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록
11화
정전의 공기는 평소보다 무거웠다. 향 연기조차 용상 앞에서 멈춰 선 듯 흐르지 않았다.
이운이 국왕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왼손에 든 상소문이 살짝 들렸다.
“전하.”
한 번 끊었다.
“십오 년 전 선왕후의 죽음을 재심 청원하옵니다.”
정전 왼편의 이조판서가 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오른편 도승지가 기록하던 붓을 멈췄다. 국왕이 용상 팔걸이를 짚었다.
“태상군. 선왕후라면——”
“모후의 일입니다. 병이 아니었습니다. 독이었습니다.”
중신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번졌다. 국왕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한 번 두드렸다.
“증거가 있느냐.”
이운이 옆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 그 뒤에 서 있던 서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소매 깊이 추녀 끝이 스쳤다. 품속의 은비녀가 옷감 너머로 냉기를 전했다.
“서 검률. 네 증거를 펼쳐라.”
서인녀가 용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전하. 세 가지 기록의 불일치를 먼저 아뢰겠습니다.”
국왕이 손을 들자 승지의 붓이 다시 움직였다. 서인녀가 품에서 기거주기 누락 쪽을 꺼내 펼쳤다.
“첫째. 신유년 계동 11월 24일 자 기거주기. 이날 선왕후께서 마지막 탕약을 드셨습니다. 모든 날짜의 기거주기에는 세 시진마다 탕약 시각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날 오시 탕약 기록만 누락되었습니다.”
이조판서가 홀을 든 손을 내렸다. “삼중 보관 체계라면 사본과 대조——”
“사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쪽만 사본이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원본 기록을 삭제하고 사본조차 만들지 못하게 한 증좌입니다.”
정전이 조용해졌다. 승지의 붓소리만 이어졌다.
서인녀가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둘째. 내의원 물금초목부 사본. 재편철 흔적이 있습니다. 15년 전 해당 월의 페이지만 제본 실이 교체되었고, 종이 질감도 전후 기록과 상이합니다.”
도승지가 목을 길게 빼고 종이를 살폈다. 서인녀의 손가락이 제본 구멍을 가리켰다.
“원래 구멍은 세 개. 지금은 네 개입니다.”
“원본은 어디 있느냐.” 이운의 물음이 짧았다.
“내부 기록 원본. 부재합니다. 삼중 보관 체계의 기본 원칙은 원본, 사본, 상아패 첨부 밀봉본이 각각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금초목부의 내부 기록 원본은 도서관 어디에도 없습니다. 누군가 원본을 제거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본에 재편철 흔적을 남겼습니다.”
국왕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멈췄다.
“누가?”
“물금초목부는 정3품 이상 내의원 관원만 열람할 수 있는 기밀 문헌입니다. 십오 년 전 그 권한을 가진 분. 그리고 지금도 그 권한을——”
“태상군.”
주렴 뒤에서 울려 나온 음성이었다. 정전의 모든 시선이 왼쪽으로 쏠렸다.
왕태비 민씨가 주렴을 걷고 천천히 걸어나왔다. 육중한 가체 아래 흑요석 은비녀가 아침 햇살을 받아 검게 빛났다.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조회도 시작하지 않은 시각에 무슨 일이냐.”
국왕이 몸을 일으켰다. “대비마마. 듣고 계셨다면——”
“들었다. 참 안타깝구나. 열다섯 해 전 일을 이리 꺼내다니.”
왕태비의 입꼬리에 옅은 보조개가 생겼다. 서인녀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약재 찌꺼기 주머니가 손가락에 닿았다.
“일어나거라, 서 검률. 네가 지금 내게 물금초목부를 건드렸다 했느냐.”
서인녀가 고개를 들었다. “물었습니다.”
“내 대답이 필요하더냐.”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답은 이 안에 있습니다.”
서인녀가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약재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그것이 무엇이냐.” 국왕의 물음이었다.
서인녀가 비단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회흑색 분말이 안쪽 천에 묻어 있었다.
“십오 년 전. 선왕후의 마지막 탕약 그릇에서 긁어낸 잔여물입니다.”
왕태비의 검지에 감긴 금가락지가 미세하게 돌아갔다.
“누가 보관했느냐.”
“소신이.”
정전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설 내관이 굽은 등을 조금 더 굽히며 앞으로 나왔다. 네모난 목제 시보계가 걸음에 맞춰 허리춤에서 흔들렸다. 벼루처럼 갈라진 손등이 드러나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국왕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아뢰어라.”
“내의원 설 내관. 당시 선왕후의 탕약 그릇을 씻던 자. 마지막 날 그릇에 남은 잔여물을 긁어 보관했습니다.”
“어찌하여.”
설 내관의 작고 깊은 눈이 잠시 흔들렸다. “냄새가 달랐습니다. 당일 처방된 약재 냄새와 그릇에 남은 냄새가 상이했습니다.”
서인녀가 비단 주머니의 분말을 검은색 견본 천 위에 조금 떨어뜨렸다.
“내의원 정백문을 소환해 주십시오.”
국왕이 손을 들자 입회 진행관이 정전 밖으로 빠져나갔다. 잠시 뒤 정백문이 내의원 참봉의 예복을 갖추고 정전으로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예를 올렸다.
“네가 감정하라.”
국왕의 명에 정백문이 일어나 견본 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은침을 꺼내 분말을 찔러 햇빛에 비추고 냄새를 맡았다.
“회흑색. 매끄러운 촉감. 냄새가 약간——”
“무엇이냐.”
“은엽초입니다, 전하. 수침하면 잎이 은빛으로 변하는 독초. 이 분말 상태 그대로도——” 다시 은침을 들어 견본 천을 찔렀다. “작약이 없습니다. 처방에 작약이 배합되어야 은엽초의 독성이 완화됩니다만——”
“여기에 없단 말이냐.” 이운의 물음이 꽂혔다.
정백문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대답했다. “예. 모후의 처방에 결명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약재 배합은——”
“치료가 아니라. 처음부터 독약이었다.”
이운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왕태비의 흑요석 은비녀가 크게 흔들렸다. “네가 무슨——”
“내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전하. 증거 둘. 물금초목부 사본은 대비전에서 발행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국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비마마께서는 정3품 이상 내의원 관원이 아니십니다.”
서인녀가 세 번째 서류를 꺼냈다. “소영의 진술서입니다. 장상궁이 궁녀 채아의 사망 시각에 폐정자로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 초경 세 각과 이경 첫 각 사이. 순찰부에서 누락된 시각과 일치합니다.”
“장상궁을 들게 하라.”
국왕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태비가 몸을 돌렸다. 얼굴의 온기가 사라지고 입술이 바짝 마른 선으로 굳어졌다.
“전하. 이것은——”
“대비마마. 앉으십시오. 아직 물을 것이 남았습니다.”
왕태비의 왼손이 금가락지를 한 번 비틀었다.
그때 정전 문이 열렸다. 장상궁이 좁은 어깨로 긴 그림자를 끌며 들어왔다. 값싼 조화 참빗이 흔들렸다. 가느다란 눈이 정면을 향했다. 증언대 앞에 멈춰 서자 소매가 짧게 닳은 장상궁 예복이 촛불 아래서 바래 보였다.
“하문 받드옵니다.”
말끝이 메아리처럼 정전을 돌았다. 장상궁의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정전의 공기는 무거웠다. 내의원 정백문이 약재 감정 결과를 마지막으로 보고하고 물러서자, 용상 위의 국왕이 손을 들었다. 입회 진행관이 목청을 돋웠다.
“장상궁. 증언대에 오르라.”
주렴 뒤에서 왕태비의 흑요석 은비녀가 움찔했다. 장상궁이 정전 좌측 문으로 들어섰다. 칙칙한 장상궁 예복이 바닥에 쓸렸고, 발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증언대 앞에 멈춰 선 그녀의 오른쪽 눈꺼풀 위 쥐젖이 횃불에 붉게 물들었다.
국왕이 내려다보았다. “십오 년 전 선왕후의 탕약 배합을 조정한 자가 누구냐.”
장상궁의 목소리는 지문을 읽듯 평탄했다. “소인이옵니다.”
정전이 술렁였고, 이조판서가 홀을 떨어뜨릴 뻔했다.
“누구의 명이냐.”
“대비마마의 분부로, 하문 받드옵니다.”
주렴이 철썩 하고 흔들렸다. 왕태비가 몸을 일으켰다. “장상궁.” 왕태비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금가락지 낀 검지가 주렴 틀을 움켜쥐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내가 언제——”
“대비마마.” 형조판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손에는 물금초목부 사본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이 기록은 대비전에서 압수한 문건입니다. 내의원 정본과 대조 결과, 3쪽에서 7쪽까지 재편철 흔적이 확인되었사옵니다.”
왕태비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편철이 바뀌었다고——”
“또한.” 형조판서가 책장을 넘겼다. “기거주기 누락 쪽에 기록된 날짜, 신유년 계동 11월 24일. 선왕후께서 마지막 탕약을 드신 날이옵니다. 물금초목부 사본에서 바로 그 날짜의 독초 출납 기록만 내부 기록 원본과 불일치합니다.”
왕태비의 입술이 열렸으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흑요석 은비녀가 한 번 더 떨렸다.
이운이 왼편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담묵색 도포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장상궁. 배합을 어떻게 바꿨나.”
장상궁이 고개를 돌렸으나 이운의 눈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 “초오와 계피의 분량을 늘리고, 목단피—— 작약의 껍질 성분을 제거하였사옵니다. 분부대로.”
“그 결과.”
“은엽초의 독성이 배가되었사옵니다.”
주렴 너머에서 작은 신음이 들렸다. 대비전 장상궁 하나가 왕태비의 팔을 부축했으나, 왕태비가 장상궁의 손을 뿌리쳤다. “태상군.” 왕태비의 시선이 이운에게 꽂혔다.
웃는 듯한 입꼬리가 굳어져 있었다. “이것이 무슨 짓이냐. 십오 년 전 일을 지어내——”
“대비마마.” 형조판서가 다른 문건을 들어 올렸다. 종이에는 작약을 제거한 은엽초 배합 지시가 쓰여 있었고, 하단에 찍힌 화압은 왕태비의 괴석 문양이었다. “이 문건은 도서관 비밀 서고의 벽감에서 발견되었사옵니다. 대비마마의 친필 화압이——”
왕태비가 눈을 감았다 떴다. 왼쪽 볼의 보조개가 깊게 패었다. “장상궁. 네가——”
장상궁의 회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움직여 주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십오 년 전 같은 날 밤, 마마께서 친히 쓰신 배합 지시서를 이 년에게 건네받았사옵니다. 보관하라——”
“거짓!” 왕태비의 외침에 정전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렸다. 여섯 개의 횃불이 일시에 꺼질 듯 깜빡였다. “네가! 네가 나를——” 왕태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으나 눈물은 없었다. 금가락지가 주렴 틀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장상궁의 마른 손이 약 주머니를 만졌다. 쑥 냄새가 희미하게 퍼졌다. “마마.
배합 지시서 외에도——” 장상궁의 손톱 밑 검은 찌꺼기가 빛에 드러났다. “당시 탕약 그릇에서 긁어낸 약재 찌꺼기가 남아 있사옵니다. 설 내관이 십오 년간 보관해온——”
이운의 검은 눈동자가 움직였고, 턱 근육이 긴장됐다.
형조판서가 무릎을 꿇었다. “전하. 증거가 충분하옵니다. 대비마마의 체포를——”
국왕이 손을 들었다. 용안은 창백했고, 손가락이 용상 팔걸이에서 미끄러졌다. “······형조판서.” 국왕의 음성이 무거웠다. “법대로 하라.”
왕태비의 몸이 굳어졌다. 눈이 세 번째 느리게 깜빡였으나 이번에는 떨리지 않았다. 의금부 관원 넷이 정전 안으로 들어왔다.
좌측 문으로는 태비를, 우측 문으로는 장상궁을 향했다. 왕태비가 돌아섰다. 흑요석 은비녀가 마지막으로 한 번 반짝였다.
주렴을 젖히고 퇴장하는 발소리가 느렸으나 넘어지지 않았다. 장상궁은 의금부 관원이 손목을 잡기도 전에 스스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회색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의금부 관원들이 두 사람을 데리고 정전을 빠져나갔다.
정적이 흘렀다. 형조판서가 일어서며 말했다. “전하. 한 가지 더 아뢰올 일이——”
그때 이운이 형조판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조판서. 지금은——”
“서 검률. 아니——” 형조판서가 정전 중앙에 서 있는 서인녀를 돌아보았다. 서인녀의 망건 없는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흩어져 있었다. “여인 서씨의 신분 사칭 건입니다.”
서인녀의 손이 소매 속 은비녀를 찾았다.
“전하. 대연왕조 법도에 따라, 여성이 검률을 사칭한 죄는 관직 박탈과 의금부 구금입니다.”
국왕이 서인녀를 내려다보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법도를 어찌할 수 없구나.”
이운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턱 근육이 당겨지고 왼쪽 손날의 흉터가 소매 밖으로 드러났다. “전하.” 반말이었으나 예를 갖춘 속도였다. “이 여인이 아니었다면 십오 년 전 모후의 죽음은——”
“태상군.” 국왕의 손이 용상 팔걸이를 내리쳤다.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정전이 다시 얼어붙었다. “네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국왕의 음성이 낮아졌고, 호흡 사이 공백이 있었다. “그러나 법은 법이다.”
이운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돌처럼 박혀 있었다. 왼손이 허리춤의 은고리 칼집을 쥐었다 놓았다.
서인녀가 고개를 숙였다. “전하.” 그녀의 목소리는 또박또박했다. “소녀는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만으로——” 잠시 숨을 들이켰다. “이미 목적을 이루었사옵니다.”
이운이 서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묻는 말에 답이나 해라.”
서인녀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았다. 이운의 짙고 투명한 눈동자가 떨리지 않았으나, 눈물샘이 파인 듯한 다크서클이 더 깊어 보였다.
서인녀가 낮게 말했다. “답할 것이 없습니다. 법도대로——”
“됐다.” 이운이 말을 잘랐다. 의금부 관원들에게로 몸을 돌렸다. “인계 절차를 진행해라.”
의금부 관원 둘이 서인녀의 좌우로 다가섰다. 서인녀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때 정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기처에 있던 서단운이 문을 밀치고 들어서려다 입회 진행관에게 막혔다. “서 군관. 안 됩니다. 지금은——”
“내 동생이!” 서단운의 외침이 문틈으로 갈라져 들어왔다. 서인녀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오라버니.”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움직였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의금부 관원들이 서인녀를 정전 중앙 복도로 이끌었다. 세 걸음째에 서인녀가 멈췄다. 소매 속에서 은비녀를 꺼냈다. 검시침 대신 써온 그것이 손바닥에 차갑게 놓였다. 비녀 끝이 실내 횃불에 반짝이다 멎었다.
고개를 돌렸다. 왼편에 이운이 서 있었다. 담묵색 도포의 소매 끝이 떨리고 있었으나, 손은 허리춤 칼집에 올려져 있었다.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인녀가 이운의 검은 눈동자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이운이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침묵이 대화의 전부였다.
서인녀가 은비녀를 다시 소매 속으로 밀어 넣고 몸을 돌렸다. 발소리가 정전을 빠져나갔다. 의금부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