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17화
서늘한 이른 아침, 서화연은 숙소 책상 앞에 앉았다. 촛농이 굳기 전,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심수련에게서 받은 폐비의 편지 뭉치. 그을린 가장자리 사이로 바랜 먹 자국이 스몄다.
한 장씩 펼칠 때마다 낡은 종이에서 마른 약재 냄새가 희미하게 올랐다. 폐비의 친필은 정갈했으나,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획이 비틀렸다.
'…내의원 도사 윤아무개가 조제한 사약이라 하나…'
손가락이 그 구절에서 멎었다. 성만 있고 이름은 빠져 있다. 하지만 7년 전 내의원에 윤씨 성 도사가 있었는지 확인한다면, 기록은 분명 남았을 터.
편지를 비단 주머니에 도로 넣은 뒤, 필사본을 따로 접어 품 깊숙이 밀어 넣었다. 바깥 창으로 회색 빛이 밀려들었다.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의금부 기록고는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듯 어둑했다. 서화연은 문지기 서리에게 열람 신청서를 내밀었다.
“내의원 인사 기록이오. 7년 전, 도사급 이상 약관 명단을 보고자 하오.”
서리가 눈을 깜빡였다.
“내의원이면 약방 쪽 서가입니다. 삼번 통로 좌측.”
고개를 끄덕이고 긴 복도로 들어갔다. 청원지 특유의 담청색 빛이 선반마다 줄지어 있고, 먼지와 먹 냄새가 찬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약관 명단 서가 앞에 멈춰 서서, 손가락으로 첩자 목록을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을미년, 병신년. 7년 전이면 정유년, 혹은 무술년.
그녀는 정유년 첩자를 뽑아 들었다. 첫 장을 펼치려는 순간, 옆 서가에 빼곡한 기록철을 팔꿈치로 스치며 서너 권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종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기록고 안에 길게 울렸다.
허리를 굽혀 흩어진 첩자를 줍던 손이 멎었다. 익숙한 글씨.
'업서화. 채용 기록. 경신년 오월.'
자신의 기록. 한 손에는 정유년 명단을, 다른 손에는 채용 기록철을 든 채 멈춰 섰다. 일반 서리 채용 기록은 하급 관원 명부에 통합 보관해야 한다. 단독 기록철은 이례적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통로는 비어 있다.
채용 기록철을 펼쳤다. 첫 장은 표준 절차 문서. 성명, 출신지, 신원 보증인, 필적 견본. 여기까지는 평범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장을 넘기자 생소한 항목이 눈에 박혔다.
'특별 추천.'
눈이 그 두 글자에 멎었다. 의금부 서리 채용 절차는 관청 공개 시험과 신원 조회가 전부다. 특별 추천이라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아래.
'추천인:'
칸은 텅 비어 있었다. 먹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은 깨끗한 공란.
손가락으로 그 빈칸을 짚었다. 종이는 오래되었으나 청원지가 아니었다. 일반 저지. 위조라면 청원지에 남을 묵 반응 흔적 자체가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공식 기록 시스템 밖에서 이 서류를 만들었다.
게다가 추천인이 공란인 채로 채용이 승인되었다는 건, 이름을 남기지 않을 권한을 가진 자가 추천 주체였다는 의미. 의금부 내에서 가능한 인물은 손에 꼽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2년 전, 업서화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 자리는 '주어진' 것이었다. 시험 성적도, 필적도, 신원 보증도 모두 진짜 업서화의 것을 빌렸을 뿐인데, 누군가는 이미 그 빈틈을 알면서도 그녀를 밀어 넣었다.
왜.
숨이 짧게 달아났다. 고개를 들고 통로 양끝을 다시 확인했다. 아무도 없다.
채용 기록철을 원래 서가로 돌려보내려다 손을 거두었다. 장내관이 열람 흔적을 추적할 가능성. 그녀는 서가의 빈자리를 정확히 기억한 뒤, 첩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먼지 쌓인 다른 첩자들의 위치를 살짝 틀어 자연스럽게 정돈했다.
정유년 약관 명단을 다시 펼쳤으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발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다가왔다. 느리고 일정한 걸음걸이. 서화연은 명단을 든 채 몸을 돌렸다.
장내관이었다.
통로 하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오른손에는 내명부에서 올라온 문서 뭉치. 눈이 기록고 안을 천천히 훑다가 서화연에게 고정되었다.
“업 서리.”
점잖은 목소리였으나 끝음이 미세하게 끌렸다.
“요즘 부쩍 자주 들르는군, 여길.”
서화연은 명단을 덮으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장서윤 사건의 후속 검토입니다. 내의원 약재 관리 절차와 교차 확인할 부분이 남아서요.”
“아, 독살 건.”
장내관이 천천히 다가왔다. 손에 든 문서를 옆 서가에 내려놓는 사이, 시선이 약관 명단과 그녀가 서 있던 서가 쪽으로 번져갔다.
“내의원 약관 명단은 사번 통로에 있지 않던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자는 기록고 배치를 훤히 꿰고 있었다.
“아직 찾는 중입니다. 기록 분류가 좀 조정된 모양이라……”
“그런가.”
입꼬리가 한 올쯤 올라갔다.
“그런데 삼번 통로는 서리 채용 기록이 보관된 구역이기도 하지.”
서늘한 정적.
서화연은 명단을 품 쪽으로 당겼다.
“채용 기록이 이쪽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약재 명단을 찾느라.”
“물론 그랬겠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눈은 떠나지 않았다. 손가락이 서가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업 서리 필체가 참 정갈하더군. 필적 견본을 다시 보니 새삼 놀랐네.”
시선을 내리깔았다. 장내관은 필적 견본이 있는 채용 기록 서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찬이십니다.”
한 걸음 물러서며 명단을 품에 안았다.
“업무가 있어 이만.”
“그래, 방해하지 않겠네.”
사양하는 제스처였지만, 등 돌려 복도를 걸어나가는 내내 그의 시선은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기록고 문을 나서는 순간,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품 안에서 정유년 명단과 함께 채용 기록의 빈 란이 맥박처럼 뛰었다.
복도는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북향. 바닥 돌이 습기를 머금어 군데군데 색이 짙었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검은 관복의 등이 보였다. 이현. 윤공의 집무실 방향에서 막 나오는 참이었다.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어깨에 긴장이 실려 있고, 두 손은 소매 안에서 꼼짝 않았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마주쳤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곧게 다물렸다.
서화연이 먼저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경력 나리. 어제 건네받으신 폐비의 편지에 내의원 도사 윤씨가——”
“오늘은 곤란하오.”
목소리가 예상보다 낮았다. 문장을 자르는 속도가 빠르고, 끝음이 딱딱하게 떨어졌다.
“내일 다시 하세.”
몸을 틀어 왼쪽으로 비껴 서더니 반대편 복도로 걷기 시작했다. 서화연의 눈이 무심코 그의 옆구리를 쫓았다. 예전에 통증을 감추던 자리. 지금은 소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이현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답도 없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검은 관복은 단호하게 닫힌 문 같았다.
서화연은 그 자리에 섰다.
이현은 회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질문엔 질문으로 답하고, 곤란한 일은 곤란하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 그가 입을 닫은 것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윤공의 집무실. 그곳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 대화가 이현을 바꿔 놓은 것은 분명했다.
천천히 발을 옮겨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한 손에는 정유년 명단. 다른 손은 품 안으로 들어가 필사본의 모서리를 만졌다. 그 아래 채용 기록철의 빈 추천인 란이 떠올랐다.
이름 없는 누군가가 그녀를 의금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현은 그녀와 거리를 두라는 압박을 받고 있었다. 장내관은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한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녀가 이 자리에 있기를 원했고, 다른 누군가는 물러나기를 바랐다.
발걸음이 복도에 닿을 때마다 돌에 스민 한기가 신발 밑창을 타고 올랐다.
밤. 숙소에 촛불 한 점이 켜져 있었다.
책상 앞에 앉아 필사본과 약관 명단을 나란히 펼쳐 놓았지만, 손은 기록으로 가지 않았다. 시선은 촛불 심지 끝에 묶여 있었다.
2년 전, 의금부에 들어왔다. 죽은 자의 신분으로 살아남은 몸이 검시 서리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을 그동안 운이라 여겼다. 필적이 비슷했고, 얼굴 아는 자가 없었고, 검안 실력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러나 운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를 의금부 안으로 들여보냈다. 이유는 모른다. 목적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 누군가는 신원을 감출 만큼 권한 있는 자이며, 지금 폐비 사건을 추적하는 이 모든 발걸음이 처음부터 설계된 길 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폐비의 편지 뭉치를 펼쳤다.
촛불 받은 종이 위로 바랜 글씨가 떠올랐다. 마지막 장, 가장자리가 타서 사라진 구절.
'진실을 아는 자는 반드시 나타나리라.'
먹 자국이 불빛에 반짝였다. 폐비는 이 편지를 쓸 때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진실을 좇을 누군가가 반드시 나타나리라는 것을.
서화연은 종이 위로 천천히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나 이 진실이 스스로 찾아낸 것인지, 찾도록 이끌린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촛불이 심지에서 한 번 흔들렸다. 어둠이 방 구석에서 한 뼘 다가왔다. 손가락이 편지의 마지막 글자 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바깥 복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은 조용했으나, 그 고요 속에서 무언가 막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문득,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에서 촛불이 다시 요동쳤다.
서화연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문밖에서 낮고 짧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서 있었다. 이내 문고리를 두드리는 손가락 소리가 세 번.
“업서리, 나요.”
이현의 목소리였다.
서화연이 일어나 문을 열자, 어둠을 등진 검은 관복이 서 있었다.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가려졌으나 눈빛만은 선명하게 다가왔다.
“낮에는 미안했소. 지금이라도, 편지 이야기를 들려주시오.”
서화연이 물러서며 길을 내주자, 그가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촛불이 다시 몸을 떨며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닥에 얽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