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록
5화
새벽빛이 채 들지 않은 궁녀 숙소 복도. 서인녀는 하급 궁녀의 안내를 받으며 좁은 회랑을 지났다. 등불을 든 궁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점호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언제부터입니까.”
“세 번째 각이 울릴 때쯤. 방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어서요.”
서인녀는 소영의 방문 앞에 멈췄다. 문틈 아래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문은 누가 열었습니까.” “제가… 잠겨 있지 않아서.”
문을 밀자 방 안은 차가웠다. 등잔불은 심지가 거의 타들어가 간신히 붙어 있을 뿐. 방 한가운데 탁자는 벽에서 석 자 가까이 밀려나 있었고, 바닥에는 흙 묻은 맨발 자국이 흩어졌다. 오른발은 또렷한데 왼발은 앞부분만 찍혀 있었다.
서단운이 문 밖에서 들여다보았다. “소영이 없습니까.”
“옷장을 확인 중입니다.” 하급 궁녀가 옷장 문을 열었다. 의복은 가지런히 걸려 있었으나, 어제 입었을 연두색 당의 한 벌만 접혀 있었다. 서인녀가 탁자 아래를 살폈다. 왼쪽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오른쪽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 귀가 시간은.” “이경 무렵 복도에서 발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서인녀는 탁자 다리에 난 긁힌 자국을 짚었다. 최근에 밀쳐진 흔적이었다. 침상 쪽 이불은 반쯤 젖혀져 있었으나 요 밑은 차가웠다. 누운 적조차 없던 듯했다. 탁자 위 찻잔 바닥에는 검은 찌꺼기가 얇게 말라붙어 있었다.
“소영은 밤에 차를 잘 안 마십니다. 잠을 못 자서요.”
서인녀는 찻잔을 소매 안에 넣었다. 문지방 아래 마른 진흙이 벗겨져 붙어 있었다. 군데군데 검은 재가 섞인 흙이었다. 폐정자 근처에서나 볼 법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약재원 담장 위로 퍼질 무렵. 서인녀가 약재원 서쪽 문 앞에 도착했을 때, 하급 조제사 한 명이 창백한 안색으로 서 있었다. 순찰대 두 명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었다.
익숙한 담묵색 도포 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운이 작은 칼집을 쥔 채 걸어 나왔다.
“약재원이다. 변사체. 남자다. 목에 압흔이 있다.”
서인녀는 숨을 들이켰다. 채아의 사건 이후 나흘도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이 죽었다.
“신원은.” “상의원 산하 하급 장인으로 추정된다.”
이운을 따라 좁은 통로를 지나 부속 건물 앞에 이르렀다. 변사체는 돌계단 아래 쓰러져 있었다. 사십 대 초반, 상의원 작업복을 입은 남성이었다.
서인녀가 무릎을 굽혀 육안 검시를 시작했다. 목의 압흔은 끈으로 졸린 흔적이었으나, 안면 울혈이 없었다. 손톱도 깨끗했다. 저항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교살의 양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인녀가 품에서 은비녀를 꺼내 목 부위 의복깃을 밀어 올리자, 끈이 압박한 경로가 선명히 드러났다. 이운이 그 손놀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시용 은비녀다. 전에 보여준 적 있지 않느냐.”
서인녀가 대답 없이 안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뒤졌다. 천 조각과 실패 아래 작은 종잇조각이 접혀 있던 것이다.
‘초경 세 각, 약재원 후문, 독초-은’
이운이 종잇조각을 받아 읽었다.
“약속을 잡았다. 은엽초일 가능성이 있다.”
종잇조각을 소매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검시를 진행해라. 내의원으로 운구한다.”
순찰대원 하나가 들것을 가지러 가고, 다른 하나는 출입문에서 구경꾼을 막았다. 이운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여기 왜 혼자였지.”
“소영이 사라졌습니다. 어젯밤부터. 탁자가 밀려나 있었고 왼쪽 신발 한 짝만 발견됐습니다.”
“장상궁이 움직였다. 소영은 어젯밤 폐정자에서 장상궁을 봤다. 장상궁도 소영의 존재를 알았고.”
이운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이 변사체도 같은 약재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초경 세 각은 채아의 사망 추정 시각과 겹친다.”
“검시실에서 은엽초 반응을 확인하겠습니다.”
“죽은 자의 입을 열어보아라. 약재 찌꺼기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들것이 도착했다. 순찰대원들이 시신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서인녀가 마지막으로 시신의 손 위치를 확인하고 천으로 덮었다. 소매 안의 찻잔과 품속의 은비녀를 한 번씩 확인하며 들것을 따라 걸었다. 증거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 햇살이 내의원 검시실 창호지를 뚫고 비스듬히 깔렸다. 중앙 탁자 위에는 흰 천을 덮은 시신이 놓여 있었다. 서인녀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은비녀와 필촉을 포목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정백문이 소형 약연과 백자 접시를 든 하급 조제사를 데리고 들어와 시신의 흰 천을 살짝 들추었다. 목의 압흔을 확인하고 천을 다시 덮었다.
“어젯밤 태상군 전하께서 내의원 독초 도감을 들르셨소. 물금초목부를 열람하신 모양이더군.”
정백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운은 검시실 구석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서인녀가 흰 천을 걷어내자 시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안면 울혈은 옅고 결막 출혈도 미미했다. 필촉으로 목 부위를 짚으며 말했다.
“압흔은 한 줄, 폭은 좁고 깊이가 균일하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교살 흔적과 다릅니다.”
정백문이 고개를 기울였다.
“교살이 아니란 말이오?”
“사인은 다릅니다.”
서인녀는 시신의 입술을 벌리고 은비녀 끝으로 잇몸을 눌러보았다. 점막이 푸르스름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비녀 끝이 미세하게 탁해졌다.
“구강 내 점막 변색. 은비녀 반응 탁함. 독살입니다.”
소매 깊숙이에서 작은 도자기 접시를 꺼내 시신의 입 안에서 침과 섞인 잔여물을 조심스럽게 긁어냈다. 회백색 가루가 소량 묻어났다. 이운이 벽에서 몸을 뗐다.
“은엽초?”
“수침 확인이 필요합니다.”
서인녀는 접시에 담긴 가루를 반으로 나누어 맑은 물을 떨어뜨렸다. 은빛 입자가 번졌다.
“수침 시 은빛 발현. 은엽초 맞습니다.”
정백문이 다가와 번진 은빛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며칠 전 궁녀 채아 건과 같군.”
“같습니다. 다만 채아의 경우 작약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에도 확인해야 합니다.”
정백문은 소매에서 물금초목부 사본을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손가락이 표를 짚으며 내려갔다.
“은엽초 단독 배합은 내의원 공식 처방에 없소이다. 반드시 작약과 쌍으로 쓰이게 되어 있소이다.”
“공식 처방과 실제 배합이 다를 수 있다는 뜻이군요.”
서인녀는 남은 가루를 건넸다. 정백문은 백자 접시를 받아 냄새를 맡고 손가락으로 찍어 비볐다.
“회흑색. 매끄러운 촉감. 은엽초가 확실하오이다. 작약 흔적은 없소. 이번에도 제거됐군요.”
이운이 탁자 앞으로 걸어왔다. 시선은 물금초목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15년 전 모후의 탕약 처방도 똑같았다.”
정백문의 손이 멈췄다.
“전하, 그건——”
“은엽초에 작약이 빠진 배합. 기록에는 작약이 들어 있다고 적혀 있고, 실제 탕약에는 빠져 있었다. 어젯밤 독초 도감에서 확인했다. 이번에 죽은 자의 체내 약재 조합과 일치한다. 두 사건 모두다.”
서인녀의 손이 포목 위에서 잠시 굳었다. 이미 물금초목부를 대조한 것이었다. 정백문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물금초목부 원본은 정3품 이상만 열람할 수 있는——”
“절차를 어겼다. 추궁할 거면 나중에 해라.”
이운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지금은 기록 이야기다. 공식 처방과 실제 배합이 다르다는 걸 입증할 기록이 어디 있나. 모후 사건의 내부 기록 원본.”
정백문은 약연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도서관에 없습니다.”
이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뜻이지.”
“15년 전 모후 관련 내부 기록 원본. 도서관 서고 목록에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실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 확인했나.”
“삼 년 전입니다.”
“됐다.”
이운이 대답을 잘랐다. 손등에 핏줄이 섰다. 숨을 들이쉬고 서인녀를 향해 돌아섰다.
“서 검률. 이 시신의 검시록은 어떻게 쓸 거냐.”
서인녀는 은비녀 머리 장식을 가볍게 누르며 입을 열었다.
“사인은 독살. 교살 흔적은 사후에 조작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은엽초 성분 검출, 작약 흔적 없음. 채아 건과 동일 배합임을 부기하겠습니다.”
“또 축소하겠다는 거냐.”
“기록을 축소하는 게 아닙니다. 두 사건을 잇는 근거를 남기는 거죠. 다만 그 근거를 입증하려면 도서관에 없는 내부 기록 원본이 필요합니다.”
벽에 걸린 검시용 촛불이 가늘게 흔들렸다.
“도서관 서고 목록에 존재하고 실물이 없다면, 누군가 미리 빼돌렸거나 목록만 조작한 것이다. 어느 쪽이든 사본과 대조할 원본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내가 도서관을 다시 뒤지겠다.”
“전하.”
서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혼자 움직이지 마십시오. 어젯밤 독초 도감에 혼자 가신 것도, 이번에도 그러시면——”
“검시나 계속해라.”
이운이 몸을 돌렸다. 담묵색 도포 자락이 흔들렸다.
“도서관에서 만나지. 오늘 해 지기 전에.”
서인녀는 물끄러미 등을 바라보다가 곧바로 숙인 시선을 정백문에게 돌렸다.
“정 의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내부 기록 원본은 최소 삼 년 전부터 소재 불명입니다.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 없고, 사본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 쪽 기록으로는 연계 입증이 불가능해집니다.”
정백문은 여전히 난처한 표정으로 약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본은…… 워낙 민감한 건이라 애초에 필사본 자체가 거의 돌지 않았을 겁니다.”
“그럼 유일한 길은 원본을 찾는 것뿐이군요. 태상군 전하께서 혼자 뛰어드시기 전에 내부 기록이 어떤 경로로 움직였는지 추적해야 합니다. 전하께서 직접 도서관을 뒤지겠다고 하셨으니, 저도 별도로 기록 이관 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서인녀는 곧바로 제서국으로 발길을 돌려 최근 3년간의 기록 이관 대장을 열람했다.
오후의 동궁 복도는 길고 조용했다.
서인녀는 소영의 처소에서부터 발자취를 더듬었다. 아침 당번도 서지 않았고, 함께 방을 쓰는 하급 궁녀 하나가 새벽녘에 빈 이부자리만 봤다고 했다. 검시실에서 나온 뒤 동궁 쪽 회랑을 샅샅이 훑던 참이었다.
그때 복도 저 끝에서 측문이 열렸다.
장상궁이 먼저 나왔다. 낡은 예복 자락이 돌바닥을 스쳤다. 그 뒤로 소영이 따랐다. 얼굴이 핏기가 없고 입술이 터져 있었다. 왼쪽 발목을 살짝 저는 걸음이었다.
서인녀가 걸음을 멈췄다. 소영도 그녀를 보았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소영의 눈동자가 커졌다가 곧바로 바닥을 향했다. 입술이 떨렸다.
장상궁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손짓 하나로 소영을 측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문지방을 넘는 소영의 손이 문틀을 한 번 긁었다. 문이 닫혔다.
서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
“장상궁.”
장상궁이 몸을 반쯤 돌렸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서인녀를 훑었다. 오른쪽 눈꺼풀의 작은 쥐젖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 검률께서 동궁까지 오신 연유를 아뢰라 하시오.”
“소영이 보이지 않아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간 나인이 소영이 맞습니까.”
“그것이 하문이시오.”
장상궁의 목소리는 마른 종이 같았다.
“하문이라면 답이 있어야 합니다.”
“대비전 지밀상궁의 소관 사항을 종6품 검률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사옵니다.”
서인녀의 소매 안 검지가 검시침 골을 따라 움직였다. 멈추고 다시 손을 폈다.
“소영은 변사체의 최초 목격자입니다. 검시 절차상 재문초가 필요합니다. 아직 문초록도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문 받들어 답하겠사옵니다.”
장상궁이 허리를 곧게 폈다. 마른 체형의 어깨뼈가 예복 위로 솟았다.
“해당 나인은 대비전 마마의 분부로 별도 문초 중이옵니다. 검시록에 필요한 진술은 익일 서면으로 전달되오.”
“그것은 절차와 맞지 않습니다. 검률이 직접——”
“서 검률.”
장상궁이 반 박자 앞서 말을 끊었다. 품에서 약한 쑥 냄새가 풍겼다.
“이곳은 동궁입니다. 검시실이 아니옵니다.”
서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측문 너머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도,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지금 물러가시오.”
장상궁의 손가락이 측문 고리를 감았다. 손톱 밑 검은 물질이 저녁 햇살에 잠깐 드러났다.
“하문 받들어 마지막으로 아뢰겠사옵니다. 오늘 이 문 안의 일은 없었던 것이옵니다.”
서인녀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사찰단 아래로 삼키는 소리가 났다. 소매 안 비녀는 만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녀가 물러났다. 관복의 소매가 흔들리지 않도록 양손을 모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복도를 되짚었다. 열 걸음쯤 걸었을까.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빗장 걸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서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왼손 엄지가 손바닥 안쪽을 눌렀다. 따가웠다.
소영의 저는 발목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채아의 목에 난 압흔처럼, 그것도 하나의 기록이었다. 아직 기록되지 않은.
그러나 그녀에게는 이 문을 열 권한이 없었다. 동궁이었다. 대비전이었다. 검시실이 아니었다.
복도가 끝나는 모퉁이에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측문은 닫혀 있었다. 햇살만 비스듬히 문짝을 가로질렀다.
서인녀는 소매 안 검시침을 한 번 만졌다. 손끝에 작은 녹이 묻어났다. 손수건에 닦아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