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록
6화
진시 초의 햇살이 약재 검사실 창호지를 노랗게 물들였다. 서인녀는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탕약 그릇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도자기 안쪽 벽면에 엷은 갈색 잔여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검시침 끝을 그릇 내벽에 댔다. 손목을 바깥쪽으로 살짝 꺾어 가볍게 긁어내자 미세한 분말이 검은 견본 천 위로 떨어졌다.
“물금초목부 펼쳐 주십시오.”
정백문은 약연 너머에서 이미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15년 전 모후 전하의 탕약 처방. 공식 기록은 4쪽에서 7쪽까지입니다.”
서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분말에 필촉을 가져다 대고 입자를 벌렸다. 회갈색 바탕에 덜 빻아진 흰 입자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그녀가 필촉을 내려놓았다.
“이것은 결명자 찌꺼기입니다. 공식 처방에 없습니다.”
“결명자요?”
“눈을 밝히는 약재입니다만, 은엽초 배합에는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죠. 여기.”
검시침으로 회갈색 분말 옆에 따로 떨어진 작은 알갱이를 짚었다. 색이 더 희었다.
“이 알갱이는 더 문제입니다.”
정백문이 다가왔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크기가…… 고르지 않군요.”
“덜 빻아졌습니다. 형태가 남아 있습니다. 방추형. 끝이 뾰족하고.”
견본 천을 창가로 들어 올렸다. 햇빛에 흰 알갱이의 단면이 드러났다. 서인녀의 숨소리가 잠깐 멎었다.
“백부자입니다.”
정백문의 손에서 물금초목부가 살짝 미끄러졌다. 황급히 책등을 붙잡았다.
“공식 처방에는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인녀는 견본 천을 평평하게 놓고 검시록을 펼쳤다. 붓에 먹을 찍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가 곧 멎었다.
“백부자. 미량. 불완전 분말 상태로 잔존. 결명자 흔적 병존. 15년 전 내의원 물금초목부 공식 등재 처방에는 양자 모두 기재되지 않음.”
정백문이 목소리를 낮췄다.
“서 검률. 이 기록은…….”
“공식 처방과 불일치하는 물증입니다. 누군가 탕약에 두 가지 약재를 추가로 넣었습니다. 결명자는 은엽초로 인한 시력 저하를 감추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백부자는…….”
붓을 놓고 정백문을 똑바로 바라봤다.
“독성을 높입니다. 작약을 제거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정백문이 물금초목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4쪽에서 멈췄다. 서인녀는 굳은 표정으로 페이지를 짚었다.
“정 내의원.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 처방을 작성한 이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까.”
“기록상으로는 당시 내의원 수좌였던 박 내의입니다만.”
“내부 기록 원본이 도서관에 없다면 박 내의의 친필을 대조할 길이 없습니다.”
정백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인녀는 조심스럽게 견본 천을 접어 유지 봉투에 넣었다. 작은 끈으로 입구를 묶은 뒤 검시록에 끼웠다. 탕약 그릇 역시 삼베 보자기에 감쌌다.
“태상군 전하께 이 검시 메모를 전달해야 합니다. 오늘 안으로.”
“전하께 직접 말입니까.”
“이 증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물금초목부 공식 처방과 실제 탕약 잔여물 사이의 불일치는 입증되었습니다. 다음 단계가 필요합니다.”
정백문은 등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손이 약연 가장자리를 움켜잡았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삼켰다. 서인녀는 검시침을 소매 안에 밀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시록을 두 손으로 들어 앞섶에 품었다.
검사실 문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창호지에 비친 아침 햇살이 그녀의 관복 어깨를 비껴 갔다.
태상군 전하를 배알하고자 내의원을 나서 동궁 쪽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검시록을 품 안에 단단히 고정한 채 행각을 가로지르는데, 진시 말로 접어든 햇살이 기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내의원 밖 행각은 진시 말의 햇살이 반쯤 기울어 있었다. 서인녀는 소매 안 검시 메모가 접힌 자국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운이 회랑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서 있었다.
“백부자입니다.”
서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 내관이 건넨 탕약 그릇 잔여물에서 채취했습니다. 은엽초 단독이 아닙니다. 작약 대신 백부자가 배합되어 있었습니다.”
이운의 눈가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독성이 강해진다.”
“예. 15년 전 공식 처방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서인녀가 소매에서 메모를 반쯤 꺼내려는 순간, 행각 모퉁이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정 내관이었다. 대비전 소속의 마른 중년 내시로, 걸음걸이가 가볍고 어깨가 앞으로 굽어 있었다. 그가 두 사람 앞에서 멈춰 섰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 검률. 태상군 전하.”
허리를 굽히는 동작이 예의를 갖췄으나 눈빛은 달랐다.
“하문 받들어 한 말씀 전하러 왔사옵니다. 나인 소영이 방금 진술을 시작했사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서인녀의 손가락이 멈췄다.
“서 검률께서 과거에 검시록을 대필하셨다는 의혹 말입니다. 소영은 그 증거를 직접 보았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아직 모르실까 하여, 작은 충정으로 아뢰는 바입니다.”
서인녀는 숨을 들이켰다. 메모를 쥔 손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운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건조했다.
“네가 그 말을 전하러 왔다고?”
정 내관의 미소가 한 박자 멎었다.
“대비전 마마의 분부로——”
“전하.”
서인녀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 음 낮았다.
“소영은 현재 동궁에 감금된 상태입니다. 어젯밤 제가 목격했습니다. 장상궁이 직접 측문으로 들여보냈고, 문은 빗장이 걸렸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자발적 진술은 불가능합니다. 소영이 무언가를 말했다면 협박에 의한 것입니다.”
“서 검률.”
정 내관의 목소리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 말씀은 대비전 마마의 명예를——”
“묻는 말에 답이나 해라.”
이운이 반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담묵색 소매가 바람에 한 번 흔들렸다.
“소영이 어디 있느냐.”
“동궁에 보호 조치 중이옵니다만——”
“보호.”
이운이 짧게 되받았다. 정 내관의 입술이 닫혔다.
“장상궁에게 전해라. 검시 절차상 증인을 유치할 권한은 대비전에 없다. 검률의 재문초 요청이 접수되면 즉시 인계하라.”
정 내관이 허리를 굽혔다. 미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문 받들어 전하겠사옵니다.”
그가 물러났다. 발소리가 회랑 끝으로 멀어질 때까지 서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운이 몸을 돌렸다.
“소영을 찾는다. 없다면 내명부를 뒤진다.”
“전하.”
서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 목소리는 낮고 말미가 약간 갈라졌다.
“장상궁은 동궁에서 제게 말했습니다. 오늘 일은 없었던 것이라고. 소영이 저를 고발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런 진술을 했다면 소영은 이미——”
말이 끊겼다. 이운이 그녀를 보았다.
“이미 죽었을 것이다.”
서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시침을 품은 소매가 살짝 떨렸다.
“살려야 한다.”
이운이 발걸음을 돌렸다.
“너는 서면 진술을 기다려라. 검시록 완성을 핑계로 내명부에 공식 요청해. 한 시진 뒤 도서관으로 와.”
서인녀가 허리를 굽혔다. 이윽고 소매 안 메모를 꺼내 접힌 자국을 펼쳤다. 백부자 항목 옆에 작은 글씨로 ‘소영 거짓 자백 가능성 — 협박 하에 작성 추정’이라고 덧붙였다. 붓을 거둬 관복 안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고서 보존실은 오시 초의 햇살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서가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나자 습기와 먼지의 경계가 한 겹 얇아졌다. 이운은 선반 위 작은 청동 향로를 오른쪽으로 세 번 돌렸다. 서가 뒤편 벽에서 마른 나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은밀히 파인 홈을 따라 비집고 들어가면 사방이 고서 더미로 막힌 자그마한 방이 나타났다.
혜명 노승은 이미 거기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염주를 굴리다가 이운의 발소리에 손을 멈췄다.
“15년 만입니다.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혜명 스님.”
이운이 선 채로 말했다.
“전하께서 저를 찾으실 때는 언제나 얼굴입니다.”
혜명이 눈을 떴다. 탁한 황색 눈동자가 이운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오늘은 어떤 얼굴이십니까.”
“내부 기록 원본이 사라졌다. 15년 전 모후의 독살 기록이다.”
혜명이 염주를 한 번 더 굴리고 손을 멈췄다.
“없는 책을 찾는 자는 책장 밖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뜻이지.”
“전하께서는 이 도서관의 삼중 기록 체계를 익히 아실 것입니다. 내부 기록, 사본, 밀봉본. 그중 사본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습니다. 원본은 소재가 묘연하고.”
혜명이 몸을 약간 기울였다. 왼손이 무릎 아래 깔린 헌 방석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 도서관에는 서고 목록에 없는 공간이 있습니다. 선왕께서 특별한 기록을 보관하시려 만드셨지요.”
이운의 시선이 방석 밑으로 내려갔다. 혜명이 방석을 걷어내자 오래된 마룻바닥에 손가락 두 마디 너비의 홈이 드러났다.
“이 공간은 태비 마마도 모릅니다.”
혜명의 손가락이 홈을 따라 움직였다.
“제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여는지는——”
“왜 지금 말하는 거지.”
이운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혜명이 손을 거뒀다.
“15년 전, 저는 침묵을 택했습니다. 왕실의 사문서를 지키는 자로서 누군가의 죽음에 개입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탁한 눈동자가 이운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그러나 이제 그 기록을 찾는 자가 둘입니다. 전하와, 그리고 기록을 없애려는 자. 한쪽이 먼저 찾기 전에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운이 무릎을 굽혀 마룻바닥 홈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나뭇결 사이로 미세한 철제 냄새가 났다.
“며칠 전부터 사복 차림의 내시들이 이 구역을 배회합니다.”
“오늘 밤에 연다.”
이운이 일어섰다. 혜명이 염주를 굴렸다.
“열쇠는 없습니다. 여는 법도 모릅니다. 다만 누락된 사본 중 가장 위험한 것은 태비마마의 친필이 담긴 배합 지시서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운이 걸음을 멈췄다.
“그 문서가 여기 있다는 말이냐.”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의 친필은 아무도 함부로 없애지 못합니다. 증거가 될 수 있기에.”
이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묵색 소매 아래로 왼손이 은고리 칼집을 쥐었다 놓았다. 서가 틈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빛이 그의 다크서클 깊숙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 시진 뒤에 다시 온다.”
“전하.”
혜명이 눈을 감았다.
“부처님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이운은 벽 홈을 빠져나왔다. 향로를 원래 위치로 돌리자 서가가 다시 닫혔다. 손바닥에 묻은 마룻바닥 먼지를 털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오시의 햇살이 기왓장에 부딪혀 흩어지는 나인 거처 후원 막사. 서인녀는 입구에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지워지다 만 작은 손바닥 자국이 마른 진흙 위에 떨린 듯 비틀려 있었다.
“장상궁.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막사 안쪽에서 쑥 냄새가 밀려왔다. 장상궁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입구를 막았다. 어깨뼈가 예복 위로 솟아 있었다.
“서 검률. 하문 받들어 묻겠사옵니다. 어찌 이곳을 아시옵니까.”
“검시록 검토 중 소영 나인의 입궁 전 임시 처소가 이곳임을 확인했습니다.”
서인녀는 검시침을 만지지 않고 손을 소매 안에 모았다.
“동궁에 있다고 듣지 않으셨사옵니까.”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비전 지밀이 관리하는 나인이 왕세자 처소에서 별도 문초를 받는 절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확인 결과, 태상군 전하께서도 그런 전례를 찾지 못하셨습니다.”
이운의 이름에 장상궁의 눈꺼풀이 가늘어졌다. 쥐젖이 움찔했다.
“하문 받들어——”
“소영 나인의 진술은 검시록의 필수 항목입니다. 익일 서면 전달이 아니라 지금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 변사체의 사인은 독살입니다. 최초 목격자의 육성 진술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장상궁이 반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뒤쪽 회랑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포자락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이운이 순찰부 사본을 감아쥔 채 막사 앞에 멈춰 섰다. 숨은 고르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물러나시오, 장상궁.”
장상궁이 허리를 굽혔다. 깊지 않았다.
“전하. 이곳은 대비전 마마의 분부로——”
“순찰부 사본이다.”
이운이 사본을 들어 올렸다.
“초경 세 각부터 이경 첫 각 사이, 순찰 기록이 누락된 구간이 있다. 해당 시간대에 취화전 후원을 지난 인물 전원을 조사 중이다. 소영 나인은 그 시간대의 유일한 목격자다.”
“하문 받들어——”
“종친으로서 검시 절차의 보전을 요구하옵니다. 왕실 삼중 기록 체계에 근거한 열람 권한이옵니다. 대비전의 별도 문초보보다 이 절차가 우선하옵니다.”
장상궁의 손톱 밑 검은 물질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이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오늘 도서관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하문 받들어 묻지 않겠사옵니다. 다만 아뢰옵니다. 도서관의 기록은 모두 제자리에 있사옵니다. 없는 것은 없사옵니다.”
“그것은 네가 정할 일이 아니오.”
서인녀가 막사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 속 연두색 당의에 땀 얼룩이 깃을 따라 번져 있었다. 소영의 두 손이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다 멈췄다.
“소영 나인. 발목은 어떻습니까.”
소영의 어깨가 귀에 닿을 듯 움츠러들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아직……”
“걸을 수 있습니까.”
“……아마……”
서인녀가 이운을 향해 돌아섰다. “전하. 증인 확보가 우선입니다.”
이운이 끄덕이고 장상궁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마지막이오. 물러나시오.”
장상궁이 천천히 옆으로 비켰다. 손톱이 문틀을 스치며 가느다란 흠집을 냈다.
“분부대로… 물러나겠사옵니다.”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이운을 보았다. 회색 눈동자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말이 아니라 시선으로 남겼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소영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서인녀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걸을 수 있으면 곧장 이동합니다. 도서관 쪽 후원 회랑으로.”
이운이 앞장섰다. 세 사람이 회랑으로 접어들었을 때, 저 앞에서 등불 여럿이 일제히 움직였다. 정 내관이 순찰대를 이끌고 회랑 입구를 막아섰다.
“왕태비 전교, 도서관 은닉 문건 사건 관련자 즉시 체포!”
소영의 손이 서인녀의 소매를 움켜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