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 도감 - 12화 완결
2화
형조 대기실 의자는 좁았다.
서연은 무릎 위에 손을 포갠 채 벽의 수침 시계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기다림은 익숙했다. 사흘 전 내의원 기록실 앞에서도, 어제 회현궁 별실에서도 같은 자세로 앉아 있던 터였다.
문이 열렸다. 하급 관리 하나가 허리를 굽혔다.
“참하 나리, 대감께서 뵙자 하십니다.”
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몄다. 손가락 끝에 남은 잉크 자국은 어젯밤 비누로 여러 번 문질렀으나 아직 옅은 푸른빛으로 남아 있었다.
집무실은 대기실보다 세 배는 넓었다. 동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문서 선반에는 형조 양식의 기록철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중앙 탁자 위에는 어제 강윤이 가져간 검시 기록이 펼쳐져 있었다. 은비녀는 보이지 않았다. 증거물 보관실로 이미 넘어간 모양이었다.
강윤은 탁자 너머에 앉아 있었다. 서연이 문을 들어서자 손가락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인사말은 없었다.
“앉으시오.”
서연이 앉자 강윤은 검시 기록을 집어 탁자 중앙으로 밀었다. 원본이었다. 어제 그가 접어 품에 넣었던 바로 그 종이였다. 필체가 아래에서 위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고, 멍 자국 기술 부분의 먹 농도가 다른 단락보다 옅었다.
“이 부분.”
강윤의 손가락이 마지막 세 줄을 짚었다. 멍 자국의 추정 시각을 기록한 대목이었다. ‘좌측 갈비뼈 아래 울혈반, 축시에서 인시 사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됨’이라는 문장 위에서 손끝이 멈췄다.
“축시에서 인시 사이.”
읽는 목소리가 평온했다. 다만 손가락을 떼는 타이밍이 한 박자 늦었다. 어제 샘터에서 보인 동작과 같은 리듬이었다.
“어제는 시간이 없어 묻지 못했다. 이 추정 시각은 어떤 근거로 적은 것이오.”
서연은 기록을 내려다보았다. 지난밤 별실에서 수없이 반복했던 문장이었다. 대답할 내용도 정해 두었다.
“사후 경직의 진행 정도와 울혈반의 색상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샘터의 기온은 발견 당시 석축 온도 기준으로 한랭했고, 시신의 사지 경직이 완전히 진행되지 않은 점을 고려했습니다.”
“진찰 기록과 대조했소?”
서연의 호흡이 반 박자 멈췄다. 의녀 진찰 기록 사본은 지금 품 안에 있었다. 하지만 강윤이 그 존재를 아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의녀의 진찰 기록은 내의원 소관입니다.”
“내의원 일을 겸하는 참하께서 못 볼 이유가 뭐요.”
강윤의 대답이 즉시 돌아왔다. 서연은 잠시 시선을 탁자 모서리에 두었다가 다시 들었다.
“진찰록과 검시록은 기술 방식이 다릅니다. 의녀는 생체 반응을 기준으로 삼고, 검시는 사후 변화만으로 판단합니다. 같은 멍 자국이라도 피부 온도가 남아 있을 때와 사후 냉각 이후는 색상 단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차이 때문에 추정 시각이 반나절 이상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오.”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강윤은 팔짱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선은 여전히 기록 위에 머물러 있었다. 서연이 추궁 회피로 읽히지 않을 만큼만 기술적인 답변을 선택한 것을 그는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논거 자체에 빈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강윤이 서랍을 열고 새 붓과 먹, 빈 검시 기록 용지를 꺼냈다. 형조 공식 양식이었다. 좌측 상단에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직접 써 보시오.”
서연이 붓을 잡았다. 손끝의 잉크 자국이 붓대 아래로 살짝 드러났다. 강윤의 시선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기록 용지로 돌아갔다.
서연은 이전 기록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같은 사실을 형조 양식의 어휘로 재구성했다. ‘울혈반’ 대신 ‘어혈흔’, ‘추정됨’을 ‘사료됨’으로 바꾸었다. 의녀 진찰록의 ‘황갈색에서 자색으로 진행’이라는 표현은 일부러 넣지 않았다. 두 기록을 나란히 놓을 자가 있을 경우, 그 유사성이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어휘 선택이 다르군.”
강윤이 서연의 붓끝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제 기록과 같은 내용인데 표현이 바뀌었소.”
“어제는 현장에서 구술한 것을 정서한 것입니다. 오늘은 처음부터 글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구술과 집필은 문장의 밀도가 다릅니다.”
“그 차이를 인식하고 통제하는 자는 드물지.”
강윤이 일어나 서연의 곁으로 걸어왔다. 한 걸음 거리에서 붓이 움직이는 속도를 지켜보았다. 서연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필체는 오빠 서윤의 것을 본떠 익힌 그대로였다. 다만 ‘울혈반 추정 시각’ 부분에서 붓을 살짝 멈췄다가, 검시록 기술 방식으로 일관되게 써 내려갔다.
“충분하오.”
강윤이 손을 내밀어 서연이 쓴 기록을 들어 올렸다. 원본과 나란히 탁자 위에 펼쳤다. 두 기록은 어휘와 문장 순서가 달랐지만, 기술된 사실의 골격과 필체의 필압 분포는 일관되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조 직속 임시 검시관을 맡아 주시오.”
서연이 붓을 내려놓았다. 임명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전하의 재가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이미 어제 보고했습니다. 증거물이 궁내 사건과 관련될 소지가 있어 내의원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윤이 손을 뻗어 서랍에서 새 문서 용지를 꺼냈다. 임명장 양식이었다. 자신의 붓에 먹을 찍어 첫 줄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 집무실 문이 두 번 울렸다. 하급 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감, 회현궁 상궁 처소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강윤이 붓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요.”
“상궁 월영 마마의 친필이라 하옵니다.”
서연의 손이 옷자락 위에서 멈췄다. 월영은 회현궁 내명부 서열 2위의 상궁이었다. 그가 왜 형조에 서찰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제 별실에서 의녀 진찰록을 베껴 가기 전, 기록고 복도에서 마주친 침방 나인—그가 월영의 소속이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강윤은 서찰을 받아 들고 봉함을 뜯지 않은 채 탁자 한쪽에 내려놓았다. 붓을 다시 들어 임명장의 둘째 줄을 써 내려갔다.
“읽지 않으십니까.”
“임명장이 먼저다.”
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그가 덧붙였다.
“검시관의 임명은 증거물이 형조에 도착한 이후 한 시진 안에 완료해야 하는 절차요. 서찰은 그다음이다.”
서연은 대답 대신 자신이 방금 쓴 기록을 정리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월영의 서찰이 오늘 아침이 아니라, 강윤이 임명장을 쓰는 바로 이 순간에 도착한 것은 우연일 리 없었다. 누군가가 이 집무실의 움직임을 회현궁에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었다.
강윤이 마지막 줄을 마치고 직인을 찍었다. 임명장을 서연 쪽으로 돌렸다.
“오늘부터 이 사건의 모든 검시 기록은 이 임명장 아래서 나온다. 내의원이 아니라 형조의 권한으로.”
서연은 두 손으로 임명장을 받아 들었다. 붉은 직인 옆으로 강윤의 서명이 먹물에 번지지 않고 또렷이 박혀 있었다. 자기 이름이 아니라 오빠의 이름으로 받는 임명장이었다.
강윤이 서찰을 집어 들었다. 봉함을 뜯는 소리가 집무실을 가로질렀다.
늦은 오후, 내의원 기록고 복도는 조용했다.
서연은 의녀 신분증을 기록고 직인에게 내밀었다. 직인이 증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홍련의 진찰 기록을 열람하러 왔습니다. 회현궁 사건 관련 검시 대조용입니다.”
“기록고 안에서는 필사만 가능하오.”
직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서연은 익숙한 약재 냄새 사이로 기록 선반이 늘어선 방으로 들어섰다.
사흘 전 이곳에서 진찰록을 베꼈을 때와 같은 자리. 벽 쪽 창으로 늦은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었다.
서연은 궁녀 진찰 기록이 분류된 함에서 홍련의 이름을 찾았다.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진찰 날짜는 사망 추정일로부터 약 열흘 전. 처방 약재는 소염과 어혈 제거 위주였다. 기록 말미의 멍 자국 기술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좌측 갈비뼈 하단 장방형 자반, 색은 황갈색에서 자색으로 진행 중. 진찰 시각 기준 최소 세 시진 전 형성으로 판단됨.
서연은 품에서 검시 기록 사본을 꺼내 나란히 놓았다. 자신이 쓴 멍 추정 시각은 축시에서 인시 사이. 사망 시점에 맞춰 기술한 것이지만, 진찰록과 비교하면 열흘 간격으로 같은 멍이 두 번 기록된 셈이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두 기록을 교차 대조하는 순간 시차가 드러난다.
서연은 붓을 들었다.
진찰록의 멍 기술 문구 위에 얇게 먹을 올렸다. 원본의 글씨체를 흉내내어 ‘진찰 시각 당일 발생한 것으로 추정’이라 고쳐 적었다. 처방전의 어혈 약재 순서도 검시 기록과 부합하도록 두 가지를 바꾸었다. 지혈 약재를 뒤로, 활혈 약재를 앞으로.
먹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이건 더 이상 대필이 아니다. 내 손으로 기록을 만든 것이다.
종이가 마르자 서연은 진찰록을 원래 순서대로 함에 넣었다. 빈 별지 한 장을 꺼내 수정한 내용을 그대로 필사해 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직인이 문밖에서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기록고를 나섰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녁 무렵, 회현궁 상궁 월영의 처소.
탁자 위에 두 개의 문서가 펼쳐져 있었다. 왼쪽은 형조에서 송부된 검시 기록 사본, 오른쪽은 내의원에서 보관하다 열람용으로 빌려온 진찰 기록 대본이었다.
월영은 촛불 아래서 두 문서를 번갈아 읽었다. 검시 기록은 글씨가 단정했고 문장도 정리돼 있었다. 진찰록 대본은 필체가 굵고 약재 기술 순서가 관례와 달랐다.
시녀가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형조에서 새로 온 서류인가 보옵니다.”
“그래. 검시 기록이라 하더구나.”
월영이 진찰록 마지막 쪽을 넘겼다. 처방 약재 목록이 열을 지어 적혀 있었다. 활혈 약재가 먼저, 지혈 약재가 뒤에.
어혈 제거 처방에서 이 순서는 옳지 않다.
그녀는 검시 기록을 다시 들었다. 같은 약재가 다른 순서로 기술돼 있었다. 형조 검시관이 진찰록을 참고했을 텐데, 참고한 쪽과 원본의 문장 배치가 달랐다.
“어혈 처방에서 활혈제를 먼저 쓰는 법은 없지.”
월영이 혼잣말을 했다.
“약방마다 다르지 않사옵니까.”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내의원 관용 처방전이다. 순서가 같아야 해.”
월영은 별지 한 장을 꺼내 불일치 부분을 적었다. 약재 두 가지의 기술 순서, 멍 상태 표현의 미세한 차이. 종이를 세 번 접어 개인 문서함에 넣었다.
“의녀 중에 서 참하의 내의원 일을 보좌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다. 이름이 서연이던가.”
“그리 아옵니다.”
“그 의녀가 최근 어떤 일을 맡았는지 조용히 알아보거라.”
시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 정도까지 알아볼까요.”
“행적이면 충분하다. 접촉은 하지 마라.”
월영은 다시 진찰록을 덮었다. 문서함 뚜껑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방 안에 머물렀다.
밤, 형조 집무실.
방 안에는 촛불 세 개가 켜져 있었다. 탁자 위에는 임명장 한 통과 봉인된 목제 증거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서연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내의원에서 돌아온 뒤 회현궁 별실을 거쳐 곧바로 이곳으로 왔다. 손에 잉크 자국이 아직 얇게 남아 있었다.
문이 열리고 강윤이 들어왔다. 관복 차림 그대로였다.
“행정 절차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강윤은 임명장을 집어 서연 쪽으로 밀었다.
“형조 참의 직권으로 서 참하를 이번 사건 임시 검시관으로 지명한다. 오늘부로 발효다.”
서연이 임명장을 받아 펼쳤다. 내의원 참하 서윤의 이름과 형조 직인의 인영이 선명했다.
“증거물은 직접 확인하시는 편이 빠르겠습니다.”
강윤이 봉인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마포 천 조각과 함께 은비녀가 놓여 있었다. 꽃잎 일곱 개가 촛불을 받아 희미하게 반사됐다.
강윤이 상자 전체를 서연 앞으로 밀었다.
“내일 아침까지 비녀 문양의 표준 양식과 대조한 보고서를 받겠다. 궁중 장신구 법제와 실물의 차이가 있으면 전부 기록하라.”
서연은 상자를 받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손끝이 은비녀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상자의 위치를 바로잡았다.
“표준 양식 문건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가져올 동안 여기서 기다려라.”
강윤이 문을 나섰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방 안에 서연 혼자였다.
그녀는 촛불 하나를 들어 상자 가까이 옮겼다. 마포 천 조각을 조심스럽게 들어내자 은비녀가 완전히 드러났다.
꽃잎 일곱. 중심 당초문. 길이는 네 치.
서연은 은비녀를 천 위에 올린 채 뒤집었다. 비녀 안쪽, 꽃잎이 고정된 부분의 품계 문양을 살폈다. 촛불을 비스듬히 기울여 빛을 모았다.
문양의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이어지는 선 하나가 미세하게 이격돼 있었다. 표준 양식이라면 모란 잎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야 하는데, 이 비녀는 선이 한 올 어긋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강윤이 문 앞으로 돌아왔다. 손에 표준 양식 문건을 들고 있었다.
“무엇을 찾았습니까.”
서연이 은비녀를 들지 않은 손으로 이격된 선을 가리켰다.
“여기를 보십시오.”
강윤이 다가와 상자 옆에 서서 비녀를 내려다보았다. 서연이 촛불을 조금 더 기울이자 그림자가 문양의 굴곡을 또렷하게 만들었다.
강윤이 서랍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확대경을 꺼내 비녀 위로 가져갔다. 잠시 숨을 멈추고 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확대경 너머로 문양의 이격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란 잎맥이 중간에서 한 번 끊겼다가 어긋난 각도로 이어져 있었다.
“이건… 표준 양식이 아니야.”
강윤이 확대경을 내려놓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