신 숯연필을 잡았다.
“문양이 스며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그건 피부 안에서 표면으로 확장된다는 뜻입니까.”
크세니아는 잠시 그를 쳐다봤다. “예리하군.” 칭찬이라기보다 관찰 결과였다.
“계약 문양은 원래 피 아래 있다. 위반하면 피부 위로 올라온다.” 그녀는 왼손을 다시 내렸다. “그 단계가 끝나면 문양이 있는 부위가 소멸한다. 내 경우는 약지 한 마디에서 멈췄다. 대가를 치른 뒤에 계약을 파기했으니까.”
“상호 합의로 파기했다는 말씀이군요.”
“대가와 합의, 두 가지가 필요하다. 대가 없는 합의는 의미 없다. 합의 없는 대가는 소멸이 계속된다.”
한도영의 연필이 움직였다. 빠른 속도로 혈서 문양의 작동 단계를 세 줄로 요약했다. 문양은 피부 아래에서 발생해 표면으로 확장된다. 위반 시 소멸이 시작된다. 대가와 합의가 동시에 충족돼야 멈춘다.
그는 연필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혈서 문양의 기하학적 구조를 기억하십니까. 각도와 교차점 같은 것들.”
“왜.”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내 문신과.”
크세니아의 눈빛이 다시 긴장의 끈을 당겼다. 그녀는 왼손을 들어 손등을 보였다. 그 자세 그대로 그녀의 시선이 한도영의 얼굴을 스쳤다.
“녀석. 계약이 뭔지 제대로 아느냐.”
한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지 못했다. 그리고 모른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만이 지금 유일한 방어였음을 그는 직감했다.
크세니아는 손등을 그가 볼 수 있게 내밀었다. “이게 기본형이다.”
한도영은 수첩에 스케치를 시작했다. 피부에 난 흉터의 미세한 곡선들, 두 개의 원형 노드, 그 사이를 잇는 60도 교차각의 선, 그리고 바깥쪽으로 방사되는 등간격의 점.
그렸다. 그리고 어젯밤 자신의 문신 분석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왼쪽 페이지는 의식장 바닥 문양. 오른쪽 페이지는 문신의 노드 배치. 방금 새로 그린 혈서 문양 스케치는 맨 아래에 작게 추가했다.
세 패턴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크세니아도 슬쩍 수첩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중앙 원형 노드.” 한도영은 말했다. 동시에 연필로 세 패턴의 같은 위치를 가리켰다. “방사형 선. 60도 교차각. 외곽 점의 등간격.”
크세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문법이군요.”
“문법.”
“공간을 기술하는 언어입니다. 의식장 문양은 땅 위의 좌표를 지정하려고 만든 겁니다. 혈서 문양도 같은 언어를 썼습니다. 계약 당사자의 생명력을 특정 좌표에 연결하는 방식으로.”
한도영은 연필로 세 개의 공통 기호에 둥근 원을 그렸다. 중앙 노드. 60도 교차선. 외곽 점 배치.
그리고 잠시 멈췄다.
“내 팔에 있는 문신도 같은 구조입니다.”
크세니아의 오른손이 검 손잡이 쪽으로 몇 센티 움직였다가 멈췄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소환 계약이냐.”
“예.”
“확실하냐.”
“어젯밤 확인했습니다. 의식장 문양과 문신 패턴을 비교했을 때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크세니아는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무거웠지만, 여전히 직설적이었다.
“그럼 너는 계약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한다.” 그녀가 한 걸음 물러섰다. “측량 기호라도, 그걸로 만든 계약은 진짜다. 위반하면 너의 그 문신 부위가 먼저 사라진다. 팔이든, 어깨든, 심장에 가까워지기 전에 계약을 끊어내지 못하면 온몸으로 번진다.”
그녀는 이미 훈련장 쪽으로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끊어내는 방법을 알고 싶으면 다른 대가를 준비해 와라. 지금은 무료 정보만큼만 줬다.”
한도영은 수첩을 닫았다.
“충분합니다. 대장님.”
크세니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른팔을 들며 훈련장 쪽에 있던 부관에게 짧은 손짓을 보냈다. 훈련 재개였다.
한도영은 수첩을 닫아 품에 넣었다. 왼팔의 문신이 욱신거렸다.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문신은 단순한 족쇄가 아니었다. 생명력을 고대 좌표 체계로 묶은 물리적 장치였다.
체계를 이해하면 장치를 분해할 수 있다. 지금은 가설일 뿐이지만, 연결 고리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전진이었다.
그는 영주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에리히 백작의 집무실에서 공유해야 할 정보가 생겼다.
훈련장에서는 검과 방패가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영주성 복도를 걷는 동안 한도영은 품 안의 수첩이 뼈에 닿는 감촉을 의식했다. 훈련장의 금속성은 점차 멀어지고 집무실 쪽 복도에서는 장부 넘기는 소리와 낮은 논의가 흘러나왔다. 문 앞에 섰을 때 재무관의 은화 가치 하락 보고가 들려왔고, 그는 문을 두드렸다.
집무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한도영이 손을 들기 전에 안쪽에서 재무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은화 가치가 지난주보다 22% 하락했습니다. 곡물 상인들이 변경백령 은화를 받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한도영은 문틈에 손가락을 걸고 가볍게 두드렸다. 에리히 백작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들어오게.”
탁자 위에는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검은 잉크로 빼곡히 적힌 숫자가 촛불 아래 번들거렸다. 재무관은 마른 체구의 중년 남자였다. 손끝이 잉크 얼룩으로 검었다.
“자문으로 임명한 이상, 영지 재정도 알아야 할 거라 생각했네.”
에리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턱선이 굳어 있었다. 한도영은 장부 옆에 놓인 은화 세 닢을 집어 들었다. 같은 중량, 같은 문양. 하나는 가장자리가 약간 마모돼 있었다.
“환율 변동이 언제부터입니까.”
재무관이 장부를 한 장 넘겼다.
“석 달 전부터 서서히. 지난주에 급락했습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에서 먼저 은화 결제를 거부했다는 소문이 돈 뒤로.”
한도영은 은화를 탁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크로이츠. 어제 사절단이 도착한 그 변경백령이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시점이 절묘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환율을 흔들고 있다는 겁니까.”
에리히가 한도영을 똑바로 바라봤다.
“가능성을 묻는 건가.”
“의심할 근거는 있습니다.”
한도영은 은화 한 닢을 손가락으로 밀며 말했다.
“영지 은화의 순은 함량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치만 떨어졌다. 공급량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누군가 신뢰를 무너뜨린 거죠.”
재무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곡물 대금을 맞출 수 없습니다.”
에리히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손가락 관절이 하얘졌다.
“얼마나 부족한가.”
“은화 2천 닢 중 3백 닢이 모자랍니다. 다음 주까지 못 맞추면 봄 파종 전에 식량이 바닥납니다.”
한도영은 장부를 훑었다. 수입과 지출. 대부분이 곡물 구매 항목이었다. 3년째 가뭄이 영지를 이렇게 옥죄고 있었다.
“환율이 급락한 시점에 맞춰 값을 올린 상인 명단은 있습니까.”
재무관이 에리히를 힐끗 봤다. 에리히가 턱을 끄덕였다.
“곧바로 조사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
한도영은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은화를 받지 않는 게 단순한 상인들의 판단이 아니라면, 이건 재정 위기가 아닙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경제적 포위입니다. 영지를 굶겨서 무언가를 받아내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에리히는 창밖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마른 들판이 가을볕 아래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네.”
에리히의 목소리는 무거웠지만 단호했다.
“자문의 의견은 기록해 두게. 환율 변동의 배후를 추적하는 데 집중하겠다.”
한도영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은화와 장부가 탁자 위에 그대로 놓인 채로, 문을 나섰다.
저녁이 깊어지며 방 안이 서늘해졌다. 한도영은 탁자 위에 수첩을 펼쳐 놓고 숯연필을 만지작거렸다. 집무실에서 기록한 내용을 왼쪽 페이지에 정리했다.
‘환율 하락 22%. 크로이츠 변경백령, 은화 결제 거부가 발단. 시점은 사절단 도착 직전.’
오른쪽 페이지에는 문신 패턴 분석이 덧대어 있었다. 크세니아와의 대화에서 확인한 혈서 문양 구조. 계약의 구속력은 서명자의 생명력에 직접 연동된다. 계약이 깨지면 생명력이 소멸한다.
한도영은 수첩의 빈 여백에 작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두 가지 키워드를 나란히 적었다.
‘계약 → 생명력.’
‘환율 → 신뢰.’
패턴이 같았다. 보이지 않는 구속. 한쪽은 피와 저주로.
다른 쪽은 경제와 굶주림으로. 목적은 동일했다. 상대방의 선택지를 제거하는 것.
만약 크로이츠 변경백이 발렌 가문의 채권을 매입했거나, 혹은 배후에서 환율 붕괴를 유도했다면— 이 재정 위기는 3년 전부터 설계된 포위망의 마지막 단계일 가능성이 있었다.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문신 부위가 욱신거렸다.
팔 안쪽으로 번져가는 패턴이 촛불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세계가 그를 규칙 속으로 편입시키는 속도. 그리고 영지가 경제적 압박으로 무너지는 속도. 둘 다 시간이 없었다.
그때 문이 두드려졌다.
느리고 작은 소리가 아니라, 주먹으로 친 듯한 빠르고 거친 노크였다.
한도영이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파스칼이었다. 얼굴은 달아올랐고 호흡은 헐떡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한도영 씨……”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을 움켜쥐고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큰일이야. 고향 쪽에서 원인 모를 열병이 돌고 있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파스칼의 오른손에 구겨진 쪽지가 들려 있었다. 잉크가 번져 있었다.
한도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탁자 위에는 수첩이 펼쳐진 채로 남았다. 왼쪽 페이지에는 환율 하락 22%. 오른쪽 페이지에는 문신 패턴과 고대 문양. 그 사이에 작은 원 안의 두 단어가 촛불 아래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계약. 생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