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변경백의 계산서

9화

파스칼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했다. 한도영이 의자를 권하고 물을 따라줬다.

“쪽지 봐도 됩니까.”

파스칼이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손끝에 가느다란 떨림이 실려 있었다.

“여기, 읽어주세요.”

한도영이 종이를 폈다. 황금빛 촛불 아래, 잉크가 번진 글자들이 춤췄다. 짧은 편지, 단 세 줄이었다.

‘마을에 열병이 돌고 있습니다. 사흘째입니다. 지금까지 일곱 명이 숨졌습니다. 같은 증상입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발신인은 파스칼의 외삼촌. 날짜는 이틀 전이었다. 전령이 하루 반을 쉬지 않고 달려온 셈이다.

“증상은 압니까.”

“메모에는…… 없어요.”

파스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시선이 좌우로 흔들렸다.

“다만…… 전령이 말로 전해준 게 있습니다.”

“뭐라고 합디까.”

“갑자기 열이 펄펄 끓고…… 온몸에 붉은 반점이 번지면서, 겨드랑이랑 목이 붓는다고…….”

파스칼은 제 목을 양손으로 감쌌다. 손가락이 림프절 부근을 무의식적으로 짚었다.

“사흘 만에…….”

말끝이 사라졌다. 한도영은 기다렸다. 촛농이 탁자 위로 똑, 하고 흘러내렸다.

“사흘 만에 죽는다고 합니다.”

방 안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한도영은 수첩을 꺼내 왼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오른손에는 숯연필을 쥐었다.

“발열 주기는.”

“……주기요?”

“열이 오르내리는 패턴 말입니다. 몇 시간마다 치솟는지, 아니면 계속 고열인지.”

파스칼의 눈꺼풀이 깜빡였다.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전령이 남긴 말을 중얼거렸다.

“밤이 되면 더 심해진다고…… 낮에는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고 합니다.”

“림프절 종창은 발병 며칠째부터.”

“그건…… 모르겠습니다. 발견했을 땐 이미 부어 있었다고만…….”

한도영이 수첩에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발열 패턴: 야간 악화. 림프절 종창: 발병 초기부터 확인. 사망까지: 약 3일.

“붉은 반점 양상은.”

파스칼이 얼굴을 들었다.

“전령이…… 팔 안쪽부터 시작해서 가슴으로 번진다고 했습니다.”

숯연필이 멎었다. 팔 안쪽. 문신이 박힌 자리와 일치했다. 우연일 수 있다. 하지만—

“전령이 확인한 환자는 한 명뿐입니까.”

“두 명이라고…… 했어요.”

파스칼의 목소리가 점점 가라앉았다.

“처음엔 다섯이었는데, 이미 둘이…….”

한도영은 손을 들어 그를 멈추게 했다. 더 파고들면 파스칼이 버티지 못할 거다. 대신 벽에 걸린 변경백령 지도를 떼어 탁자 위에 펼쳤다.

“발병 마을 위치를 표시해 주시겠습니까.”

파스칼이 다가왔다. 떨리는 손끝이 지도 남동쪽 끝, 변경백령 경계선에서 반나절밖에 안 되는 작은 점을 찍었다.

“여깁니다. 토벤 마을.”

한도영은 그 지점에 X 표시를 남겼다. 주변 지형을 살폈다. 마을은 낮은 구릉이 둘러싼 분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물길은 하나뿐. 변경백령 쪽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이었다.

“이 개울이 영지까지 이어집니까.”

“네…… 동쪽 농경지로 흘러들어갑니다.”

한도영은 X 표시에서 개울을 따라 선을 그었다. 선은 변경백령 경계를 가로질러 경작지 한복판을 뚫었다.

물길이 같았다.

전염 경로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전염원 자체가 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쪽이 오히려 더 위험한 발상이었다.

자연 발생이 아니라, 누군가 개울에 무엇인가를 풀었다면.

한도영은 수첩을 다시 펼쳤다. 이번엔 전령의 정보를 정리하는 대신 곧바로 계산했다.

“증상 발현까지 걸린 시간은.”

“……전령 말로는, 열흘 전쯤 첫 환자가 나왔다고…….”

“열흘 전 첫 환자. 그 후 사흘째부터 사망자 발생. 현재까지 누적 사망자 일곱 명.”

한도영이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계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파스칼은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은 가을입니다. 추수기라 사람들이 들판에 몰리는 시기죠. 공기 전파라면 감염 속도가 이것보다 훨씬 빨라야 합니다. 물을 통한 전파라고 쳐도 자연 역병 치고는 사망까지 사흘이란 시간이 너무 짧아요.”

수첩에는 이미 ‘자연 역병 아님 가능성’이라 적혔다. 그 옆에 더 작은 글자가 따라붙는다. ‘독소 혹은 마법 부산물.’

“한도영 씨…….”

파스칼의 목이 찢어졌다.

“저희 부모님도…….”

한도영이 고개를 들었다. 파스칼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고 턱이 경련하듯 떨렸다. 평소 움츠러들었던 태도가 전부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몇 년 전입니까.”

“육 년…… 육 년 전입니다.”

“어디서.”

“토벤 마을에서 동쪽으로 한나절 떨어진 곳. 제가 태어난 마을이었어요.”

한도영이 지도에서 토벤 마을 동쪽을 짚었다. 산 하나를 넘은 계곡 지대다.

“증상이 비슷했습니까.”

파스칼은 대답하지 못했다. 두 손이 탁자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열이…… 밤마다 심해졌습니다. 붉은 반점이 올라왔고…….”

말이 끊겼다. 한도영은 묵묵히 기다렸다. 촛불이 바람에 나부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든 밤공기가 차갑게 목덜미를 스쳤다.

“사흘 만에…… 어머니가 먼저. 이틀 뒤에 아버지가…….”

파스칼이 머리를 떨궜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한도영은 조용히 지도를 내려다봤다. 두 마을 거리는 산 하나 두고 약 스무 리. 직선거리는 더 짧다.

물길은 달랐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너무 붙어 있었다.

“그때 마을에 별난 일이 있던가요.”

파스칼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한도영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전에 없던 강한 시선이었다.

“……있었어요.”

“무엇이었습니까.”

“병이 돌기 보름쯤 전에…… 동쪽 능선에서 밤마다 빛이 보였습니다.”

“빛.”

“푸른 빛이었어요.”

한도영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푸른 빛. 펜 끝이 종이 위에 붙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빛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몰랐어요. 그냥 산 너머 귀족 영지에서 뭐 하는가 보다 했을 뿐이에요.”

“산 너머는 누구 영지죠.”

파스칼이 잠시 생각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돋았다.

“……크로이츠 변경백령입니다.”

한도영의 손이 수첩을 덮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

환율 붕괴의 발단.

사절단 파견.

토벤 마을의 발열병. 육 년 전 파스칼 부모님의 역병.

모든 화살표가 한곳을 겨누고 있었다.

“파스칼.”

한도영이 낮고 무겁게 불렀다.

“……네.”

“육 년 전 역병이 돌 무렵,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마신 물은 어디서 났습니까.”

파스칼이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목소리는 한결 또렷해졌다.

“계곡 위쪽에서 흐르는 샘이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발병하고 나서 샘물이 끊겼습니다. 바위가 무너져서 물길이 막혔다고…….”

한도영은 수첩을 다시 펼쳤다. 왼쪽 페이지에는 환율 하락 22%와 경제적 포위 가설. 오른쪽 페이지에는 계약 문신의 좌표 체계 분석. 가운데 빈 여백에 그는 새 항목을 하나 써 내렸다.

‘크로이츠 변경백령 — 육 년 전 푸른 빛. 역병. 샘물 차단.’

그리고 한 줄을 더 보탰다.

‘토벤 마을 — 개울이 변경백령으로 유입. 전염 경로 잠재.’

증거는 빈약했다. 인과도 불분명했다. 그런데도 뚜렷한 패턴이 있었다.

“영주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한도영이 수첩을 접었다. 파스칼이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지금…… 밤이 깊었습니다. 백작님도 쉬실 시간인데…….”

“이런 정보를 새벽까지 묵힐 순 없습니다.”

한도영은 곧장 일어섰다. 문신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촛불이 흔들리면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기다랗게 번졌다.

“파스칼.”

“……네.”

“당신 부모님 일, 꼭 밝힌다고 장담은 못 하겠습니다. 다만 최소한—.”

한도영이 잠시 말을 골랐다.

“최소한 이번에는 손을 놓지 않을 겁니다.”

파스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재킷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요.”

두 사람은 복도로 나섰다. 성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벽걸이 촛불 몇 개만이 통로를 희미하게 밝혔다.

에리히 백작의 집무실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한도영이 문을 두드렸다. 짧고 분명한 노크.

“들어오게.”

백작의 목소리는 피곤에 절었지만 또렷했다. 문을 열자 에리히는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재정 장부가 펼쳐져 있고, 은화 샘플도 여전히 탁자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잔받침의 차는 김이 완전히 식은 지 오래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에리히의 푸른 눈이 한도영과 그의 뒤에 선 파스칼을 번갈아 훑었다. 파스칼의 붉게 충혈된 눈가를 보자 백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토벤 마을에서 발열병이 발생했습니다. 이틀 전 기준으로 일곱 명이 사망했습니다.”

에리히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를 뒤로 밀자 낮은 마찰음이 울렸다.

“증상은.”

“고열, 붉은 반점이 팔 안쪽에서 가슴으로 확산, 림프절 종창, 발병 사흘 만에 사망입니다.”

한도영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덧붙였다.

“잠복기를 감안하면 최소 열흘 전부터 감염이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역병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근거는.”

“계절, 전파 속도, 사망까지의 시간 모두 전형적인 역병 패턴에서 벗어납니다. 가을 추수기에 발병이 시작됐는데 공기 전파라면 감염 속도가 훨씬 빨라야 합니다. 물을 통한 전파라고 해도 사망까지 사흘이란 기간은 지나치게 짧습니다.”

에리히가 턱을 쓸었다. 기사 시절부터 굳은 습관이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턱을 쓸던 버릇을 한도영은 지난 회의에서 되새겨 냈다.

“자네 의견은.”

“독소 혹은 마법 실험 부산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무실 공기가 무거워졌다. 파스칼은 문가에 선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손가락이 바지 옆구리를 꽉 움켜쥐었다.

“크로이츠 변경백령과 연관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도영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토벤 마을에서 변경백령까지 이어지는 개울을 표시한 지도였다.

“물길이 영지 동쪽 농경지로 유입됩니다. 역병이 수인성이라면 변경백령 역시 안전하지 않습니다.”

에리히가 지도를 굽어봤다. 깊게 팬 눈가에 촛불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파스칼. 자네가 전한 소식인가.”

“……예, 백작님.”

파스칼이 허리를 굽혔다. 목소리는 떨었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제 외삼촌이 보낸 전령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수고했네.”

에리히의 말은 짧았지만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벽으로 걸어가 작은 종을 한 번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참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옷 위로 겉옷만 급히 걸친 차림이었다.

“각하.”

“즉시 명령을 내리게.”

에리히가 지도를 가리켰다.

“첫째, 토벤 마을과 변경백령 사이의 모든 길목에 감시 초소를 설치한다. 둘째, 변경백령 내 모든 마을에서 발열 증상 감시 체계를 가동한다. 셋째, 동쪽 농경지로 유입되는 개울물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 대체 수원을 확보할 때까지다.”

참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집어 들었다.

“초소에 배치할 인원은 어느 정도로 할까요.”

“영주성 수비대에서 20명을 우선 차출한다. 추가 병력이 필요하면 내일 아침 재배치한다. 한도영 자문.”

한도영이 고개를 들었다.

“발열병 분석을 이어가 주게. 증상 데이터를 수집하고 발병 패턴을 추적해서 방역 계획을 수립한다.”

“알겠습니다.”

에리히가 말을 멈추고 탁자 위의 재정 장부를 한 번 바라봤다. 이윽고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환율에 역병이라…….”

혼잣말처럼 내뱉은 어조에는 절망이 아니라 차가운 분노가 실려 있었다.

“가 보게. 두 사람 다 내일 아침까지 반드시 쉬어야 한다.”

한도영과 파스칼은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다. 파스칼이 걸음을 멈추고 한도영을 돌아봤다.

“한도영 씨…….”

“말하게.”

“제 고향 일…… 백작님께 굳이 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됐는데, 어째서…….”

“육 년 전 역병과 이번 발열병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사실은 백작님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정보입니다.”

한도영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당신 부모님 이야기는…… 내가 혼자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파스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또렷하게 울렸다.

“……가 보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요.”

“그래.”

파스칼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며 계단 아래로 스며들었다.

한도영은 숙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벽의 촛불은 절반쯤 타서 줄어들어 있었다. 심야를 넘어 새벽으로 접어드는 시각.

문신 부위가 욱신거렸다.

처음엔 평소와 다름없는 미열이었다. 하지만 세 걸음도 채 떼기 전에 통증이 급격히 치솟았다.

바늘이 아니라 칼날이 팔을 찢는 듯한 감각.

한도영은 팔을 감싸쥐었다. 절로 무릎이 굽어졌다. 벽에 어깨를 기대자 식은땀이 이마로 배어 나왔다.

소매를 걷었다.

문신이 빛나고 있었다.

푸른 빛이 아니라 붉은 빛. 문양 가장자리가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목에서 시작된 붉은 선이 팔꿈치 방향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아까까지 없던 가느다란 선들이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며 피부 아래를 파고들었다.

확장 속도가 달랐다.

이전까지는 밀리미터 단위. 지금은 육안으로도 번지는 속도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계약이 가속되고 있었다.

한도영은 벽을 짚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숨이 가쁘게 뛰었다. 팔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바로 그때였다.

영민 거주 구역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 여자와 아이— 분간할 겨를이 없었다. 비명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비명.

이번에는 더 컸다. 공포가 짙게 묻어난 목소리.

이어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주성 망루에서 긴급 상황을 알리는 종이었다. 깊은 밤의 정적을 찢어발기는 소리. 한 번이 아니라 연속으로. 빠르게. 끊임없이.

한도영은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서 숨을 들이켰다.

왼팔의 열기가 옷감을 뚫고 타올랐다.

문신이 빛나고 있었다.

푸른 빛이 아니라 붉은 빛. 문양 가장자리가 숯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목에서 시작된 붉은 선이 팔꿈치 방향으로 뻗어 가고 있었다. 아까까지 없던 가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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