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의 신
4화
차만식이 물러섰다.
한 걸음. 등이 냉동고 철문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입가에 묻은 하얀 침을 손등으로 닦지 않았다. 작은 돼지 눈이 서준혁의 손을 향했다. 변조 스티커를 쥔 손.
“그거.”
차만식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법정에서 인정받으려면 공급망 전체를 입증해야 한다.”
서준혁은 스티커를 내려놓지 않았다. 차만식의 왼손 약지, 금반지가 형광등 빛에 반짝였다.
“네 딸 사건도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됐지.”
서준혁의 손등에서 힘줄이 솟았다. 왼손 흉터 부위가 하얗게 질렸다. 입술은 붙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차만식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등이 철문 손잡이에 닿았다. 그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열면서도 시선은 서준혁에게 고정했다.
“이 바닥이 다 그렇지.”
돌아서며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복도로 나가기 전, 어깨 너머로 한 마디를 던졌다.
“내일 교육청에서 보자고.”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올라갔다.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가 한 번, 두 번.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
서준혁은 30초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에 쥔 스티커를 조리복 내의 주머니로 옮겼다. 단추를 채우는 손끝이 평소보다 느렸다.
차만식의 마지막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증거 불충분.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2년 전 그날, 경찰서에서 들었던 똑같은 말. 서류 뭉치를 내려놓으며 담당 형사가 했던 말.
냉동고 압축기가 돌아가는 진동만이 복도에 남았다.
차만식은 주차장으로 걸어가며 박종태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 두 번.
“예, 사장님.”
박종태의 목소리에는 잠이 섞여 있었다. 차만식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급식실 계약직 하나가 자료를 만지고 있다.”
“자료라면...”
“내일 교육청에 먼저 연락해라.”
수화기 너머에서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박종태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굳어졌다.
“어떤 자료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네가 몰라도 되는 자료야. 위생과장에게 문자 넣어. 오전 면담 요청으로.”
차만식은 전화를 끊었다. 차 시동을 걸며 백미러로 학교 건물을 올려다봤다. 지하 급식실 쪽 창문은 어두웠다.
다음 날 오전 9시 50분.
교육청 위생과 사무실.
서준혁은 접수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흰색 셔츠에 검은 바지. 조리복이 아닌 평상복 차림이었다. 손에는 A4 봉투 하나.
“제보입니까?”
안내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서준혁은 봉투를 데스크 위에 올렸다.
“HACCP 기록 조작과 유통기한 변조 스티커.”
직원의 눈썹이 올라갔다. 봉투를 받아 들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사진 17장. HACCP 기록 복사본.
“잠시만 기다리세요.”
직원이 자리를 떴다. 유리문 너머로 과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5분이 지났다.
직원이 돌아왔다. 봉투는 그대로였지만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이미 학교 측에서 내부 점검 자료를 선제출했습니다.”
봉투를 데스크 위에 다시 밀어둔다.
“접수는...”
“중복 제보는 별도 접수번호가 발급되지 않습니다.”
서류 뭉치가 데스크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서준혁은 봉투를 집지 않았다.
“누가 선제출했는지 확인할 수 있나.”
“개인정보 보호 대상입니다.”
서준혁은 3초 동안 직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직원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봉투를 집어 들고 돌아섰다.
로비로 나왔다.
그리고 그를 보고 멈춰 섰다.
박종태.
행정실장 특유의 헐렁한 교직원 정장 차림으로 로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커다란 서류 가방. 이마에는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박종태가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만 올라갔다.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드는 시늉까지 했다. 마치 우연한 만남을 반기는 양.
서준혁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1층 현관을 빠져나가기 전, 한 번 더 박종태 쪽을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중이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다.
교육청과 학교. 사전에 맞춰진 시간. 이미 제출된 점검 자료.
서준혁은 현관문을 밀고 나서며 생각했다. 이쪽은 내부고발을 예상하고 있었다. 접수번호조차 발급되지 않는 구조. 차만식 혼자가 아니다.
햇빛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든 봉투의 무게가 달라져 있었다. 이 종이 뭉치는 이제 교육청에서 공식 기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로비 유리창 너머로 박종태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서류 가방을 팔에 끼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위생과로 올라갈 모양이었다.
서준혁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갤러리를 열었다. 변조 스티커 17장의 사진. HACCP 기록 사진. 위치 태그와 시간 태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본은 이미 확보해뒀다.
박종태의 미소가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 미소가 확인시켜준 건 단순한 유착이 아니었다. 4년 전부터 이어진 패턴. 은성초에서 한성고까지. 같은 업체, 같은 방식, 같은 조작.
교육청은 첫 번째 관문에 불과했다.
오후 3시. 급식 마감 후 사무실은 조용했다.
서준혁이 문을 열었을 때, 강시은은 박종태의 책상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은 탁상 달력 위에 얹혀 있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강시은이 고개를 들었다. 뿔테 안경 너머 눈이 살짝 커졌다. 손을 달력에서 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오늘 교육청 갔었죠?”
서준혁은 대답 없이 그녀를 지나쳐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조리복 주머니에서 HACCP 기록지 사본을 꺼내 책상 위에 정리하며 말했다.
“갔다 왔다.”
강시은의 시선이 잠시 달력으로 돌아갔다. 탁상 달력 오늘 칸에는 볼펜으로 '교육청 선제 대응 완료'라고 적혀 있었다. 글씨는 박종태의 것이었다.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접수 거부.”
서준혁은 서류를 서랍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강시은의 오른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그 손목을 감싸쥐었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숨을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
“저... 지난주 금요일 검수 때...”
거기서 멈췄다.
서 있는 자세가 살짝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를 삼키듯 목이 움직였다. 손이 천천히 내려와 바인더를 움켜쥐었다.
서준혁은 그 떨림을 보고 있었다. 손끝의 떨림, 입술을 깨무는 작은 움직임, 초점을 잃고 달력을 응시하는 눈빛까지.
“뭘 말하려던 거지.”
“아닙니다. 그냥... 매뉴얼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강시은은 빠르게 몸을 돌렸다. 서둘러 사무실을 나가며 한 번 더 달력을 힐끗 봤다. 그 시선을 서준혁은 놓치지 않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강시은의 손이 멈칫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재빨리 뒤를 확인했다. 그리고 두 걸음 다시 들어와 탁상 달력을 한 장 찍었다. 셔터음은 무음.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고 사라졌다.
서준혁은 그 모든 걸 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 박종태의 책상으로 걸어가 달력을 내려다봤다. '교육청 선제 대응 완료'라는 메모. 펜이 종이를 누른 깊이로 보아 적잖이 힘이 들어간 필적.
그는 달력을 한 페이지 넘겨 전날과 다음날도 확인했다. 빈칸이었다. 다시 오늘 칸으로 돌아왔다.
강시은의 반응은 분명했다. 떨림, 불완전한 질문, 달력을 찍은 행동. 그녀는 이 메모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게 어떤 패턴인지도.
4년 전. 은성초등학교. 위생 점검표가 이 냉동고에 보관된 시기.
서준혁은 달력에서 손을 떼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갑을 열어 2년 된 스티커 원본을 꺼내 손등에 펼쳐 보며 생각했다. 강시은에게도 무언가 있다. 지금은 말하지 못할 무언가가.
오후 4시. 쓰레기 분리수거장.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삭은 냄새가 올라왔다. 서준혁은 기름때 낀 콘크리트 바닥에 서서 유리병과 캔을 구분하며 분리수거함에 던져 넣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뒤돌지 않았다.
“서 선생님.”
박종태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한 톤 낮고 조심스러웠다. 서준혁은 빈 유리병을 초록색 함에 넣고 손을 털며 돌아섰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박종태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급식실 뒷문 밖, 소각장 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다.
“말씀하시게.”
서준혁은 고무장갑을 벗으며 대답했다. 장갑을 쓰레기통 옆에 놓았다.
박종태가 한 걸음 다가섰다. 손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마에는 이미 송글송글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조리사 계약 건인데요.”
그가 봉투를 앞으로 내밀었다.
“계약 연장에, 전임 조리사 추천서까지 써 드리겠습니다. 이 학교장 명의로요. 다른 학교 가실 때도 아주 유리하실 겁니다. 대신...”
잠시 뜸을 들이고 이마를 닦았다.
“가지신 거 있잖아요. 그런 건 이 업계에선 누구에게도 득이 안 됩니다. 그냥 넘기시고, 조용히 이 학교를 떠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서준혁은 봉투를 받지 않았다. 조리복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변조 스티커의 복사본이었다.
그걸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박종태의 눈이 종이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이걸 말하는 건가.”
“그... 그게...”
“내가 떠날 때는.”
서준혁은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천천히, 소리가 나게.
“이 급식실이 청소된 후다.”
그리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네 겹.”
종이를 가로로 반으로 찢었다. 찢어지는 소리가 빈 통로에 울렸다.
“여덟 겹.”
다시 반으로 찢었다. 종이 조각이 발밑에 흩어졌다.
박종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이건 단순한 사본일 뿐이다.”
서준혁이 바닥에 떨어진 종이 조각 위로 한 걸음 다가섰다. 박종태는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원본 위치는 알려주지 않겠네. 그리고 앞으로 모든 검수와 위생 관리는 매뉴얼대로다. 내가 있는 한, 여기서 장난은 끝이다.”
박종태의 입술이 떨렸다. 뭐라 말하려다 닫혔다.
“지금...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아세요? 조리사 주제에...”
“위협인가.”
서준혁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좋다. 그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지.”
박종태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걸음이 빨라졌다가 건물 모퉁이에서 잠시 멈췄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이 메시지 창을 열었다. 수신자, 차만식.
'더 강한 조치 필요. 지금 당장.'
전송음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넣었다.
서준혁은 바닥의 종이 조각을 주워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손등의 흉터가 엄지에 닿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었다.
늦은 밤. 컨테이너 숙소.
서준혁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강시은이 찍은 달력 사진을 확대해 '선제 대응'이라는 글자의 필압을 살폈다.
창밖에서 엔진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싸구려 블라인드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가로로 찢어져 들어왔다.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컨테이너 앞 공터에 천천히 정차했다. 번호판 불빛은 꺼져 있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음성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표시되지 않았다. 서준혁은 3초 동안 화면을 보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서 조리사.”
차만식의 목소리였다. 낮고 천천히, 음미하듯 말했다.
“자넨 딸 사건의 공식 사고 기록을 본 적 없지? 내일 아침 네 컨테이너 앞에 배달해 주지.”
메시지가 끝났다.
서준혁은 일어나 블라인드를 손가락으로 벌렸다. 창밖으로 검은 승용차가 보였다. 뒷좌석 유리는 어둡게 틴팅돼 있었다. 운전석 창문 너머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차량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턴하지 않고 그대로 뒷길로 빠져나갔다. 꼬리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준혁은 창밖을 응시했다.
오른손이 블라인드를 움켜쥐었다. 알루미늄 날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손등의 흉터가 하얗게 당겨졌다.
그는 주먹을 쥔 채로 차량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