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동의 지배자
2화
다음 날 오전, 헌터 협회 저층 복도.
윤재하는 복도 중앙을 따라 걸었다. 양옆 벽에는 게이트 모니터들이 낮은 파형을 그리고 있었다. 바닥 대리석을 통해 냉방 장치의 둔탁한 진동이 부츠 밑창으로 올라왔다. 던전 안이었다면 사방에서 밀려드는 정보였을 텐데, 바깥 공기 속에서는 방향도 거리도 잡히지 않는 희미한 울림이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헌터 두 명이 걸어왔다. 왼쪽의 중년 남자가 윤재하의 전술 재킷을 훑더니 동료에게 팔꿈치로 찔렀다. 입술이 'F등급'이라고 움직였다. 오른쪽의 젊은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회피하며 윤재하를 지나쳤다.
윤재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젯밤에 같은 반응을 열 번 넘게 마주했다. 협회 저층 로비에서 접수대를 떠난 뒤부터 출구까지, 그리고 오늘 아침 복도 입구에서 지금까지. 그들은 윤재하를 보고서 항목 하나로 취급했다.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 F등급 노이즈.
갑자기 발소리가 뒤에서 다가왔다. 경량 부츠의 진동이 바닥을 타고 전달됐다.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리듬. 윤재하가 돌아서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강서윤이었다. 숨이 약간 차 있었다. 복도 저편 구석에서부터 달려온 모양이었다. 왼손에 쥔 소형 태블릿이 손가락의 힘에 눌려 테두리가 희게 질렸다.
강서윤의 오른손이 허리 높이에서 반쯤 올라왔다. 수화를 시작하려는 동작이었지만, 손가락이 그 자리에서 멎었다. 눈이 윤재하의 목 왼쪽에 박혔다. 폭발 흉터의 불규칙한 경계선을 따라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 그 경계 끝에서 손가락을 마저 접지도 펴지도 못한 채 허공에 선을 그렸다.
“...윤재하.”
강서윤의 목소리는 입술을 열었다 닫는 사이에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녀는 태블릿을 벨트에 꽂고 양손을 들어 올렸다. 수화가 천천히 시작됐다.
오른손 검지로 가슴을 찍었다. ‘나’. 양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가 옆으로 벌렸다.
‘파티’.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렸다가 앞으로 밀었다. ‘돌아가자’.
동작 하나하나가 정확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떨림이 스며들었다. 강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검지의 진동 신호 반지가 복도 조명을 받아 깜빡였다.
윤재하가 반 걸음 물러섰다. 허리에 찬 장갑 가죽이 벨트에 스쳤다. 그는 강서윤의 손을 따라가지 않았다. 몇 초 뒤에야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펴서 이마 높이에서 오른쪽으로 휙 쳤다. ‘아니’. 다음 수화는 더 간결했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은 뒤 바깥으로 밀어내고, 왼손을 오른손이 가리켰다. ‘혼자’.
“...어떻게.”
강서윤의 손이 다음 단어로 넘어가기 전에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수화와 말이 뒤엉켰다. 그녀는 태블릿을 다시 집어 들고 재빨리 무언가를 입력하려다 멈췄다. 태블릿을 다시 내렸다. 두 손 모두 허리께에서 움직이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강서윤은 윤재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어제 로비에서의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두 뺨의 혈색이 옅어졌다. 그녀가 손을 올려 수화를 이으려던 순간, 윤재하가 먼저 손을 움직였다.
오른손 검지를 귀 옆에서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그었다. ‘듣지 못함’. 이어지는 동작은 강서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같은 손을 주먹 쥐고 엄지손가락을 펴서 가슴 앞으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렸다. ‘약점’. 그리고 이내 양손을 엇갈리게 저으며 왼손을 오른손 위로 올렸다.
‘아니다’. 마지막으로 검지 두 개를 나란히 앞으로 내밀었다. ‘함께’.
손바닥을 펴서 위로 향하게 했다. ‘강하다’. 손가락 끝이 정확하게 꺾이고 펴져 공기를 갈랐다.
강서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녀는 윤재하의 손가락이 마지막 자세를 풀 때까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진동 신호 반지의 빛이 그녀의 가만히 떠 있는 손등 위로 반사됐다.
긴 침묵이 흘렀다. 복도 모니터들이 낮게 웅웅거렸다. 강서윤은 조용히 태블릿을 벨트에 다시 꽂았다. 입술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피로했던 경계가 걷히고 안도와 놀라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윤재하는 장갑을 꺼내 끼었다. 가죽이 손가락 마디에 밀착되며 익숙한 압력을 주었다. 복도 저편으로 몸을 돌렸다. 강서윤이 그의 뒤에서 조용히 따라붙었다. 발소리의 리듬이 윤재하의 걸음과 같은 박자로 맞춰졌다.
정오 무렵, 최영우의 비공식 연구실은 형광등 빛이 푸르스름하게 내리쬐는 지하 공간이었다. 벽면을 따라 진동 측정 장비가 케이블로 엮여 있었고, 책상 위에는 모니터 세 대가 서로 다른 파형을 띄우고 있었다.
최영우는 중앙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딱, 딱, 딱. 은테 안경에 부착된 소형 디스플레이가 녹색 숫자를 흘려보냈다. 왼손 약지의 측정용 반지가 키보드 입력을 따라 깜빡였다.
화면에는 사일런트 게이트 외벽에서 채취한 진동 그래프가 펼쳐져 있었다. 헌터 협회 게이트 모니터가 던전 외벽의 진동 그래프를 실시간 관찰하는 표준 채널에서 끌어온 데이터였다. 대부분의 구간은 저등급 필드 특유의 무질서한 잡음 패턴을 보였다.
그런데.
최영우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래프 중간, 타임스탬프 14:32:07 지점에서 파형이 급변했다. 무작위 잡음이 갑자기 규칙적인 정현파로 수렴했다. 진폭은 작았지만 주파수가 안정적이었다.
“이건…….”
그는 마우스로 해당 구간을 확대했다. 파형의 봉우리와 골짜기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됐다. 3.4헤르츠 대역. 생물의 심장박동이나 발걸음에서 나오는 진동이 아니었다. 너무 규칙적이었고, 너무 오래 지속됐다.
최영우는 옆자리 모니터로 실리케이트 크롤러의 표준 핵 공명 주파수를 불러왔다. 실리케이트 크롤러의 핵은 생존 시 일정한 주파수로 공명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파형은 크롤러의 공명 주파수와 겹치면서도, 그 위에 더 미세한 제2의 진동이 중첩되어 있었다.
확대할수록 패턴은 더 선명해졌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박자를 맞춘 것처럼, 메인 진동과 서브 진동이 서로를 회피하지 않고 정확히 포개졌다. 일반적인 던전 내 물리적 진동에서는 나올 수 없는 정밀도였다.
“비정상적 공명…….”
최영우가 중얼거렸다. 안경 디스플레이의 숫자가 더 빠르게 갱신됐다. 그는 손목의 소형 측정 장치로 해당 주파수 대역을 자체 분석기에 입력했다. 차원 균열 이론에서 예측하는 간섭 패턴과 94% 일치했다.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실험실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용 단말을 꺼냈다. 수화 번역 앱을 켜고, 윤재하의 연락처를 눌렀다. 문자 입력창이 열렸다.
'윤재하 헌터님. 사일런트 게이트 진동 데이터에서 이론상 불가능한 공명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지금 오실 수 있습니까. 연구실에서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전송 버튼을 누른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최영우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제2의 진동은 여전히 그래프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연구실 문이 열리고 강서윤이 먼저 들어왔다. 포니테일로 묶은 갈색 머리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그녀는 벨트의 소형 태블릿을 한 번 만지작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여기야.”
윤재하가 문을 통해 들어섰다. 검은 전술 재킷의 칼라가 여전히 목 왼쪽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연구실을 한 번 훑고는 최영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최영우는 두 사람을 중앙 모니터 앞으로 안내했다.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려 그래프를 최대화했다.
“오길 잘했습니다. 이걸 보시죠.”
그가 화면을 가리켰다. 14시 32분대의 진동 파형이 봉우리와 골짜기를 반복하며 떠올랐다.
“여기, 실리케이트 크롤러의 핵 공명 주파수와 일치하는 메인 파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위에.”
마우스 커서가 메인 파형의 골짜기를 따라 움직였다. 그 아래로 더 가느다란 선이 포개져 있었다.
“제2의 진동이 중첩돼 있습니다. 주파수 3.4헤르츠. 던전 내부의 자연 진동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주목할 점은 이 서브 진동이 메인 진동과 완전히 동기화돼 있다는 겁니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증폭하고 있어요.”
강서윤이 허리를 숙여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그녀의 오른손 검지에서 진동 신호 반지가 형광등 아래 한 번 깜빡였다.
“이게 무슨 뜻이야, 연구원님?”
“아직 가설 단계입니다만…….”
최영우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말을 골랐다.
“이런 패턴은 보통 두 개의 독립된 진동원이 아니라, 하나의 진동원이 다른 진동원에 공명을 일으킬 때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크롤러의 핵이 진동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강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던전 핵?”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사일런트 게이트 내부에서는 생명체와 물체가 내는 진동이 특수 주파수로 증폭된다고 알려져 있죠. 이 서브 진동은 그 증폭 과정에서 발생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증폭 이전의 원천 신호에 더 가깝습니다.”
윤재하는 조용히 그래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파형의 봉우리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 검지가 화면 위를 가리켰다.
3.4헤르츠 구간. 서브 진동이 시작되는 정확한 지점이었다.
강서윤이 재빨리 태블릿을 켜서 수화 번역 앱을 띄웠다. 윤재하의 왼손이 움직였다. 손가락이 짧게 꺾이며 단어를 만들었다.
이거. 알고 있다.
최영우의 눈이 커졌다.
“무엇을 말입니까?”
윤재하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가지런히 펴서 손목에 댄 뒤, 왼손을 펼쳐 가슴 앞에서 떨었다. '감지'. 이어 양손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폈다. '패턴'.
이 패턴을 감지했다.
강서윤이 태블릿을 보며 번역을 읽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졌다.
“던전 안에서?”
윤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왼손이 다시 움직였다.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펴고, 손가락 끝으로 공기를 두드리듯 짧은 진동을 표현했다.
“발바닥으로요?” 강서윤이 번역을 확인하고 물었다.
끄덕임.
최영우는 숨을 들이켰다. 안경 디스플레이의 녹색 숫자가 그의 심박수를 따라 올라갔다. 그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빠르게 두드렸다. 딱딱딱.
“이건…… 이건 그냥 진동 감지가 아닙니다. 헌터 협회 표준 측정으로는 F등급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지만, 지금 이 그래프와 일치하는 감각이 가능하려면——.”
그는 말을 멈췄다. 너무 성급한 결론이었다. 대신 키보드를 두드려 또 다른 그래프를 띄웠다.
실리케이트 크롤러의 핵이 파괴된 시점 이후의 파형이었다. 메인 진동은 사라졌지만, 서브 진동은 0.7초 더 지속됐다. 몬스터의 핵이 파괴되면 공명 진동이 멈추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이건 멈추지 않았다.
“보십시오. 핵 파괴 이후에도 서브 진동이 잔존합니다. 크롤러의 핵이 진동원이었다면 동시에 소멸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건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는 신호입니다.”
강서윤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이게 던전 핵의 진동이란 거야?”
“그 가능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최영우가 윤재하를 돌아봤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사일런트 게이트에 들어가서, 이 진동을 확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연구실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형광등의 미세한 진동이 장비들의 금속 케이스에 닿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떨림을 퍼뜨렸다.
윤재하는 그래프를 한참 바라봤다. 손가락 끝으로 화면의 파형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크롤러의 메인 진동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과, 서브 진동이 미세하게 어긋나는 간극. 마치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의 공백 같은 리듬이었다.
던전 안에서 발바닥으로 느꼈던 그 미세한 떨림. 해석하지 못했던 신호가 그래프 위에서 같은 모양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던전의 진동과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
왼손이 올라왔다. 검지와 중지를 곧게 펴서 가슴 앞으로 내밀고, 엄지를 접었다.
다시.
이어 오른손 주먹을 쥐고 왼손 검지로 손등을 두드렸다. 그대로 양손을 펼쳐 바깥으로 밀어냈다.
증명할 것이다.
강서윤이 태블릿을 보며 조용히 번역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어졌다.
윤재하의 손가락이 모니터 화면 위에서 멈췄다. 서브 진동의 마지막 잔향이 그래프에서 사라지는 지점이었다. 그 순간, 손끝으로 아주 희미한 정전기가 느껴졌다. 실제 정전기인지, 아니면 그가 기억하는 던전 바닥의 떨림이 손끝으로 되살아난 것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이 신호는 아직 닫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