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독초록
9화
조회가 끝난 정전의 공기는 아직 가시지 않은 향 연기처럼 무거웠다.
왕태비 민씨가 용상 우측 주렴 뒤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흑요석 은비녀가 햇살에 반짝였다.
“전하.”
국왕이 용상에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 조회에서 미처 아뢰지 못한 사안이 있사옵니다.”
왕태비의 음성엔 온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정전의 모든 중신이 숨을 멈췄다.
“들라.”
국왕의 손가락이 용상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왕태비가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빡였다.
“의금부에 접수된 고발 건으로, 검률청 소속 서단운에 관한 일이옵니다.”
정전 왼편의 이조판서가 동지중추부사와 시선을 교환했다. 오른편 예조참판은 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서 검률을 들게 하옵소서.”
왕태비의 왼손 검지에 감긴 금가락지가 살짝 돌아갔다.
잠시 뒤 정전 정문이 열렸다.
서인녀가 두 명의 의금부 나장 사이에서 걸어 들어왔다.
소매 속 검시침이 팔뚝에 닿아 차가웠다. 관복도 없는 평복 차림이었다. 머리칼은 정수리에서 틀어 올려 망건으로 고정했으나, 형조 판서는 그 망건을 유심히 살폈다.
서인녀가 용상 앞에서 무릎 꿇었다. 돌바닥이 정강이를 찍었다.
“서단운, 대령하였사옵니다.”
왕태비가 주렴을 걷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네 놈은——”
한 박자 쉬었다가 고쳤다.
“그대는 서단운이 아니외다.”
정전의 공기가 삭발하듯 가벼워졌다. 형조참의는 홀을 내려놓을 뻔했다.
“본디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는 여성이외다.”
서인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검률 서단운의 누이동생이——”
왕태비가 잠시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사 년 동안 오라비의 이름으로 검시록을 대필하고, 검률청을 속였사옵니다.”
이조판서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검률은 정식 관직이옵니다. 여성의 관직 임용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알고 있소.”
국왕의 음성은 지루하다는 듯 낮았다.
“대비마마. 증거는 갖추셨소?”
왕태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왼쪽 볼의 보조개가 깊게 패였다.
“의금부 검률청 감정관이 검시록 열일곱 건을 대조하였사옵니다. 그중 열두 건이 서단운 본인의 필체가 아니라고——”
“대비마마.”
서인녀가 입을 열었다. 왕태비의 흑요석 은비녀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전 안의 모든 시선이 바닥에 꿇린 여인에게 쏠렸다.
“묻는 말씀이 아니면 입을 열지 말라.”
왕태비의 말끝에 비로소 날이 섰다.
서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용상 뒤 창호지 너머 햇살이 박혔다.
“여쭙겠사옵니다. 감정관께서 어떤 필체로 대조하였는지——”
“네 놈이 여기서 질문할 자격은——”
“묻는 말씀에 답을 주시옵소서.”
서인녀의 말끝은 잘려나가지 않았다.
정적.
형조판서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왕태비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금가락지가 다시 한 번 돌아갔다.
“감정관을 들라.”
입회 진행관이 문을 향해 손을 들려는 순간——
정전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뛰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문지기가 외쳤다.
“태상군 전하, 입궐하옵시——”
말이 끝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이운이었다.
곤룡포 대신 어제 그대로의 담묵색 도포 차림이었다. 왼쪽 허리춤엔 은고리 칼집이 매달려 있었다.
이운이 정전 중앙까지 걸어 들어왔다. 병조판서와 예조참판 사이를 지나쳐 서인녀의 왼편 한 걸음 앞에 섰다.
“전하.”
이운이 국왕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반말이었으나 예를 갖춘 속도였다.
“태상군.”
국왕의 눈썹이 올라갔다.
“조회가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았사옵니다.”
이운이 몸을 일으켰다. 짙고 투명한 검은 눈동자가 주렴 너머 왕태비를 향했다.
왕태비의 손가락이 금가락지에 멎었다.
“태상군. 무슨 일이냐.”
“대비마마께서 지금——”
이운이 왼손으로 서인녀를 가리켰다.
“이 자를 의금부에 압송하려 하셨사옵니까.”
왕태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외다. 여성이 검률을 사칭한 죄는——”
“거기까지.”
이운의 목소리가 정전을 가로질렀다. 신하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졌다.
“압송할 수 없사옵니다.”
왕태비의 흑요석 은비녀가 흔들렸다.
“태상군. 네가 무슨 권한으로——”
“십오 년 전.”
이운이 허리춤에서 물증 묶음을 꺼냈다. 포장된 탕약 그릇과 배합 비망록이 정전 바닥의 햇살을 받았다. 검시록처럼 가지런히 접힌 기거주기 누락 쪽과 물금초목부 사본도 보였다.
“모후께서 마지막으로 드신 탕약은 공식 처방이 아니었사옵니다.”
왕태비의 금가락지가 딸깍 소리를 냈다. 관절이 경직된 소리였다.
“은엽초 석 냥, 독초 부자 한 냥 반.”
이운이 품에서 배합 비망록을 펼쳤다. 낡은 종이 위로 왕태비 민씨의 친필 화압이 드러났다.
“누군가 결명자를 빼고 독약을 넣었사옵니다.”
“이운!”
왕태비가 주렴을 걷었다. 육중한 가체를 얹은 머리가 천천히 앞으로 쏠렸다.
“네가 무슨 말을——”
“모후께서 드신 탕약 그릇이 여기 있사옵니다.”
이운이 탕약 그릇을 들어 올렸다. 도자기 바닥에 검은 찌꺼기가 얇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기거주기 누락 쪽을 집어 형조판서 쪽으로 치켜들었다.
“신유년 계동 십일월 스무나흗날. 모후께서 탕약을 드신 날 저녁. 기거주기에서 그날의 기록만 사라졌사옵니다.”
정전이 조용해졌다. 중신들의 숨소리마저 사라진 듯했다.
왕태비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왼쪽 볼의 보조개가 스러졌다.
“전하.”
이운이 국왕을 똑바로 마주했다.
“십오 년 전 모후 독살 사건의 물증을 은폐한 자가——”
고개를 돌려 왕태비를 보았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피의자를 재판할 자격이 있는지, 신은 묻고 있사옵니다.”
왕태비의 손이 은비녀를 짚었다. 뾰족한 흑요석 끝이 가체 속으로 밀려들었다.
“무엄하다!”
왕태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정전을 울렸다. 그러나 손은 은비녀를 떠나지 않았다.
“네가 대비전에 쳐들어와 어미의 상처를——”
“마마.”
국왕이 손을 들었다.
정전 안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국왕의 이마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손가락이 용상 팔걸이를 세 번 두드렸다.
“태상군.”
“예, 전하.”
“네가 지금 든 물증——”
서너 걸음 앞으로 나온 형조판서가 홀을 들어 올렸다.
“전하, 그 물증의 공식——”
“형조판서는 물러나 있으라.”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태상군. 계속하라.”
이운이 물증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탕약 그릇, 배합 비망록, 물금초목부 사본, 기거주기 누락 쪽. 네 건의 물증이 일직선으로 놓였다.
“왕실의 모든 공식 기록은 원본, 사본, 상아패 첨부 밀봉본의 삼중 보관 체계를 따르옵니다.”
이운이 물금초목부 사본을 집어 펼쳤다. 서인녀가 도서관 비밀 서고에서 확인한 바로 그 재편철 흔적. 낡은 구멍 옆으로 새로 뚫린 구멍이 촘촘히 나 있었다.
“그런데 이 물금초목부 사본은——”
이운이 손가락으로 구멍 사이를 가리켰다.
“이미 해체된 뒤 다시 묶였사옵니다. 페이지가 교체된 흔적이 명백하옵니다.”
왕태비의 검지에 감긴 금가락지가 살짝 돌아갔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하여——”
이운이 기거주기 누락 쪽을 들었다.
“신유년 계동 십일월 스무나흗날. 내부 기록인 기거주기에서 그날의 기록 쪽이——”
한 번 멈추고 종이를 뒤집었다. 다른 쪽의 종이 질감과 다른 매끈한 표면이 빛을 받았다.
“뜯겨나가고 다른 재질의 종이로 대체되었사옵니다.”
예조참판이 홀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힌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이조판서가 나직이 말했다.
“전하, 삼중 보관의 원본과 사본이 모두 훼손되었다면——”
“그것이 증명하는 바는 하나뿐이옵니다.”
이운이 국왕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독초의 유통 기록을 은폐하고자 했사옵니다.”
왕태비의 손이 은비녀에서 떨어졌다.
“기록 관리의 소홀일 뿐——”
“대비마마.”
이운이 왕태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배합 비망록에 찍힌 화압은 누구의 것이옵니까.”
왕태비의 호흡이 멎었다.
정전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조판서가 반 걸음 물러섰다. 예조참판이 떨어진 홀을 줍지 못했다.
“십오 년 전, 모후의 탕약 처방에서 작약을 빼고 백부자를 넣은 분.”
이운이 배합 비망록을 펼친 채 내려놓았다. 은엽초 세 전, 그 백부자 한 전 반, 마황 두 전, 계지 한 전. 문자 한 줄 한 줄이 조회장의 햇살에 적나라했다.
“작약을 제거한 은엽초 조합은 그 독성이 배가되옵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사옵니다.”
“전하.”
왕태비가 용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조개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것은 태상군이 옛 상처에 집착하여 기록을——”
“대비마마께 여쭙겠사옵니다.”
이운이 반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 손날의 흉터가 도포 소매 밖으로 살짝 드러났다.
“이 배합 비망록에 찍힌 화압은, 마마의 친필이 아니옵니까.”
왕태비의 검지가 움찔거렸다. 금가락지에 박힌 작은 보석이 빛을 잃었다.
정적.
국왕이 용상에서 일어났다.
병조판서와 예조참의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이조판서의 홀이 바닥을 스쳤다.
“대비마마.”
국왕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낮았다.
“답하지 않으시겠소.”
왕태비의 입술이 열렸다. 한 번. 그리고 다물렸다.
국왕이 이운을 보았다. 이운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국왕이 다시 왕태비를 보았다. 주렴이 바람 한 점 없는 정전에서 떨렸다.
“이 일은——”
국왕이 한 걸음 물러서며 손을 등 뒤로 모았다.
“정식으로 내의원과 의금부, 그리고 기록청의 합동 검증을 요하오. 태상군이 제출한 물증은 봉하여 보관하고——”
형조판서를 보았다.
“형조판서가 입회하라.”
“신,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국왕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서인녀에게 닿았다.
“검률 서단운을 사칭한 건에 대해서도 별도로 진상을 규명하라. 다만——”
왕태비가 입을 열려 했으나 국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물증 검증이 끝나기 전까지는 신병을 의금부에 넘기지 않는다.”
왕태비의 금가락지가 딸깍 소리를 마지막으로 냈다.
이운이 물증 묶음을 다시 포장하기 시작했다. 탕약 그릇, 비망록, 누락 쪽, 사본. 네 건을 차례대로 묶는 손길이 칼집을 짚을 때보다 느렸다.
서인녀가 이운의 손을 보았다. 손날 흉터 위로 핏줄이 가늘게 섰다.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는 서인녀의 소매를 이운이 왼손으로 제지했다.
“아직.”
짧은 한마디였다.
왕태비가 주렴을 내리며 돌아섰다.
흑요석 은비녀 한 개가 주렴 밖으로 보였다. 뾰족한 끝이 정전 창호지의 그림자를 잘랐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동궁 별채로 통하는 좁은 복도는 비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하급 나인 하나쯤 오갔을 시간인데, 정전 소식이 퍼지면서 모두 몸을 사린 탓이었다.
서인녀는 장상궁의 사가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숨을 가다듬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상궁의 약 주머니에서 늘 배어나던 그 냄새였다. 방은 좁고 소박했다. 벽장 하나, 탁자 하나, 침상 하나. 격식에 맞추되 낡고 멋없는 물건뿐이었다.
서인녀는 벽장부터 열었다. 약재 갈무리함은 보이지 않았다. 침상 밑.
없다. 탁자 아래 서랍. 없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날 동궁 옆 복도. 소영의 손목을 쥐고 있던 장상궁. 소영이 지나쳤던 그 순간, 장상궁의 소매 안쪽에서 약 주머니가 떨어질 뻔했다. 서툰 손짓으로 도로 집어넣던 그 안에—— 주머니 말고도 손가락 두 마디 폭의 작은 함 하나.
약재를 보관할 크기라면 벽장 안쪽이 가장 건조하다.
서인녀가 벽장을 다시 열었다. 겹옷과 속옷 사이를 손으로 짚어 들어갔다.
벽장 맨 안쪽 벽면. 판자 하나가 살짝 들려 있었다.
손톱을 틈에 걸어 당겼다. 판자가 밀리며 뒤로 움푹 파인 공간이 드러났다. 축축한 흙 냄새가 섞였다.
그 안에 함이 있었다.
서인녀가 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손가락 두 마디 폭. 나무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다만 뚜껑 가장자리가 오래 사용한 듯 매끄럽게 닳아 있었다.
열었다.
종이에 싸인 작은 잔여물들이 칸칸이 나뉘어 있었다. 말라붙은 약재 찌꺼기들. 회흑색을 띠고 촉감이 매끄러운 가루가 가장 많은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은엽초 분말.
서인녀가 손가락으로 아주 조금 찍어 검시침 천 위에 올렸다. 달빛에 비추자 회흑색이 드러났다. 십오 년 전 모후의 탕약에 들어 있던 것과 같은 성분. 공식 처방에는 결명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들어 있던 독초.
손끝이 조금 떨렸다.
함을 닫았다. 소매 속 깊숙이 밀어 넣고 벽장 판자를 원래대로 덮었다. 방 안의 흔적을 훑었다. 탁자 위 먼지 자국까지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 지웠다.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동궁 별채를 빠져나와 내의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마른 돌바닥에 낮게 울렸다. 정전 쪽에서 올라오는 군졸들의 외침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아직도 혼란은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약재고 앞 좁은 회랑.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그늘진 통로였다.
설 내관이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서인녀가 걸음을 멈췄다. 설 내관의 탁한 황색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늘 졸린 듯이 보이는 그 눈이 오늘따라 또렷했다.
“정전의 상황을 들으셨습니까.”
서인녀가 물었다.
“예.”
설 내관이 짧게 답했다. 손이 천천히 가동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비단 주머니였다. 바래고 낡은 자주색 비단이었다. 주머니를 열자 말라붙은 약재 찌꺼기가 드러났다. 한약 냄새는 이미 거의 빠져나가고, 바스라질 듯 마른 조각들만 남아 있었다.
서인녀가 소매 속 함을 꺼내 탁 트인 부분에 놓았다.
뚜껑을 열자 설 내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회흑색 분말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은엽초.”
서인녀가 말했다. 설 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린 동작이었다.
“십오 년 동안 가지고 계셨습니까.”
“예.”
한 박자 쉬었다.
“탕약을 씻은 자가, 저였습니다.”
설 내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순찰 기록을 읽어줄 때처럼 정확한 어조였다.
서인녀가 숨을 들이켰다. 십오 년 전 모후의 탕약 그릇을 씻은 자. 이운의 품에 있던 기거주기 누락 쪽. 배합 비망록 속 은엽초 석 냥, 그 부자 한 냥 반. 그리고 이 약재 찌꺼기.
두 개의 물증은 같은 배합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인녀가 비단 주머니를 받아 함 안에 넣었다. 뚜껑을 닫았다. 소매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것으로, 모후의 마지막 탕약에 결명자는 없었음이 입증됩니다.”
설 내관이 벽에서 몸을 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구부정한 등이 평소보다 더 굽어 보였다. 손등에 벼루처럼 갈라진 주름이 깊게 패 있었다.
“이제, 할 일을 다했습니다.”
서인녀가 그를 똑바로 보았다.
“보호를 약속드립니다. 설 내관께서 전해주신 이 물증은——”
한 걸음 다가섰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반드시 정전에 세우겠습니다.”
설 내관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했으나 대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작고 깊게 패인 눈동자가 바닥을 향했다.
서인녀가 돌아섰다. 검시침이 소매 안에서 약재 함 옆으로 밀려 자리를 잡았다.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회랑을 걸어 나왔다. 약재고 앞 그늘에서 정전 방향을 바라보았다. 군졸들의 횃불이 멀리 흔들리고 있었다.
두 개의 물증이 품 안에 있었다. 하나는 십오 년 동안 벽장 뒤에 숨겨져 있던 것. 다른 하나는 씻은 자의 침묵 속에 갇혀 있던 것.
서인녀가 허리춤을 짚었다. 은비녀가 차갑게 손가락에 닿았다.
검시관 신분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 물증과, 물금초목부에서 증명한 배합의 논리뿐이었다.
고개를 들었다. 발걸음은 정전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