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록
2화
밤사이 촛농이 식은 검시실은 한기가 돌았다. 서인녀는 탁자 앞에 선 채 손바닥 위로 은비녀를 굴렸다. 소매 속 약봉지의 무게가 팔뚝 안쪽을 눌렀다. 등불 하나만 켜둔 실내는 그림자가 짙었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검시실 문이 열렸다.
이운이었다. 담묵색 도포에 왼손은 허리춤 칼집 근처에 둔 채였다. 얼굴을 반쯤 가린 그림자 사이로 눈동자만 고정되어 있었다.
“태상군 전하.”
서인녀는 한 박자 늦게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사찰단이 목울대를 눌러 숨이 가볍게 끊겼다.
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도 닫지 않았다. 탁자 위 검시 도구들을 실루엣이 길게 가로질렀다.
“늦은 시간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탁자 위 은비녀 쪽에서 이운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
“순찰부 기록을 보았다.”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초경 세 각에서 이경 첫 각 사이. 그 시간대에 취화전 후원을 지나는 순찰 경로가 없다.”
서인녀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움찔했다.
“기록상으로는 그래 보일 수 있습니다만, 실제 순찰 경로와 기재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찰부 기록은 교대 시점에 일괄 기재하므로——”
“곤장 스무 대다.”
이운이 말을 잘랐다.
“기록 누락. 순찰병이 감수할 형벌치고는 가볍지 않지. 초경 직후가 언제인지 아나.”
한 걸음 다가왔다.
“채아의 사망 추정 시각이다.”
등불 아래 드러난 얼굴은 눈가의 짙은 다크서클과 정제된 턱선을 가졌다. 예상보다 젊었지만 눈빛은 칼날 같았다.
“검시록에는 순찰 경로 누락에 관한 언급이 없다. 경미한 압흔과 미확인 분말. 그것뿐이더군.”
서인녀는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을 조이는 면포 붕대가 갈비뼈를 압박했다.
“검시록은 시신 상태만 기재하는 문서입니다. 순찰부의 기록 이상은 검률의 소관이 아닙니다.”
“그래서 묻는 거다.”
이윤이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이 길고 마디가 굵은 것이 검시 도구를 오래 다룬 손과 닮아 있었다.
“자네가 본 시신은 교살이었나.”
서인녀의 눈꺼풀이 떨렸다.
“경부의 압흔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전형적인 교살 흔적과는——”
“묻는 말에 답이나 해라.”
마지막 음절에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경부의 압흔만으로는 교살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
끝을 또박또박 맺었다.
“안면 울혈도 불일치했습니다. 압흔의 깊이에 비해 안구 결막의 출혈이 미미했고, 설골 주변 조직의 손상 반응도 전형적이지 않았습니다. 목을 졸랐다면 남아야 할 흔적이 남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운의 눈썹 한쪽이 올라가려다 멎었다.
“흔적이 남지 않았다. 그게 무슨 뜻이지.”
“교살이 사인이 아닐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서술입니다.”
그렇게 답하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말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이운이 팔짱을 풀었다. 도포 자락의 은고리 장식이 희미한 소리를 냈다.
“재미있군. 순찰부는 구멍이 났고, 검시록은 축소 기재됐고, 검률 본인은 교살이 아닐 가능성을 입에 올린다. 자네, 뭘 숨기고 있나.”
서인녀는 대답 대신 탁자 위 검시 도구들 사이에서 확대경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지만 움직임은 매끄러웠다.
“숨긴 게 아니라 확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의심하신다면 직접 확인하시면 됩니다.”
검시대 위 채아의 시신을 덮은 흰 천을 목 아래까지만 걷었다. 손가락은 기억대로 움직였다.
“여기입니다.”
경부 좌측의 끈 자국을 확대경으로 비추었다. 피하 출혈이 띠 모양으로 번져 있었지만, 끈의 폭에 비해 내부 손상이 얕았다.
이운이 검시대 반대편에 서서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얕군.”
“압박의 강도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강하게, 이후에는 힘이 빠진 흔적입니다. 교살이라면 보통 반대 양상을 보입니다. 저항이 시작되면 끈을 더 강하게 조이게 되니까요.”
이운의 시선이 서인녀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붓글씨 사마귀가 박힌 검지와 중지. 확대경을 고정하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 미확인 분말이라는 건.”
서인녀는 확대경을 내려놓고 미리 준비한 견본 천을 꺼냈다. 어젯밤 채취한 잔여물이 검은 천 위에서 회색 빛으로 반짝였다.
“우측 협부와 깃 부분에서 채취했습니다. 입자가 균일하고 촉감은 매끄럽습니다. 통상적인 약재 가루는 현미경 아래 입자가 불규칙한데, 이건 내의원 물금초목부에 기술된 은엽초 분말의 물리적 특성과 유사합니다.”
이운의 눈빛이 바뀌었다. 처음으로 시선이 의심에서 벗어나 검시 도구와 잔여물 사이를 오갔다.
“은엽초라면 수침 시 잎이 은빛으로 변하는 독초다. 회흑색 분말에 매끄러운 촉감.”
서인녀는 이운이 독초 지식을 갖고 있음을 별도로 기록해두었다.
“정확합니다. 다만 물금초목부는 정3품 이상 내의원 관원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저는 확인할 권한이 없습니다.”
이는 신중히 선택한 말이었다. 자신의 한계를 먼저 인정해 상대의 다음 공세를 예측하려는 의도였다.
이운이 소매 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순찰부와 같은 서식, 같은 필체의 사본이었다.
“내부 기록과 사본은 일치해야 한다. 삼중 보관 체계의 기본 원칙이지. 그런데 이 사본에는 초경 세 각의 기록이 있다.”
손가락이 특정 페이지를 짚었다. 서인녀의 시선이 페이지에 꽂혔다. 어젯밤 순찰부 원본에서는 뜯겨 나가고 다른 종이가 삽입된 바로 그 페이지에, 초경 세 각의 순찰 경로와 교대 인원이 기재되어 있었다.
“원본에서는 없던 기록입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이운은 손가락으로 기록의 마지막 항목을 가리켰다.
“초경 세 각, 취화전 서쪽 회랑 통과. 순찰병 세 명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경 첫 각, 같은 경로, 다른 순찰병 세 명.”
잠시 뜸을 들였다.
“초경 직후에 누군가 취화전 후원을 지나갔다. 기록에는 남아 있다. 하지만 원본에서는 사라졌다.”
서인녀는 침묵했다. 원본에서만 페이지가 사라졌다는 것은, 위조자가 사본의 존재를 간과했거나 접근할 수 없었다는 뜻이었다. 이운은 삼중 보관 체계의 접근 권한 차이를 역이용해 사본을 손에 넣은 셈이었다.
“검시록 축소. 채아의 사인 불명. 순찰부 원본 위조. 그리고 은엽초 의심 분말. 하나만 보면 놓칠 수 있다. 넷을 같이 보면 한 사람이 지휘했다는 그림이 그려진다.”
이운이 서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의심하는 게 아니었다. 상당 부분 정리된 추론을 가지고 와서 반응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전하께서는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소매 안의 주먹은 쥐어져 있었다.
“공조.”
짧게 말했다.
“물금초목부 대조는 정3품 관원만 가능하다. 자네도 나도 단독으로는 그 벽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내게는 이 기록이 있고, 자네에게는 검시의 전문성이 있다. 거절할 선택지는 주지 않겠다. 이미 자네 검시록에는 구멍이 너무 많다. 나는 그걸 메꿀 수 있는 유일한 패를 쥐고 있다.”
손이 순찰부 사본 위에 올라갔다.
“사흘 뒤, 같은 시각에 다시 오겠다. 그때까지 자네가 찾아낸 모든 증거를 가지고 내의원 물금초목부 대조를 함께 정식으로 요청한다.”
서인녀는 눈을 감았다 떴다. 검시록을 축소 기재한 대가가 너무 빨리 돌아왔다. 은비녀의 잔여물, 순찰부의 구멍, 채아의 목에 남은 얕은 압흔까지 모든 실타래가 이운의 손에 쥐여 있었다. 혼자서 진상을 규명하겠다던 결심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알겠습니다. 사흘 후, 증거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평소보다 한 톤 낮은 목소리였다.
이운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검시실 문을 향해 돌아섰다. 문을 나서기 직전,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한 가지 더. 자네, 붓 쥐는 법이 특이하더군.”
문이 닫혔다.
서인녀는 탁자 위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확대경을 쥔 검지와 중지의 사마귀가 등불 아래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운은 검시록의 필체가 아니라 검시 도구를 쥐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의심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소매 속 은비녀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끝에 남은 미세한 가루가 희미하게 반짝였다. 약봉지는 여전히 소매 안에 있었다. 사흘은 짧았다. 이운이 가진 순찰부 사본의 출처도 의문이었고, 은엽초를 문헌으로 확인할 경로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운이 ‘공조’라고 불렀지만 실상은 강제에 가까웠다는 점이었다. 검시록을 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무기로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서인녀는 등불을 끄지 않았다. 채아의 시신과 순찰부 사본 사이에 선 채로 사흘 뒤를 계산했다.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다행인지 위협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은비녀의 잔여물을 규명하기 전까지 이 사건의 주도권은 이운에게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검시실 문턱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손이 소매 안쪽으로 들어가 비녀를 집었다. 손가락이 차가운 몸통을 감싸쥐고, 머리 위로 천천히 손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잠깐.”
이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짧고 낮았다.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그 비녀. 검시 도구로군.”
발걸음 소리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검시침은 왜 쓰지 않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운은 검시대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고, 시선은 서인녀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시침은 검은 견본 천과 함께 사용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은비녀는 금속면이 매끄러워 미세 분말 채취에 더 적합합니다.”
“그건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다.”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검률이라면 검시 도구를 검시대 위에 풀어 두는 게 순서다. 그런데 자네는 방금 전까지 그걸 소매 안에 넣고 있었지. 그리고 지금, 검시가 끝난 도구를 머리에 꽂으려 한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습관입니다. 검시 도구를 분실한 적이 있어, 몸에 지니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머리에?”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변했다. 확인하는 어조였다.
서인녀는 비녀를 소매 안으로 내렸다. 손바닥으로 감추며 허리춤 언저리에 손을 두었다.
“망건이 헐거워져 비녀로 고정할 때가 있습니다. 도구를 겸하는 것뿐입니다.”
이운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키 차이만큼 그림자가 발끝을 덮었다.
“검률 서단운. 자네, 검시록 원본을 제출할 때마다 필체가 바뀌더군. 세 번째 검시부터 획순이 달라졌다. 같은 사람 맞나.”
눈꺼풀이 한 번 떨렸다.
“전하께서 검률 하나의 필체를 그리 세심히 살피실 거라 생각지 못했습니다.”
“답이 아니군. 묻는 말에 답이나 해라.”
침묵이 흘렀다. 목울대가 바짝 마르고 몸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번졌다.
“몸이 불편한 날은 대필을 시킨 적이 있습니다. 하급 서리에게.”
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촛불 한 자루뿐인 검시실 안, 공기만 무거워졌다.
서인녀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공수의 자세로 허리를 굽혔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이운이 고개를 끄덕이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돌아섰다. 검시실 문턱을 넘어 복도로 나서자마자 오른손이 저절로 소매 속 비녀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한순간 걸음을 늦추었으나, 다시 앞을 향했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점점 작아졌다.
이운은 촛대를 검시대 위에 내려놓았다. 빈 검시대 위에 순찰부 사본 한 권과 검시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문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들었다. 손바닥을 허공에서 비스듬히 기울여, 상상 속 은비녀를 쥔 손 모양을 만들었다. 손목을 안쪽으로 약간 꺾고 엄지와 검지로 비녀 몸통을 받쳐 든 각도였다.
그대로 손을 귀 옆까지 올렸다. 팔꿈치를 바깥으로 벌리지 않고 몸통 가까이 붙인 채 손목만 돌리는, 한 번의 동작이었다.
손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소매 안에서 비녀를 꺼낼 때의 손가락 배열, 손목의 각도가 떠올랐다. 수년간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각도였다.
눈을 떴다. 복도에서는 이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운은 순찰부 사본을 집어 들고 표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서단운.”
입술 사이로 낮게 새어 나온 이름이 검시실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뒷말을 삼켰다. 검시록 원본의 필체, 순찰부의 누락된 초경 기록, 검시침 대신 은비녀를 택한 이유. 그리고 방금 그 손동작. 사본을 접어 소매 안에 넣고 검시대 모서리에 등을 기댔다. 촛불이 반쯤 줄어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