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verStory

은비녀 아래 진실

16화

기록고 밖 통로는 어두웠다. 흐린 하늘 탓에 오후인데도 처마 밑이 저녁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빗소리가 기왓장을 두드리는 리듬이 한결같았다.

서화연은 통로 중간쯤에서 걸음을 늦췄다. 장내관과의 대화 이후 등 뒤에서 따라붙는 시선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느낌이었다. 왼쪽 소매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전표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찌르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둥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치마 소리도 없이 남색 그림자가 한 뼘 드러났다.

심수련이었다.

손에는 내명부 출입 전표가 들려 있었다. 기록고 열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최상궁처럼 보이기 위한 준비였다. 호박색 눈동자가 통로 양끝을 빠르게 훑고 서화연에게 닿았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렸소이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대비전 밀실에서만 쓰는 그 말투에 가까웠다. 서화연은 대답 대신 반 걸음 다가섰다.

심수련은 품 안에서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빛바랜 연분홍 비단에 오래된 매듭 끈이 달려 있었다. 궁중에서 흔히 보는 자수 주머니가 아니었다. 실의 두께와 색이 달랐다. 적어도 십 년은 묵은 물건이었다.

“연희당 수리 중에 발견한 것이옵니다.”

심수련이 주머니를 서화연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변색된 손끝이 살짝 떨렸다.

“대비전의 감시가 한층 강화되었사옵니다. 어제부로 내명부 출입 기록까지 매일 대조하라 명이 내렸소이다. 더 늦기 전에 전하는 것이 옳겠다 생각했사옵니다.”

서화연은 주머니를 손에 쥐었다. 무게가 있었다. 종이 뭉치인가. 부드러운 비단 사이로 딱딱한 사각형의 감촉이 손바닥을 눌렀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마른 냄새에 향유 비슷한 잔향이 섞여 있었다.

“내용은 보셨소니까.”

묻는 말투가 아니었다.

심수련은 입가에 미세한 굴곡만 남기고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웃은 건지 아니면 질문 자체를 접은 건지 분간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사람의 손을 떠난 지 오래된 글월은 새 주인의 손에서 비로소 입을 열곤 하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전표를 옷깃에 고쳐 꽂으며 몸을 반쯤 돌렸다.

“내명부 기록고 쪽으로 발걸음이 있소이다. 아마 한 식경 안에 누군가 이 통로를 살피러 올 것이옵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치마 밑자락 소리도 없이 남색 당의가 빗소리 속으로 녹아들었다.

서화연은 벽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비단 주머니를 두 손으로 감쌌다. 비단은 건조했지만 그 안의 종이 뭉치는 습기를 빨아들였는지 약간 눅눅했다. 손가락으로 매듭 끈을 더듬자 올이 느슨해져 있었다. 이미 누군가 풀었다가 다시 묶은 흔적이었다.

심수련이냐. 아니면 더 이전의 누군가냐.

기록고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구두 굽이 돌바닥을 규칙적으로 찧는 소리. 서화연은 주머니를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전표와 주머니가 소매 속에서 서로 닿았다. 이현의 사가에 숨겨진 원본과, 심수련이 건넨 이 물건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오래된 종이 냄새가 좀처럼 품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빗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품 안의 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졌다. 빗방울이 굵어지며 어깨와 소매 끝을 적셨지만, 서화연은 서두르지 않았다. 전표와 주머니가 걸음마다 가슴께에서 부딪혔다. 기록고 쪽에서 들리던 발소리는 이미 멀어져 있었고, 복도엔 빗소리만 가득했다.

빗줄기가 처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방 안을 더욱 좁게 만들었다.

서화연은 문을 닫고 빗장을 걸었다. 탁자 위에 비단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손끝에 옮겨붙은 빗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장내관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걸음걸이와 체구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고 들었습니다.

손이 주머니의 매듭으로 향했다. 풀었다.

주머니를 기울이자 종이 뭉치가 탁자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그을린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오래된 불 탄 자국이 가장자리를 검게 물들인 종이들. 한 장은 반쯤 타서 모서리가 없었다.

서화연은 가장 덜 손상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빗소리 속에서도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뚜렷했다. 창호지 너머로 스며드는 저녁 빛은 흐릿해 글자를 읽기 어려웠다. 그래도 붓끝의 결은 살아 있었다.

'…사약 조제 기록을 확인하였사옵니다만…'

손끝이 멈췄다.

'…은엽초의 분량이…'

심수련이 건넨 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었다. 폐비의 친필로 보이는 글씨체. 필획이 정갈하고도 힘이 있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문장 사이에 약재명과 조제 일자가 박혀 있었다.

한 장을 더 펼쳤다. 그을음이 손가락에 묻었다.

'내의원 도사 윤아무개가 가져온 탕약에서 은엽초의 냄새를 맡았사옵니다.'

은엽초. 은침을 부식시킨 독초. 산대청 별감이 취급하던 통제 약재.

심수련은 이것을 왜 지금 건넸을까.

서화연은 편지들을 가지런히 모았다. 모두 네 장. 그중 한 장은 절반만 남아 있었다. 불에 던져졌다가 건져낸 듯 가장자리가 오그라들어 있었다.

심수련은 이 편지들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폐비가 스스로 남긴 사약 조제 기록에 대한 증언. 독살의 증거. 그리고 그걸 내명부 독초 도감을 관리하던 자가 지금껏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 편지 뭉치는 심수련 자신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은엽초의 출입을 관리하던 위치에 있던 사람. 그 사람이 폐비의 사약 기록을 숨기고 있었다면.

그런데도 건넸다.

왜.

서화연은 창밖을 보았다. 장내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현의 흔들리던 표정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기록고의 전표, 최상궁의 행적, 이현이 숨긴 목격 증언, 그리고 이 편지. 각각은 흩어진 조각이었지만, 심수련이라는 인물이 그 사이를 느린 걸음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다.

정보를 쥐고 흘리는 자. 살아남기 위해 지워지지 않는 기록을 품에 숨겨온 자.

서화연은 편지 뭉치를 접어 품 안 깊숙이 넣었다. 전표와 발췌본이 이미 들어 있던 그 자리. 가슴께에 닿은 종이들이 체온을 빨아들였다.

심수련은 단순한 협력자가 아니었다. 폐비 사건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인물. 지금도 그 중심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 편지를 건넬 타이밍을 7년 동안 기다려온 사람.

등불을 켜야 했다.

서화연은 부싯돌을 찾아 탁자 옆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손끝이 등잔의 차가운 놋쇠에 닿았다.

편지 내용을 전부 해독해야 했다. '윤아무개'라는 도사의 이름. 은엽초의 조제 분량. 그리고 사약이 실제로 전달된 날짜와 경로.

불꽃이 심지에 옮겨붙자 방 안이 흔들리는 빛으로 채워졌다. 그림자가 벽면에 길게 늘어졌다.

서화연은 품에서 편지 뭉치를 다시 꺼내 등불 아래 펼쳤다. 그을린 종이의 냄새가 빗속의 습기와 뒤섞여 공중에 맴돌았다.

처소의 촛불이 반쯤 줄었을 무렵, 빗줄기가 창호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한결 굵어졌다.

서화연은 펼쳐둔 편지 뭉치를 비단 주머니에 다시 넣어 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해독은 더뎠다. 폐비의 글씨는 급하게 쓴 듯 획이 비틀려 있었고, 용어 중에는 내의원 약재명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의 지식으로는 온전히 읽어낼 수 없었다. 등불을 낮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시실로 가는 복도는 비에 젖은 흙내가 배어 있었다. 처마 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석등의 불빛을 흔들었다.

복도 중간쯤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이현이었다. 우산도 없이 맞은 비에 관복 어깨가 검게 젖어 있었다. 왼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쥔 채 걸음을 멈추고 벽 쪽으로 반쯤 몸을 기댔다. 관모 아래 이마에 빗물이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않는 듯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숨을 들이쉬는 간격이 불규칙했다. 통증을 억누르는 얼굴이었으나, 복도에 사람이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한 듯했다.

서화연의 발소리가 들리자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이현은 옆구리를 감쌌던 왼손을 재빨리 내렸다.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한 박자 늦게 어깨의 힘을 풀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그러나 젖은 소매 끝에서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손을 내린다 해도, 이미 감춘 쪽으로 힘을 줘야 하는 몸의 기울기는 지울 수 없었다.

서화연은 걸음을 멈추고 세 발짝 거리에서 섰다.

“경력 나으리.”

이현은 대답 대신 턱을 약간 당겼다. 젖은 소맷자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검시실에 늦은 시각까지 남아 계실 일이십니까.”

“서류 정리.”

짧았다. 평소처럼 덤덤했지만, 호흡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목소리였다.

서화연의 시선이 이현의 왼쪽 옆구리로 옮겨갔다. 관복 위로 감췄지만 손이 떠났던 자리가 유난히 비에 젖어 있었다. 체온으로 마르던 흔적이 아니다. 손바닥으로 누르고 있던 부분만 습기가 달랐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이현의 눈빛이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그건 분노라기보다 경계에 가까웠다.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켰을 때, 말로 덮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반응.

“오래전 일이오.”

그가 오른손으로 소매를 털며 물기를 냈다. 손끝의 떨림은 수그러들었지만 이번에는 손목 안쪽에서 힘줄이 잠깐 불거졌다. 참아내는 자세였다.

“표적 사건에서 입은 검상. 비만 오면 쑤실 뿐.”

표적 사건.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의금부 경력이 다친 건 큰 사건이었을 터인데, 관내 기록에서 본 적이 없었다.

서화연이 반 발짝 다가섰다.

“언제쯤 다치신 겁니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빗소리가 복도 지붕을 때리는 소리만 잠시 이어졌다.

“일개 서리가 알 필요 없소.”

돌아서는 동작이 빨랐다. 평소 조용한 그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감추려는 듯한 속도로 검시실 문을 열었다.

문지방을 넘어서다 잠시 멈추었다.

“야간 감시가 삼엄하니 오래 머물지 마시오.”

목소리는 다시 낮고 평온해졌다. 그러나 그 한마디 안에는 분명한 선이 있었다. 더 묻지 말라는 경계.

문이 닫혔다. 빗장을 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서화연은 복도에 그대로 서 있었다.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가 옷깃에 닿아 있었다. 폐비의 편지 뭉치. 그 안에는 내의원 약재에 관한 기록이 숨어 있다고 심수련이 말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현은 왼쪽 옆구리에 오래된 검상을 숨기고 있었다. 표적 사건이라는 말 뒤로 감춘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지금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그 부상은 단순한 추적 과정에서 입은 상처가 아니었다. 이현이 통증을 들켰을 때 보인 첫 반응은 적 앞에서 빈틈을 감추려는 무인의 그것이었다.

서화연은 천천히 검시실 문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빗줄기가 복도 바깥 석등의 불빛을 한 번 더 흔들었다.

품 안의 편지 뭉치와, 이현이 옆구리를 감쌌던 손의 떨림이 한데 겹쳐졌다. 7년 전 폐비 사건. 은비녀를 든 최상궁. 폐비의 편지에 적힌 내의원 약재명. 그리고 표적 사건이라는 말 뒤에 숨은 진짜 이야기.

실타래가 한 올 한 올 더 얽혀들었다.

은비녀 아래 진실16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