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식의 신
6화
냉동고 문이 닫혔다. 서준혁은 박종태의 손에 들린 서류를 훑었다. ‘조리사 개인 신상 확인 요청’. 굵은 글씨가 형광등 아래서 번들거렸다.
“야간 냉동고 점검 중입니다, 박 주임님.” 서준혁이 먼저 입을 열며 조리복 앞치마를 털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이 시간에 여기서 뭘…” “내일 감사 준비요.”
서준혁은 뒤돌아 걸었다. 등 너머로 박종태가 휴대폰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락커룸에 도착해 휴대폰을 꺼냈다.
프린터 출력 시간. 오늘 새벽 5시 23분. 증거 인멸 완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CCTV가 꺼진 시간대를 입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전 6시 30분. 급식실 형광등이 차례로 켜졌다. 서준혁은 조리대 앞에서 앞치마 끈을 조였다.
CCTV 본체 LED는 꺼져 있었다. 강시은이 바인더를 가슴에 안고 들어왔다. 눈은 붓고 충혈됐으며, 녹음기 펜던트가 목에 걸려 있었다.
하급 조리사가 냉동 닭고기 상자를 들다 멈췄다. “영양사님, 이거 오늘 검수 도장 안 찍혔는데…” “문제없어요. 검수 완료된 겁니다.” 강시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서준혁은 채소 다듬기를 계속하며 듣고 있었다.
박종태가 급식실 입구에 나타나 넥타이를 매만지며 냉동고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30초 만에 나온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교육청 감사 있습니다. 다들 준비 철저히 하세요.”
오전 10시. 교육청 김 팀장이 급식실로 들어왔다. 검은 정장 차림에 두꺼운 서류 가방을 들었다.
차만식이 뒤를 따랐다. 올백머리에 번들거리는 미소를 얹고 있었다. “이쪽이 냉동 창고입니다.
영양사 선생님, 안내 부탁드립니다.” 차만식이 강시은에게 손짓했다. 강시은이 바인더를 열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난주 HACCP 기록지입니다. 냉동고, 냉장고 모두 정상 범위 내에서…”
김 팀장이 기록지를 받아 페이지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혁이 조리대에서 걸어나왔다. “냉동고 기록지도 확인하시죠.” 시선이 모두 그에게 꽂혔다.
차만식의 미소가 굳었다. “뭘 하려는 거지? 지금 감사 중이야.” “알고 있다.”
서준혁은 냉동고 문을 열었다. 찬 공기가 쏟아졌다. 네 번째 선반 앞에 걸린 기록지를 떼어 김 팀장에게 건넸다.
“온도 그래프를 보십시오.” 김 팀장이 종이를 가까이 들여다봤다. “영하 18도로 일정하군요. 문제 있습니까?” “그 일정함이 문제입니다.”
휴대폰을 꺼내 어제 찍은 사진을 확대했다. “냉동고는 네 시간마다 제상 주기가 돌아갑니다. 제상 중에는 내부 온도가 영하 10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집니다.
이게 정상 패턴입니다.” 화면을 김 팀장 앞으로 들이밀었다. “어제까지 걸려 있던 기록지입니다. 오전 10시 영하 12도, 오전 11시 영하 11도.
제상 주기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오늘 기록지는 모든 시간대가 영하 18도입니다.” 김 팀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기록지가 교체된 것 같은데…
두 장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까?” “어제 기록지는 폐기했습니다. 매일 아침 교체가 원칙이니까.” 차만식이 끼어들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프린터 출력물이군요.” 서준혁은 기록지 뒷면을 가리켰다. “오늘 새벽 5시 23분에 뽑은 기록지가, 어제 하루 종일 냉동고에 붙어 있었다는 겁니까.” 차만식의 입술이 움직였으나 말이 안 나왔다. 김 팀장이 체크리스트를 꺼내 연필로 몇 군데 표시했다. “음… 기록 보관 상태는 양호하네요. 온도도 기준치 내에 있고. 특별한 위반 사항은 없습니다. 서류 정리 잘되어 있군요.”
“잠깐만요, 김 팀장님.” 강시은이 한 걸음 나섰다. “기록지가 교체된 정황이 명백한데…” “영양사 선생님.” 차만식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서류상 하자가 없다는데, 굳이 문제를 만드실 필요 있나요.” 강시은의 입이 다물어졌다. 김 팀장이 자리를 떴고, 박종태가 허리를 굽신이며 배웅했다.
차만식은 움직이지 않았다. 냉동고 문이 열린 채 멈춰 선 그가 서준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네가 뭘 아는 것 같군.” 속삭임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
침이 입가에 하얗게 맺혀 있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어디서 났지. 대기업 QC 팀장 출신이 급식실 조리사라… 이력이 참 재밌어.”
서준혁은 냉동고 문을 닫으며 그를 마주 보았다. “과거 신선유통 감사 때와 똑같은 수법이더군. 4년 전 그때도 제상 주기 오차를 이용했지.” 차만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눈꺼풀이 경련하듯 떨렸다. 급식실 안 움직임이 전부 멈췄다. 하급 조리사들은 국자와 식칼을 든 채 굳어 있었고, 강시은은 바인더를 가슴에 쥔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새끼가…” 차만식이 이를 악물었다. 만년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서준혁은 등을 돌려 조리대로 걸어갔다. 채소를 집어 들자 칼날이 도마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차만식은 10초쯤 서 있다가 구두 굽을 타일 바닥에 찍으며 출입구로 사라졌다.
강시은이 조리대 옆으로 다가왔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지금 감사가 무마됐는데…
그냥 넘어갔으면 될 일을.” “넘어간 적 없다.” 서준혁은 칼을 내려놓고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증인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 강시은의 오른손이 목의 녹음기로 올라갔다가 멈췄다. 손끝이 펜던트를 빙글 돌렸다.
박종태가 현관에서 돌아와 넥타이를 풀며 차만식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 조리사. 잠시 후에 행정실로…” “안 갑니다.” 서준혁이 조리복 앞치마를 풀며 락커룸 쪽으로 걸었다.
“오늘 배식 준비 남았습니다. 잡무는 퇴근 후에.” 박종태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강시은은 물끄러미 서준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녹음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네 시간 전, 차만식이 박종태에게 전화로 지시한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감사 전에 위장 작업을 끝내. 그리고 그놈 신상부터 털어. 그녀는 녹음기를 조리복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약 한 시간 뒤, 박종태가 조리실로 다시 내려왔다. 그는 서준혁의 눈을 피하며 강시은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말했다. “강 조리사, 사장님께서 부르십니다. 지금 바로.” 강시은은 녹음기를 품 안에서 다시 한 번 눌러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사무실은 담배 연기로 뿌옇다. 차만식이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소매를 걷어 올렸고, 금시계가 형광등을 튕겼다. 박종태는 문 옆에서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강시은이 들어왔다. “앉아.” 차만식이 턱짓했고, 강시은은 접이식 의자 끝에 걸터앉았다.
“그 새끼, 서준혁. 신선유통 이름을 알더라. 감사장에서 꺼내더라고.” 차만식이 박종태를 봤다. “어떻게 안 거냐.” 박종태가 목을 움켜쥐었다. “그게… 아마 냉동 창고에서 옛날 서류를…” “네가 서류 정리 똑바로 안 해서 그 새끼한테 정보가 샌 거냐, 이 병신아?” “아닙니다 사장님. 제가 분명히…” “닥쳐.” 차만식이 책상을 쳐 재떨이가 덜컹거렸다. “그 새끼 과거 털어. 대기업에서 왔다며? QC 팀장이었다고? 왜 짤렸는지, 어디서 뭐 하다 왔는지. 그리고.” 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딸이 있었대. 은성초에서 죽었어. 그 사고 기록이랑 연결되는 거 전부 찾아.”
박종태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맺었다. “오늘 안으로 끝내겠습니다.” 차만식이 몸을 돌려 강시은을 마주하자, 강시은의 어깨가 굳었다. “너.
요즘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다고?” 차만식이 느릿하게 일어서서 그녀 쪽으로 걸었다.
강시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녹음기 펜던트로 올라갔으나, 차만식은 그 손길을 보지 못했다. “네가 한 짓, 내가 잊은 줄 알아? 은성초 때.
네가 마지막으로 검수한 날. 꽁지 빠지게 도망친 거. 이 바닥이 다 그렇지.
자기 살자고 도망치는 거. 이해해. 근데.” 차만식이 강시은의 의자 등받이를 짚었다.
“그때처럼 지금 또 이상한 짓 하면. 그땐 진짜 끝이야.”
강시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매뉴얼대로… 검수 절차에 따라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래.
그렇게 해.” 차만식이 손을 뗐다. “가봐.” 강시은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문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벽을 짚고 위액을 삼켰다. 그녀는 뛰기 시작했다.
조리실 뒤편. 서준혁이 냉장고 온도 기록지를 정리하는데, 불규칙한 구두 굽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강시은이었다.
얼굴이 새하얗고 뿔테 안경 너머 눈이 풀려 있었다. “지금… 지금 바로 당신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차만식 사장님이. 과거 경력, 딸, 전부. 박 실장님한테 오늘 안으로 털어내라고 지시했어요.
당신이 신선유통 얘기 꺼낸 것 때문에… 미친 거예요. 완전히.” 서준혁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들은 거냐. 더 있나.” 강시은이 침을 삼키며 녹음기를 손으로 감쌌다. “…없어요.” “거짓말. 네게도 협박했군.”
강시은이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돌아서 걸어갔다. 영양사실 문이 닫혔다. 서준혁은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입력했다.
‘보고서 사본. 재발행 경로 확인 중. 긴급.’ 전송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닫았다.
영양사실. 강시은은 문을 잠그고 의자에 주저앉아 녹음기를 재생했다. “네가 한 짓, 내가 잊은 줄 알아?” 차만식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파일 끝까지 재생됐다. 녹음 시간이 3분 47초 늘어나 있었다. 파일 이름을 ‘4월증거03’으로 확인하고 저장 버튼을 눌렀다.
저녁 8시. 급식실은 텅 비고 배식대 위 형광등만 윙윙거렸다. 서준혁은 냉동고 앞에 서서 HACCP 기록지 사본을 조리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휴대폰을 열어 오후에 촬영한 기록지 사진과 이전 사진을 나란히 띄웠다. 온도 그래프가 영하 12도에서 영하 18도로 바뀐 지점을 확인한 뒤, 2년 전 은성초 위생 점검표 사진으로 넘겼다. 유통기한 스티커 확대 사진.
한성고 냉동 창고에서 뜯어낸 스티커의 활자 간격은 0.8mm. 은성초 사진 속 스티커는 1.2mm. 같은 업체 인쇄라면 폰트 설정이 동일해야 하는데 다르다. 두 개의 인쇄 지점, 두 개의 위조 라인.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차만식이었다. 손에 서류 뭉치를 든 채 천천히 다가왔다.
“아직 안 갔냐. 열심이네. 퇴근도 안 하고 냉동고나 뒤지고.
뭐 찾았어? 이런 데서 뭘 찾아봐야 소용없어. 이미 다 갈아치웠으니까.” 서준혁이 냉동고 문을 닫았다.
“기록지 말이냐. 프린터 출력 시간이 새벽 5시 23분이더군. 새 종이.
모든 온도가 영하 18도. 잉크 색 동일. 데이터가 너무 깨끗해.” 차만식의 턱 근육이 실룩였다.
“이 자식이 지금…” “증거는 충분하다. 신고도 이미 했다.”
차만식이 짧고 건조하게 웃었다. “신고? 아 그 핫라인 전화?
개털렸는데. 네가 전화 끊기 전에 이미 내 귀에 들어왔어. 접수 번호도 알아?
H-2024-0031. 니네 딸이 은성초에서 죽던 날 사고 접수 번호랑 똑같은 인간이 처리했지, 아마.” 서준혁의 눈빛이 한 겹 차가워졌다. 차만식이 한 걸음 더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네 딸 죽은 건, 니가 무능해서야. 네가 그날 검수 똑바로 했으면 안 죽었어. 근데 넌 몰랐지?
유통기한 지난 닭고기인지. 여기서도 똑같이 발리고 꺼져. 내일이 니 마지막 출근이다.” 차만식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서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개.” 차만식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 서준혁이 뒤돌며 조리복 주머니에서 스티커 사진을 꺼냈다.
“활자 간격이 다르다. 4년 전 은성초 스티커와 이번 한성고 스티커. 폰트 설정이 일치하지 않아.
같은 위조 공장에서 찍지 않았다는 뜻이다. 너는 두 개의 인쇄 라인을 운영하고 있어. 하나가 막히면 다른 걸로 돌리는 구조.” 차만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정적이 흘렀다. “증명해 봐.” “할 거다.” 서준혁이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복도 저편. 배식대 그림자 뒤에서 유다희가 숨을 죽이고 액션캠으로 복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만식의 목소리가 녹음 표시줄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는 녹화를 종료하고 영상 편집 앱을 열었다. 제목: ‘한성고 급식 비리, 유통기한 조작 증거’. 예약 업로드. 내일 오전 10시.
차만식은 지상 주차장 차 안에서 핸들을 움켜잡았다. 두 개의 위조 라인. 그걸 짚어냈다.
손이 떨렸다. 서류 뭉치를 조수석에 던지고 박종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
전 직원 조리실 집합시켜. 서준혁 그 새끼. QC 팀장 경력, 은성초 딸, 전부 까발려.
그리고 해고야. 이건 개인적 원한으로 잠입한 사기꾼이다. 알겠어?” 전화를 끊고 시동을 걸었다.
냉동고 앞. 서준혁은 스티커 사진을 확대했다. 활자 간격 차이 0.4mm.
4년 전 은성초 급식 메뉴표 하단의 납품업체 스탬프, ‘(주)신선유통’. 스티커 외곽선 테두리 굵기가 현재 한성고 스티커보다 0.3mm 더 두꺼웠다. 서로 다른 판본이라는 물리적 증거.
그는 조용히 사진을 저장 폴더에 옮겼다. 주먹을 쥐자 손등의 흉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찾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