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12화
의금부 검안실은 아침부터 어두웠다.
창호지 너머로 햇살이 희끄무레하게 번졌지만, 시신을 눕히던 돌침대 옆 탁자까지 닿지는 못했다. 서화연은 촛불 하나를 더 켜고 필사본을 폈다. 밤새 정리한 은비녀 반출입 기록과 내명부 보관소에서 발견한 촉탁 도장 행이 나란히 접혀 있었다.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 관모를 벗지 않은 채 걸어 들어왔다. 평소보다 눈 깜빡임이 느렸다. 왼손에 전갈지 한 장을 쥔 채였다.
서화연은 필사본을 탁자 위로 밀었다.
“읽어보셔야 합니다.”
이현은 앉지 않았다.
“을미년 시월 초이튿날. 폐비전에서 대비전으로 은비녀 이동. 사유는 문양 수리. 반환 기록은 없습니다. 그 후——”
그녀는 두 번째 접힌 종이를 폈다.
“해당 은비녀에 촉탁 도장.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 위치는 현재도 대비전.”
이현의 시선이 필사본에 닿았다.
“모란 문양. 순도 구분.”
서화연은 잠시 멈췄다.
“폐비의 은비녀입니다. 산대청 별감이 알고 있던 은비녀는——”
“멈추시오.”
이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음 낮았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펴졌다.
“은비녀 기록을 어떻게 구했소.”
“내명부 보관소에서 직접 확인했습니다. 심수련 상궁의 도움으로.”
서화연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이현의 관자놀이에서 흰머리 몇 올이 촛불을 받았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대비전은 폐비 사건 이후 7년간 은비녀를 은닉한 겁니다. 산대청 별감은 그걸 알고 있었고——”
“서 검율.”
이현이 전갈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대비전 인장이 선명했다.
“대비전에서 오시 전까지 출두하라는 전갈이 왔소. 사건 종결 보고를 요구하며.”
서화연의 손끝이 멎었다.
“종결이라면 장서윤이 어젯밤——”
“독살당했소. 유치장에서.”
이현은 짧게 말했다. 전갈지 옆에 필사본이 나란히 놓였다.
정적. 촛농이 촛대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화연이 천천히 일어났다.
“알고 계셨습니까. 대비전이 은비녀를——”
“추측은 수사가 아니오.”
이현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러나 발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오른손이 전갈지를 반으로 접었다.
“기록을 조사한 건 인정하오.”
한 박자.
“하지만 지금 이걸 공식 기록으로 제출하면 의금부 전체가 대비전과 정면 충돌하게 되오.”
서화연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면 정면 충돌해야 합니다. 증거가 이렇게——”
“증거는 아직 연결되지 않았소.”
이현은 전갈지를 소매 안에 넣었다.
“은비녀 기록은 대비전 내부 문서. 촉탁 도장의 발급 사유는 규정상 확인할 수 있으나, 살인 사건과의 직접 연관은 입증되지 않았소.”
서화연이 입을 열려는 순간, 이현이 먼저 말했다.
“윤공께 보고하고 오겠소.”
그는 이미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화연은 필사본을 접어 품에 넣었다. 은침 세트가 팔뚝에 차갑게 닿았다. 이현의 뒷모습이 검안실 문턱을 넘는 것을 보며, 그녀는 전갈지의 대비전 인장보다 이현의 굳은 어깨를 더 오래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은비녀 기록을 본 순간의 표정. 전갈을 받아든 손의 떨림.
문이 닫혔다.
서화연은 촛불을 끄지 않았다. 대신 발소리를 죽여 이현의 뒤를 따랐다.
도사 집무실은 의금부 청사 가장 안쪽에 있었다.
서화연은 복도 기둥 뒤에 몸을 붙였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윤공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앉게.”
의자가 끌리는 소리. 이현은 앉지 않은 듯했다. 발소리가 멈춘 그 자리에 그대로 선 기색이었다.
“대비전 전갈은 받았나.”
“예.”
이현의 목소리는 검안실에서보다 더 짧았다.
“사건은 종결한다. 산대청 별감 독살은 단독 범행이었고, 유치장에서 용의자는 죄책감으로 독을 입에 넣었다. 검시 기록은——”
윤공이 잠시 멈추었다.
“서화연의 대필이 아니라 검시관 본인의 것으로 정정할 명분이 생겼군. 검시관이 유배에서 풀려나면 모두가 좋은 일이지.”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이현이었다.
“은비녀 말인가.”
윤공의 어조가 바뀌었다. 가벼웠다.
“폐비 사건 때 자네를 유배에서 건져 의금부에 앉힌 게 누군가. 산대청 별감의 검시관 임명도, 지난 3년간 자네의 모든 인사 뒤에는 내 손이 있었네.”
서화연의 등이 기둥에 딱 붙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경력. 나는 자네의 빚을 말하는 게 아니야.”
윤공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의 전부를 말하는 거지.”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복도 바닥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은비녀 기록은 오늘 중으로 내명부에 반납하게. 산대청 사건은 종결이다.”
윤공의 발소리가 문 가까이 다가왔다.
“대비전 마마께서 자네의 보고를 기다리시네. 오시 정각.”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두 글자뿐이었다.
발소리가 안쪽으로 물러났다. 윤공이 집무실 깊은 곳으로 돌아갔다. 서화연은 기둥 뒤에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품 안의 필사본이 체온에 닿아 따뜻했다. 촉탁 도장. 모란 문양. 그리고 지금 들은 모든 말.
이현이 윤공에게 빚을 졌다. 7년 전 폐비 사건 때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 빚 때문에 지금 대비전의 사건 은폐에 침묵하고 있었다.
서화연은 복도를 빠져나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더 이상 의문이 아니었다. 이현은 대비전의 압력을 받는 게 아니라, 자기 발로 윤공의 집무실에 가서 종결을 받아들였다.
은비녀는 증거가 아니었다. 인질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검안실 촛불이 아직 깜빡이고 있었다. 필사본을 품에 단단히 여미며, 서화연은 그 불빛을 향하지 않고 바깥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이 기록은 의금부에 제출할 수 없었다.
의금부 청사 앞마당은 쌀쌀했다.
아침 햇살이 채 내려앉기 전, 관복 차림의 하급 관원 하나가 대문을 밀었다. 등 뒤로 최 상궁이 섰다. 대비전 지밀상궁의 자색 당의가 바람 한 점 없는 마당에서도 무겁게 드리웠다.
그 손에는 대비의 서찰이 들려 있었다.
“의금부 경력 이현, 검율 대리 서화연은 대비전 마마의 전언을 받드시오.”
최 상궁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마당을 가로지르는 울림이 있었다.
이현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관복 매무새는 곧았으나 두어 걸음의 보폭이 평소보다 짧았다. 서화연도 그 뒤를 따랐다. 입술이 바짝 말랐다.
최 상궁이 서찰을 펼쳤다.
“산대청 별감 독살 사건은 증거 부족과 용의자 사망으로 실체적 진실을 가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마당 석판에 떨어지는 돌멩이 같았다.
“대비전 마마께서는 더 이상의 궁중 소요를 우려하시어, 본 건의 공식 수사를 즉시 종결하라 분부하셨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움찔했다.
최 상궁은 서찰을 반 접었다.
“관련 기록 일체를 봉인하고, 증거물 중 은비녀는 본 건과 직접적 연관이 없으므로 내명부로 반납하도록 한다.”
침묵이 무거웠다. 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경력께서 직접 수거하시지요.”
최 상궁이 이현을 바라보았다. 눈꼬리엔 미소라기보다 행정을 처리하는 자의 느긋함이 얹혀 있었다.
서화연이 반 걸음 나섰다.
“증거물 인계는 의금부의 공식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최 상궁의 시선이 서화연 쪽으로 옮겨졌다.
“절차라.”
“은비녀는 아직 검증이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내명부 반납은—”
“검율 대리.”
이현의 목소리가 낮게 끼어들었다.
서화연이 숨을 멈췄다.
“물러서시오.”
두 글자였다. 명령이었다.
이현은 서화연을 보지 않았다. 최 상궁도, 대문 밖을 지키는 대비전 하인들도 보지 않았다. 그저 마당 한복판의 공허를 응시할 뿐이었다.
서화연의 뺨에 핏기가 가라앉았다.
“경력께서 지금—”
“인계하겠소.”
이현이 최 상궁에게 손을 내밀었다. 증거물 봉함 상자를 받는 동작에는 지체가 없었다. 검은 관복 소매가 쓸리며 상자가 건너갔다.
서화연의 시야 가장자리가 붉게 흐려졌다.
최 상궁이 은비녀 상자를 받았다. 포장된 비단 보자기를 펼쳐 내용물을 확인하는 손끝이 꼼꼼했다. 은비녀의 모란 문양이 잠깐 빛을 받아 번뜩였다.
“수고하셨소.”
최 상궁이 몸을 돌렸다. 대문을 나서는 뒷모습에 대기하고 있던 하급 상궁 하나가 따랐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마당에 정적이 찾아왔다.
서화연은 굳은 채 서 있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현이 뒤돌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서화연은 입을 열지 못했다. 이현도 말하지 않았다. 가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쓸고 지나갔다. 낙엽 몇 점이 마당 석판 위를 굴렀다.
서화연이 먼저 몸을 돌렸다. 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오후의 의금부 복도는 인적이 드물었다.
들보 위로 스며든 햇살이 길게 기울었다. 서화연은 복도 중간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등은 벽에 붙이지 않았다. 두 손을 소매 아래로 모은 채 곧추섰다.
이현의 발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들렸다. 윤공과의 면담 후였다. 걸음걸이는 여전히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신발 끌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깊었다.
이현이 서화연 앞을 지나치려는 순간, 서화연이 옆으로 반 걸음 움직였다. 복도의 폭이 좁아졌다.
이현이 멈췄다.
“오늘 오전.”
서화연의 목소리는 복도에서도 작게 울렸다.
“증거물을 인계하는 데 걸린 시간이, 면담 준비보다 짧더군요.”
이현은 침묵했다.
“반대할 기회도, 질문할 기회도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현의 눈동자가 서화연을 향했다. 회색 기운은 빛이 닿지 않아 거의 검었다.
“사건 종결 지시는 대비전 마마의 명이었소.”
“명이면 따르는 게 의금부입니까.”
이현의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펴졌다.
“사건과 관련 없는 물품은 내명부로 반납되는 게 원칙이오.”
“관련 없음을 누가 판단했습니까.”
서화연의 말이 칼날처럼 얇았다.
“최 상궁입니까, 윤공 나리입니까.”
한 박자.
이현이 숨을 들이켰다.
“아니면 경력께서 판단하셨습니까.”
이현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대리.”
“장서윤은 대비전 상궁이 은비녀를 가져갔다고 말했습니다. 그 직후 죽었습니다.”
서화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은비녀는 대비전의 물품이 아닙니다. 촉탁 도장이 찍혀 있었습니다. 누군가 그걸 감추고 있었습니다.”
이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검지를 접으려던 동작이 중단됐다.
“촉탁 도장을 보셨소.”
물음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의 시선이 복도 들보를 스쳤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내명부 기록은 의금부 관할이 아니오.”
“그래서 대비전에 빼앗겨도 무방합니까.”
이현이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서화연은 이현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찾는 듯 바라보았다.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깜빡임의 타이밍, 검지의 멈춤.
“목격 기록.”
서화연의 음성이 약간 낮아졌다.
“산대청 별감이 죽기 전에 남긴 목격 내용 말입니다. 경력께서 그걸 수색하셨을 때—”
“그런 기록은 없었소.”
이현의 대답이 너무 빨랐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쉬었다.
“저는 기록의 내용을 묻지 않았습니다.”
복도가 조용해졌다. 이현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입술을 다물었다.
서화연이 반 걸음 다가섰다. 거리가 한 자 정도로 좁혀졌다.
“존재 자체가 없는 건지, 존재해도 없는 걸로 하신 건지.”
이현의 아랫입술이 당겨졌다. 검지가 다시 접혔다 펴졌다. 세 번. 빠르게.
“경력께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더 이상 의심이 아닙니다.”
서화연의 말은 조용했으나 끝이 날카로웠다.
이현은 말하지 않았다. 얼굴 근육 하나가 관자놀이 부근에서 뛰었다.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서화연이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스스로 증명하셨으니까요.”
그녀의 손이 내려갔다. 이현의 소매에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사건 관련 문서는 모두 봉인되었고, 은비녀는 대비전으로 갔습니다.”
서화연의 눈이 이현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증거를 숨기실 거면 확실히 숨기셨어야 했습니다.”
돌아서는 동작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결정처럼 단호했다.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서화연은 이현의 집무실 방향으로 걸었다.
이현은 그 자리에 섰다. 고개가 무겁게 떨어졌다.
이현의 집무실은 비어 있었다.
서화연은 문을 닫지 않았다. 서쪽 창으로 오후의 햇살이 밀려들어 방 안을 반쯤 밝혔다. 탁자 위에는 정리된 문서 더미와 먹통, 붓꽂이만 놓여 있었다.
서화연은 탁자 앞에 섰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소매 속에서 아까 필사본을 만지던 손가락이 아직 차가웠다.
서랍이었다. 왼쪽 첫 번째 칸이었다.
오전에 이현이 증거물을 인계하던 손의 위치, 최 상궁이 서찰을 펼칠 때 이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던 각도, 복도에서 기록의 존재를 부인하며 검지를 너무 빨리 접던 타이밍.
서화연은 손잡이를 당겼다.
서랍 안은 정갈했다. 상단에 공문서 몇 부. 그 아래로 작은 목재 함 하나.
서화연은 목재 함을 꺼냈다. 뚜껑을 올렸다.
산대청 별감의 직인이 찍힌 봉투였다. 봉인은 그대로였다. 황색 밀랍 위에 '별감 인' 글자가 선명했다. 찢지 않은 봉투의 무게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실렸다.
서화연은 봉투를 움켜쥐었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봉인은 풀지 않았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답이었다. 이현이 숨긴 기록. 그가 부인하며 접었던 검지, 은비녀를 건네면서도 피하지 않았던 침묵의 무게.
서화연은 봉투를 품에 넣었다.
창밖으로 기울어진 햇살이 그녀의 손등 위에 가로로 길게 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