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독초 도감 - 12화 완결

9화

등불 하나 없는 사택 침실. 서윤은 요 위에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오른손을 들어 무언가 쓰려다 허공에서 멎었다. 입가에 검붉은 실핏줄이 다시 번졌다.

문이 열렸다.

서연이 숨을 몰아쉬며 방으로 들어왔다. 강윤은 문밖에 발을 멈췄다. 서연은 신발조차 벗지 못한 채 요 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

서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미소를 짓는 듯했지만 입술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소은아.”

손을 들어 서연의 손등을 더듬어 찾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네 손이 춥구나.”

서연이 두 손으로 오빠의 손을 감쌌다. 오히려 자신의 손이 더 차가웠다.

“왜 말하지 않으셨소. 언제부터였소.”

“오래됐다. 십 년…… 아니, 그보다 더.”

서윤이 품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더듬어 꺼냈다. 손이 떨려 뚜껑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서연이 받아 열었다. 안에는 작은 백자 찻잔 하나. 검은 때가 잔 안쪽 바닥에 얼룩져 있었다.

“이게 무엇이오.”

서윤이 잔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잔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굴곡을 더듬었다.

“한장현이 내게 준…… 독차 잔이다. 십 년 전, 내가 누이를 위해 검시관이 되기로 한 바로 그날. 한장현이 조용히 마시라며…… 나는 그게 독인 줄 알면서도 마셨다.”

서연이 잔을 움켜쥐었다.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누구요. 한장현은 누굽니까.”

“대왕대비의 오라버니…… 현 국구의 하수인이었다. 검시관이 되려면 입단속이 필요하다 했다. 네 존재를 묻는 대가로…… 내 목숨을 요구했다.”

서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듯했다.

“그런데 왜…… 왜 지금껏.”

“십 년을 더 산 것은 이 독이 그리 급한 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 독차의 성분이 폐부를 다 녹였다. 내의원 진단서는 그것을 해소병이라 속였을 뿐.”

서윤이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켰다.

“상자 아래를 보아라.”

서연이 상자 바닥을 만졌다. 종이가 접혀 있었다. 꺼내 펼쳤다. 핏자국으로 가득한 혈서. 붉은 글자가 촛불 아래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잔에 남은 독의 성분을…… 내가 직접 기록했다. 도감 특정 배합과 일치하는 잔류물이다. 내일…… 강 참의와 함께 대조하거라.”

강윤이 문밖에서 움직였다. 서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혈서를 손에 꼭 쥔 채, 오빠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서윤이 서연의 손을 꼭 쥐었다. 그 힘이 마지막 기력이었다.

“네 이름으로…… 살아라, 소은아.”

손의 힘이 풀렸다. 서연의 손바닥 안에서, 오빠의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촛불이 한 번 일렁였다. 밤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서윤의 가슴이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다.

서연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혈서를 접지도, 찻잔을 내려놓지도 못했다. 강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연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 말없이 움켜쥔 그 손을 보았다. 피가 날 듯이.

“서연.”

서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내려다보았다. 혈서의 붉은 글자가 손금 사이로 번져 있었다.

“내가…… 이걸 읽어야 하오.”

강윤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혈서를 무릎 위에 펼쳤다. 손끝이 떨렸지만 눈은 붉은 글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은비녀 문양 조감선의 미세한 굴절…… 독초 도감 제 37 배합표…… 투여 경로 암호.’

서연이 멈췄다.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바닥으로 작은 신음을 눌러 막았다. 강윤이 혈서를 조심스럽게 빼내어 눈으로 빠르게 읽었다.

“은비녀와 독초 도감을 잇는 암호 체계다. 오라버니가 십 년 동안 혼자 해독하신 것이다.”

“왜…… 왜…….”

“살아 계시는 동안은 네가 위험해질까 봐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남긴 것도 같은 이유다.”

서연이 오빠의 손을 잡았다. 아직 차가워지기 전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붓을 쥐던 자리마다, 기록을 남기던 자리마다.

“이제 이것은…… 내가 써야 하오.”

강윤이 혈서를 접어 품에 넣고, 다른 손으로 찻잔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여기서는 안 된다. 증거물을 확보하고 공식 절차를 밟아야 한다.”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어져 있었다.

“그럼 어디서.”

“형조 내 집무실에서. 자정이 지나면 인적이 없다. 지금 가야 한다.”

서연이 마지막으로 오빠의 손을 놓았다. 손가락이 천천히 펴지며, 붉은 핏물이 손톱 밑에 엉겨 있었다.

형조 강윤 집무실. 인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강윤이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촛불 세 개를 한 번에 켰다. 탁자 위에 독차 잔과 혈서를 나란히 놓았다.

서연이 품에서 독초 도감 사본을 꺼내 펼쳤다.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강윤이 말없이 그 손에서 사본을 받아들고, 대신 혈서를 앞에 펼쳐 주었다.

“37 배합표. 어디쯤이오.”

서연이 혈서를 짚었다.

“이쪽이오. 백화독 배합 순서…… 그다음 적화독.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소이다. 조감선의 굴절 방향이 투여 순서를 나타내고…….”

강윤이 독차 잔을 들어 촛불 아래서 천천히 기울였다. 잔 안쪽의 검은 때를 손톱으로 살짝 긁자, 작은 가루가 손톱 끝에 묻어났다.

“잔류물이 아직 남아 있다. 이것을 분석하면…….”

서연이 혈서를 가리켰다.

“오라버니가 이미 혈서에 기록했소. 백화독은 적화독의 전구 물질이며…… 이것이 폐부를 서서히 녹이는 독차의 핵심 배합이오. 그리고 은비녀의 조감선 굴절이 이 배합 순서를 암호처럼 표시하고 있소.”

강윤이 서랍에서 월영의 은비녀 원본을 꺼냈다. 촛불 가까이 비녀를 들고 혈서의 묘사와 번갈아 보았다. 비녀의 은빛 몸체에는 모란 당초문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중 한 잎맥이 중간에서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이 굴절이다.”

서연이 다시 혈서를 짚었다.

“37 배합표의 세 번째 독약명…… 백화독을 의미하는 표시로다.”

강윤이 독초 도감 문서를 펼쳐 37 배합표를 찾았다. 손가락으로 세 번째 줄을 따라 내려갔다.

백화독. 그 옆에 작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을유년 정월 이후 폐기.’

“25년 전 세자 사건 이후 폐기된 독.”

“바로 그것이오. 한장현이 오라버니에게 마시게 한 것도, 폐기된 독을 이용한 독차였소.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게.”

강윤이 비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 암호 체계는…… 독살 지침서로군. 누군가 은비녀만으로 독을 배합할 수 있도록 만든 것.”

“맞소. 누군가는 은비녀를 쥐고 있기만 하면, 독초 도감을 열람할 자격이 있는 누군가가 배합을 지시한 것이오.”

“대왕대비. 현 국구께서 직접 오라버니를 통해 독을 유통시키고, 은비녀로 그 암호를 공유했다.”

서연이 혈서를 접었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이제 이것을 공식 증거물로 등록해야 하오. 그리고…… 내일 조정 간담회를 소집해야 하오.”

회현궁 대왕대비 처소 내밀실. 대왕대비는 촛불 하나만 켜고 상 위에 손을 포개고 앉아 있었다. 김상선이 무릎을 꿇고 보고를 올렸다.

“서윤…… 방금 사망했사옵니다.”

대왕대비가 손가락으로 상을 한 번 두드렸다.

“월영 상궁은 어디 있느냐.”

“아직 회현궁에 대기 중이옵니다.”

“들여라.”

월영이 들어와 읍했다. 대왕대비는 그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상 위의 찻잔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무관청에서 당한 수모는 잘 들었다. 검시 기록 위조를 고발한 자가 도리어…… 네 증거를 의심받게 된 그 순간 말이다.”

“마마.”

“하지만 나는 네게 아직 기회를 주마. 중종 전하께서 내일 조정 간담회 소집을 요구하실 모양이다. 네가 전하의 뜻을 돌려야 한다.”

월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전하의 뜻을 돌리라 하심은…….”

“네가 알면서도 입을 다문 그날을 기억하겠지.”

대왕대비의 목소리는 낮고 느렸다. 촛불이 심지에서 한 번 일렁였다.

“을유년 정월, 세자 동궁전에서 나는 네게 물었다. 독차의 출처를 아느냐. 너는 몰랐다고 답했다. 그러나 네 은비녀에 새겨진 문양은…… 바로 그날 밤의 배합표를 암호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월영의 손이 바닥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마마께서는…… 알고 계셨사옵니까.”

“네가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너를 벌하지 않은 것은…… 네가 회현궁의 상궁으로서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쓸모가…… 이제 전하를 돌리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옵니까.”

“네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서연의 신분을 문제 삼아 내일 간담회 전까지 무관청에 다시 고발하고, 강윤이 그를 변호할 수 없도록 증거를 보강하라. 그리하면 나는…… 세자 사건의 진실을 영원히 묻겠다.”

월영이 일어나지 않았다. 손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왕대비가 처음으로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너의 침묵이 너를 지금껏 살렸다. 이제 네 입으로 다시 묻어라. 그리하여 네 목숨을 부지하라.”

월영이 이마를 바닥에 댔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

“명…… 받들겠사옵니다.”

그러나 일어나면서, 월영의 오른손은 품 안쪽을 짚고 있었다. 속옷 사이에 감춰둔 작은 밀지.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 한 장. 회현궁을 나서며 처음으로 숨을 들이켰다. 내일 자시 조정 간담회 전까지, 이 밀지가 서연에게 닿아야 했다.

전달 경로는 하나. 낙빈.

이튿날 오시 말. 무관청 접수처. 강윤이 독차 잔과 혈서를 정식 증거물로 등록하기 위해 접수처 창구에 서류를 내밀었다. 서연이 그 뒤편에 서 있었다. 눈가는 여전히 붉었지만 허리는 곧았다.

김상선이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서류를 받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오.”

“서윤의 독차 중독을 증명할 증거물이오. 독차 잔과 혈서. 공식 등록을 요청하오.”

김상선이 서류를 훑지도 않고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시선은 강윤이 아니라 서연을 향했다.

“혈서는 누가 작성한 것이오.”

“서윤 본인이 직접 기록한 것이오.”

“서윤 참하는…… 사망 직전까지 붓을 들 수 있었소? 내의원 기록에 따르면 그의 오른손은 진전이 심하여 붓을 쥐지 못하는 상태였소.”

서연이 대신 대답했다.

“오라버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록을 남겼소. 그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 혈서의 획마다 남아 있소.”

“누이가 대필했을 가능성은.”

강윤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혈서의 필적은 서윤 본인의 것이다. 필요하다면 형조 문서고에 보관된 그의 이전 기록과 대조하겠소.”

김상선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더욱 접수할 수 없소. 대필 의혹이 있는 문서는 증거물로 인정되지 않소. 게다가…… 서연의 신원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소.”

“신원 문제는 이미 무관청 심문에서 증거 부족으로 연기된 사안이오. 더 이상 그를 구금할 근거는 없소.”

김상선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서연의 검시관 임명 문서를 보여주시오. 원본을 직접 확인하겠소.”

서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강윤이 탁자를 짚었다.

“검시관 임명은 형조 참의인 내 권한이오. 무관청 검률이 이의를 제기할 사안이 아니오.”

“참의 대감. 형조 참하 서윤의 신원을 빌려 검시관으로 활동한 자의 임명 문서가 진본인지 확인하는 것은…… 무관청의 정당한 권한이오. 거부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서연을 체포하겠소.”

강윤이 똑바로 김상선을 보았다.

“그럼 체포 영장을 제시하시오.”

김상선이 잠시 멈칫했다. 대왕대비의 봉서는 그의 품 안에 있었으나 이미 발부된 체포 영장은 아니었다. 김상선이 손을 내렸다.

“……오늘은 물러가겠소. 다만 이것만은 기억하시오. 내일 자시 조정 간담회 전까지 대왕대비 마마의 공식 입장이 전달될 것이오.”

강윤이 증거물을 자신의 품에 도로 넣었다.

“내가 형조 참의로서 이 증거물을 임시 보관하겠소. 공식 등록 절차는…… 내일 조정 간담회에서 직접 요청하겠소.”

김상선이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서연을 흘겨보았다. 복도로 사라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임명 문서는 오라버니의 집에 있어요. 하지만 원본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

“이유를 알고 있소.”

강윤이 대답했다. 서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낙빈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에 작은 종이 쪽지를 쥐고 있었다.

“참의 대감.”

강윤이 아닌 서연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서연이 받아 펼쳤다.

월영의 필체. 한 줄뿐이었다.

‘내일 자시 전, 대왕대비가 너를 체포하려 한다. 조정 간담회 전에 증거를 등록하지 못하면…… 네 신원 증명과 함께 증거도 무효가 된다.’

서연이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월영 상궁이…….”

강윤이 낙빈에게 물었다.

“어디서 받은 것이오.”

“회현궁 후문 밖 하수구 돌틈. 월영 상궁이 밀지를 숨기는 장소입니다. 오늘 새벽에 그곳을 지나다 확인했습니다.”

강윤이 무관청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형조 집무실로 가야겠소. 증거를 정리하고 내일 간담회 준비를 시작하오.”

형조 강윤 집무실. 해질녘이 창문을 붉게 물들였다. 강윤이 탁자 위에 독차 잔, 혈서, 월영의 은비녀, 도감의 사본을 한 줄로 늘어놓았다. 서연은 월영의 밀지를 펼쳐 그 옆에 놓았다.

“내일 조정 간담회 전에 증거를 등록하려면…… 무관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전하께 소송을 청원하는 방법뿐이오.”

강윤이 붓을 들어 백지 위에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친히 주재하시는 조정 간담회라면, 증거 제출 절차가 간소화된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대왕대비의 반격을 전부 받아내야 한다.”

서연이 혈서를 펼쳤다. 붉은 글자가 저녁 빛에 더욱 선명했다.

“내가 직접 간담회에 출석해서 이 증거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겠소. 대왕대비가 나를 체포하려 하기 전에…… 먼저 이 증거를 공개하겠소.”

강윤이 붓을 멈추고 서연을 바라보았다. 눈이 붉었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서연은 오빠의 시신 앞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손은 혈서를 꼭 쥐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서연. 내일 그 자리에서 네가 직접 말한다면…… 네 신원이 공개될 수도 있소. 대왕대비는 기어코 그것을 문제 삼을 것이오.”

“알고 있소이다.”

“네가 네 이름으로 서서…… 진실을 말한다면.”

“오라버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그것이었소. ‘네 이름으로 살아라.’ 내가 이 증거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면…… 그 말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오.”

강윤이 붓을 내려놓았다. 손을 들어 탁자 위에 놓인 서연의 손을 가볍게 덮었다. 따뜻했다.

“그럼 나는 네 옆에서 증거를 대조하고 법적 논리를 제시하겠소. 우리 둘이 함께…… 이 증거를 조정 대신들 앞에서 증명하오.”

서연이 손을 뒤집어 강윤의 손을 마주 잡았다. 잠시, 그렇게 있었다. 촛불이 반쯤 줄어들 때까지 말이 없었다.

“내일 자시.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소.”

서연이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강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의 네 증거물을 한 번 더 짚고 붓을 다시 들었다.

“시작하겠소.”

촛불이 한 번 흔들렸다. 창밖에는 어둠이 완전히 깔렸다. 회현궁 대왕대비 처소에서는 김상선이 긴급 보고를 올리고 있었고, 월영은 처소에 홀로 앉아 밀지의 마지막 한 줄을 더 쓸지 망설이고 있었다.

서연이 오빠의 혈서를 다시 펼쳐 보았다. 마지막 줄에 쓰인 문장.

‘네 이름으로 살아라, 소은아.’

혈서를 월영의 밀지와 나란히 놓았다. 두 개의 증거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일, 이 두 증거로 대왕대비의 은비녀와 독초 도감 암호 체계를…… 조정 대신들 앞에서 증명하겠소.”

서윤이 서연의 손을 꼭 쥐었다. 그 힘이 마지막 기력이었다.

“네 이름으로…… 살아라, 소은아.”

손의 힘이 풀렸다. 서연의 손바닥 안에서, 오빠의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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