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14화

다음 날 아침, 의금부 도사 집무실.

이현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윤공의 호출은 예상보다 일렀다.

“들게.”

문을 열자 윤공은 탁자에 팔을 얹고 앉아 있었다. 앞에는 종이 한 장. 붓은 먹을 머금은 채 놓여 있었다. 아직 쓰지 않은 빈 종이였다.

윤공이 턱짓했다. 이현은 문을 닫고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 앉지 않았다.

“어젯밤 대비전에서 전갈이 왔네.”

윤공의 손가락이 탁자 모서리를 한 번 두드렸다.

“산대청 별감 건은 경수소의 순찰 기록 착오로 종결한다. 네 검시 기록도 그에 맞춰 정리하고.”

이현의 시선이 탁자 위 빈 종이에 닿았다. 먹은 이미 갈려 있었다.

“착오가 아니었습니다.”

윤공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찰 기록 중 해시 3각 부분만 찢겨 있었습니다. 착오가 아니라 의도적—”

“경력.”

윤공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했다.

“네가 발탁된 지 이제 3년이다. 그 사이 궁중 독살 사건을 세 건이나 처리했지. 검시관으로서 실적도 흠이 없고.”

윤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가 차양을 조금 내렸다. 방 안의 빛이 반쯤 줄었다.

“7년 전, 네가 유배지로 끌려가던 날을 기억하나.”

이현의 턱이 굳어졌다.

“그때 너를 정직 처분으로 돌린 게 누구였더냐.”

침묵.

“한 번 더 말해보게.”

“……도사님이셨습니다.”

“그래.”

윤공이 돌아섰다. 두 사람 사이에 한 걸음 반 거리.

“나는 인재를 아까워할 줄 안다. 하지만 보호에도 한계가 있지. 네가 이 사건을 더 파면 대비전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손 검지가 허벅지 옆에서 접혔다 펴졌다.

“알겠소.”

윤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지못한 수긍을 기대했던 것보다 더 빨리 나온 대답이었다.

“종결 문서는 오늘 중으로 올리게.”

“예.”

이현이 허리를 굽혔다. 방을 나서는 그의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문이 닫혔다.

윤공은 탁자 앞에 다시 앉아 붓을 집었다. 종이 위에 한 자 적고 붓을 놓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다른 서류로 옮겨가 있었다.

같은 날 오전, 의금부 서리청.

대청에는 평소보다 말소리가 적었다. 하급 서리 둘이 귓속말로 무언가 주고받다가, 서화연이 들어서자 입을 다물었다. 한 서리가 서류 뭉치를 들고 급히 옆방으로 빠져나갔다.

서화연은 자기 자리로 걸어가며 들었다.

“종결 처리래. 경수소 기록 착오로 났다더군.”

“별감 건 말이오?”

“그래. 어제 대비전 전갈이—”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서화연의 시선이 닿자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서화연은 책상 앞에 섰다. 손가락 끝이 서늘해졌다. 품속에는 어젯밤 심수련이 남긴 말이 아직 생생했다. 그리고 탁자 위에 펼치지도 못한 목격 기록 사본.

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려 복도 쪽으로 걸었다.

후원 회랑은 인적이 드물었다. 겨울을 앞둔 나뭇가지만 바람에 흔들렸다.

서화연은 회랑 기둥 뒤에 서서 기다렸다. 윤공의 집무실에서 나온 이현이 이쪽으로 오는 길이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기둥에서 한 걸음 나왔다.

“이 경력.”

이현의 걸음이 멈췄다. 얼굴을 보는 순간, 서화연은 그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았다. 입가가 평소보다 얇게 다물려 있었다.

“잠시.”

서화연이 회랑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서리청 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였다.

이현이 따라왔다. 두 사람 사이에 한 발 정도의 거리가 남았다.

“종결 명령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수소 기록 착오로 처리하랍니까.”

“……그렇소.”

서화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목격 기록 사본이었다. 아직 펼치지 않았다.

“어젯밤 동맹을 제안했을 때, 세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현의 시선이 종이에 닿았다.

“첫째, 저를 속이지 않을 것.”

서화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둘째,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공유할 것.”

그녀가 반 걸음 다가섰다. 종이를 펴지 않은 채 들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 만에, 종결 명령을 받고 아무 말 없이 복도로 나서셨군요.”

“명령이었소.”

“거절할 수 있었습니까.”

이현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화연은 그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못 하신 거군요.”

“……윤공께 빚이 있소.”

이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7년 전, 내가 유배될 뻔했을 때 구해준 분이오. 그 은혜가 아직—”

이현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서화연의 표정이 바뀌었다. 분노가 아니라,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한 빛이 스쳤다.

“그래서 산대청 별감의 목격 기록을 숨긴 겁니까.”

이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윤공께서 그 서류를 요구하셨소. 증거물 목록에서도 빠졌고.”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넘기셨군요.”

“거절할 위치가 아니었소.”

서화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좋습니다. 당신의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녀가 종이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 기록이 남아 있다는 걸 저는 압니다. 그리고 저는 어젯밤 거기 적힌 내용을 보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일부만 보여드리겠소.”

서화연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일부만?”

“기록 전체를 공개할 순 없소. 하지만 당신이 찾는 단서가 있다면, 그 부분만.”

서화연은 잠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오른손 검지가 허벅지 옆에서 접혔다.

“거래로군요.”

“……거래라기보다.”

이현이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당신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위험해질 사람이 있소.”

서화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누굽니까. 윤공입니까. 아니면 저입니까.”

이현이 침묵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서화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주십시오. 그 부분만이라도.”

이현이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원본의 일부를 필사한 것이었다. 그가 종이 한쪽을 접어 특정 부분만 보이게 했다.

서화연이 받아 들었다.

필체는 깔끔한 해서체였다. 별감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진술을 옮겨 적은 기록이었다.

“……시월 초이튿날 밤, 폐비전 쪽 복도에서 자색 당의 차림의 최상궁 한 명이 은비녀를 든 채 대비전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봄. 왕림의 시간보다 이르게 지나감에 의문 품었으나 직후—”

거기서 기록은 접혀 보이지 않았다.

서화연은 종이를 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은비녀를 든 최상궁.”

그녀는 낮게 되뇌었다.

“대비전 소속은 기록에 없었습니다.”

이현이 대답했다.

“폐비전의 상궁일 가능성이 높소.”

서화연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움직였다. 자색 당의, 폐비전, 대비전 방향. 그리고 최상궁. 대비전 지밀상궁의 자색 당의가 떠올랐다.

“최상궁입니다.”

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비전 지밀상궁. 그날 밤 폐비전에 갈 이유가 있는 인물이오.”

“장서윤도 최상궁이 유치장에 면회 온 직후에 죽었습니다.”

서화연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능성은 있소. 하지만 최상궁은 대비전의 핵심 인물이다. 접근이 쉽지 않소.”

“알고 있습니다.”

서화연이 접힌 종이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이제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이현이 종이를 받아 품에 넣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이현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보여준 것은 일부일 뿐이오. 나머지는… 아직.”

서화연은 그 말 속에 숨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지키려는 것. 보호하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윤공만을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전부 보여주실 겁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잠시 서화연의 얼굴에 머물렀다.

서화연은 그 시선에서 답을 읽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회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오래 기다리진 않겠습니다.”

바람이 회랑을 지나갔다. 서화연의 소매가 흔들렸다. 이현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왼손 검지가 접혔다. 펴졌다. 다시 접혔다.

점심 무렵의 해가 사가의 좁은 마당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이현이 대문 빗장을 걸었다. 쇠가 돌에 긁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서화연은 마당을 가로질러 서재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관복 차림 그대로였다. 의금부에서 나와 곧장 이곳으로 왔다는 뜻이었다.

서재는 예상보다 좁았다. 벽 한 면을 채운 서가에는 법전과 판례집이 빼곡했고, 탁자 위에는 청원지 몇 장과 먹물이 마른 벼루가 놓여 있었다. 이현은 서가 맨 아래 칸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뚜껑을 열자 청원지 특유의 희미한 약쑥 냄새가 번졌다.

“기록은 여기 있소.”

이현이 상자 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산대청 별감의 목격 기록 원본이었다. 서화연은 한 걸음 다가섰다. 이현이 기록 위에 손을 얹었다.

“일부만 보여드리겠소. 사건 당일, 별감이 본 것. 그것만.”

“일부라면.”

“은비녀를 든 상궁에 관한 구절이오.”

서화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현은 이미 준비한 듯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청원지에 옮겨 적은 사본이었다. 먹물 냄새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 방금 전에 쓴 것.

“나머지는 보여드릴 수 없소.”

“기록 전체를 봐야 별감이 무엇을 보고, 누구에게 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되오.”

이현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서화연은 사본을 받아 들었다. 얼핏 보아도 원본의 5분의 1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왜.”

“지금은.”

이현이 말을 끊었다. 상자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는 손끝이 빨랐다. 서화연은 사본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사본에는 단 여섯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중 세 번째 문장에 검지가 멈췄다. ‘은비녀를 꽂은 최상궁이 폐비마마의 처소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별감이 그날 밤 본 것입니까.”

“그렇소.”

“폐비 사건 당일 밤.”

이현은 고개를 끄덕일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서화연은 사본을 접어 품에 넣었다. 손에 익은 청원지의 감촉이었다.

“이 최상궁의 신원은.”

“기록에는 없소. 별감도 이름은 알지 못했소.”

서화연은 이현의 얼굴을 보았다. 어두운 회색 눈동자에 빛이 닿지 않았다. 기록의 범위를 줄인 것은 증거를 감추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것인지.

“그 최상궁이 누군지, 제가 알아내면 그때는 나머지 구절도 보여주시겠습니까.”

이현의 손이 서가 모서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찾아내시오. 먼저.”

그 말에는 거절보다 체념이 가까웠다. 서화연은 알고 있었다. 이현은 그녀가 이 정보를 가지고 어디까지 갈지 가늠하고 있었다. 시험하는 것인지, 보호하려는 것인지, 그 경계는 여전히 흐렸다.

서화연은 서재를 나섰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점심 해가 눈부셨다. 품속의 사본이 청원지 특유의 서늘함으로 피부에 닿았다.

저녁 무렵, 서화연의 거처.

등불을 켜고 사본을 탁자 위에 펼쳤다. 세 개의 단서는 여전히 왼쪽에 정리되어 있었다. 도자기 조각, 은엽초 약주머니. 그리고 오른쪽에 새로 놓인 목격 기록 사본.

서화연은 등불을 사본 가까이 끌어당겼다.

여섯 문장. 짧은 증언이었다. 그러나 불빛 아래서 청원지 표면의 미세한 결이 드러났다. 먹물이 종이 섬유 사이로 스며든 자리가 언뜻 보기에 평범했지만, 불빛 각도를 조금 비틀자 다른 흔적이 나타났다.

먹물이 마르면서 청원지 특유의 반응을 일으킨 흔적. 섬유 사이에서 은은하게 번진 기름기가 불빛을 받아 옅은 청색으로 빛났다.

서화연은 숨을 멈췄다.

이 현상은 일반 종이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청원지에만 반응하는 묵의 성질. 한 번 기록된 것은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종이.

이현이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록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청원지에 쓰인 기록은 위조도, 삭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현은 원본에서 일부만 발췌해 사본을 만들었다. 원본 전체를 보여주지 않은 이유.

서화연은 사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 증언은 단순한 별감의 목격담이 아니다. 청원지에 기록된 순간, 이것은 공식 문서로서의 효력을 갖는다. 누군가가 이 기록을 청원지에 옮겨 적었다는 것은, 이 증언을 물증으로 남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증언을 읽었다. ‘은비녀를 꽂은 최상궁.’

폐비의 은비녀는 지금 대비전에 촉탁 도장으로 은닉되어 있다. 그런데 사건 당일 밤, 은비녀를 든 최상궁이 폐비의 처소로 향했다. 그 후 은비녀는 폐비전에서 대비전으로 옮겨졌고, 반환 기록은 없다.

시간 순서가 맞아떨어졌다.

서화연은 별감이 말했던 다른 단서들을 기억 속에서 꺼냈다. 대비전 쪽으로 향하는 인원. 7년 전 그날 밤에 별감이 본 것.

그 최상궁이 단순한 심부름꾼이었다면, 은비녀는 바로 반환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반환이 없다. 최상궁이 은비녀를 폐비의 처소에서 직접 가져갔고, 그 후 은비녀는 대비전에 촉탁 은닉되었다.

서화연은 손가락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사건 당일 대비전을 드나든 최상궁. 최상궁. 장서윤이 독살당하기 직전에 남긴 증언과도 연결된다. 대비전 최상궁이 은비녀를 가져갔다.

심수련은 이 연결고리에서 비껴 있었다. 심수련이 은비녀의 존재를 먼저 알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사건 당일 그녀는 내의원 독초 도감 관리 업무로 대비전에 없었다. 출입 기록도, 시간도 맞지 않는다.

서화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추궁해야 할 대상은 최상궁이었다. 은비녀를 매개로 대비전이 기록을 조작한 정황. 이 사본의 청원지 흔적은 그것을 입증하는 첫 번째 물증이었다.

등불이 한 번 흔들렸다. 사본 위로 그림자가 지나갔다. 서화연은 사본을 접어 다른 단서들과 나란히 놓았다. 손가락이 청원지의 모서리를 스치자 미세한 먹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 말이 이제는 무기였다.

은비녀 아래 진실1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