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18화
밤이었다.
서화연은 이현의 사가 담장 아래서 숨을 골랐다. 검은 망토가 어깨를 감쌌고, 발아래 흙은 낮 동안 마른 진흙이었다. 의금부 쪽방에서 이현의 귀가 시간을 확인한 지 두 시진. 경력의 집무가 늦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담장은 키를 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벽돌 사이 틈을 더듬자 오래된 흙이 부스러졌다. 두 번의 호흡 뒤 몸을 끌어올렸다. 착지는 무릎을 굽혀 소리를 죽였다. 마당 한쪽에 쌓인 낙엽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서재는 안채 왼편에 붙어 있었다. 문지방에 검은 구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서화연은 품에서 작은 기름 종이를 꺼내 문 빗장 홈에 발랐다. 몇 번 밀어보자 소리 없이 빗장이 밀려났다. 문을 열자 마른 나무 냄새와 먹물 냄새가 섞여 코 끝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도 서가의 윤곽은 선명했다. 서화연은 문을 닫고 불을 켜지 않았다. 창가로 스며든 달빛이 탁자 위 검은 관모를 비출 뿐. 아침에 벗어둔 것인지 먼지가 얇게 앉아 있었다.
수색은 책상부터 시작했다. 서랍을 열자 정리된 문서철이 줄지어 있었다. 산대청 별감 건은 이미 종결된 서류 맨 위에 얹혀 있었다. 은비녀 언급은 한 줄도 없다.
서화연은 이를 악물었다. 알고 있었다. 이현이 이런 곳에 숨길 리 없다는 것을.
서가로 발길을 돌렸다. 법전, 형률집, 검시록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손가락이 책등을 훑었다. 먼지가 쌓인 순서가 일정했다. 정기적으로 뽑아본 흔적은 《내명부 직제》 한 권뿐이었다.
그 책을 빼내자 뒤편 벽돌 하나의 결이 달랐다.
서화연의 숨이 멈췄다. 손가락으로 벽돌 모서리를 눌러보았다. 좌우 벽돌보다 살짝 들어가 있었다. 손톱을 틈에 밀어 넣자 벽돌 전체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빈 공간 안에 작은 목함이 놓여 있었다. 사방 세 치 남짓, 뚜껑은 밀랍으로 봉해져 있었다. 봉인은 이미 뜯겨 있었다. 한 번 열렸던 것이다.
서화연은 목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뚜껑을 열자 삼나무 향이 올라왔다. 안에는 낱장으로 접힌 첩자가 한 권. 종이를 꺼내 달빛 아래 펼쳤다.
청원지였다.
먹물에서 은은한 기름기가 푸르게 빛났다. 첫 줄에는 증인 진술 녹취라 적혀 있었다. 서화연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쳐나갔다.
경수소 소속 순라군 박아무개의 진술
을미년 시월 초이튿날 밤, 해시 2각 무렵.
소인은 산대청 북측 담장을 따라 순찰 중이었다.
그때 내명부 서화각 방향에서 걸어오는 여인 하나를 보았다.
서화연의 손가락이 굳었다. 서화각. 그곳은 심수련이 속했던 처소였다.
여인은 상궁 복색이었으며, 왼쪽 옷깃에 은비녀 하나를 꽂고 있었다.
달빛에 반사된 문양으로 보아 내명부 상급 상궁의 것이 분명했다.
손끝이 떨렸다. 다음 줄.
그 상궁은 빠른 걸음으로 빈 전각, 곧 옛 폐비마마의 처소 쪽으로 향했다.
소인은 의아했으나 상궁의 이동을 막을 권한이 없어 그대로 통과시켰다.
약 반 각 뒤, 같은 상궁이 폐비마마의 처소에서 나와 대비전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때 상궁의 손에는 작은 보자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서화연은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 줄.
그리고 인시 말경, 산대청 후원에서 별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서화연은 첩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은비녀를 꽂은 상궁.
서화각 소속.
폐비의 처소에 드나들었다.
세 가지 사실이 촘촘히 들어맞았다. 그 상궁은 심수련이었다. 이현은 이것을 알고도 서화연에게 단 여섯 문장만 건넸다. 그중 '서화각 소속'이라는 구절은 완전히 삭제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심수련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서화연이 이 정보를 가지고 대비전까지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서화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지난 며칠 사이 이현은 세 번이나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기록을 건네면서도, 최상궁 이야기를 꺼낼 때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모든 순간 이 손에는 이미 답이 쥐어져 있었다.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마당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멎었다. 이어 대문이 열리는 소리, 낮고 짧은 인사말. 걸음걸이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서화연은 몸을 돌렸다. 첩자를 품속에 밀어 넣을 틈도 없이 서재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
검은 관복 차림 그대로,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있었다. 불빛이 서화연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등불을 든 손만이 움직임을 멈췄을 뿐, 다른 모든 근육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서화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 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등불이 그녀의 손등에 맺힌 땀을 비추었다.
이현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빗장 걸리는 소리가 났다.
“왜 이곳을 뒤졌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눈빛만이 빈 목함과 열린 벽돌 구멍으로 번져갔다.
서화연은 품에서 첩자를 꺼내 들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으나 목소리는 갈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당신이 숨긴 진실인가.”
청원지가 등불 아래 푸르게 빛났다.
이현의 시선이 첩자에 머물렀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 폈다, 한 번. 그가 침묵 속에서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오는 유일한 버릇이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화연이 한 걸음 다가섰다.
“서화각 소속 상궁. 은비녀를 차고 폐비마마의 처소에 들어갔다. 당신은 그 상궁의 이름을 알았을 터.”
이현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회색 기운이 도는 검은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왜 심수련이라는 이름을 지웠습니까.”
등불이 심지에서 한 번 튀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번졌다.
이현이 입을 열었다. 한마디, 짧게.
“알고 있었소.”
서화연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첩자의 종이가 구겨졌다.
“언제부터입니까.”
“처음부터.”
말이 칼날처럼 방을 갈랐다. 서화연의 숨이 짧게 끊겼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으나, 그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은 다른 종류의 충격이었다.
“앞선 사건. 당신이 발췌본을 준 순간.”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심수련이 폐비마마의 편지를 가져온 것도 예상하고 있었소.”
“……뭐라 하셨습니까.”
“의금부에 출입하는 내명부 인물은 심수련 하나뿐이오. 이중 인장 전표를 다루던 자도, 독초 도감을 관리하던 자도 그 여자였소. 수사가 산대청 별감에서 대비전 쪽으로 번지면, 반드시 움직일 줄 알았소.”
“그러니까 당신은.”
서화연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심수련을 미끼로 저를 시험했군요. 편지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소.”
이현의 대답은 빈틈이 없었다. 오히려 그 완벽한 직설이 서화연의 분노를 더 크게 부풀렸다.
“편지와 목격 증언이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았소.”
“……알았소.”
“그럼에도 기록을 숨겼소. 제가 틀린 길로 가는 걸 지켜보기만 했소.”
침묵.
벽에 걸린 등불이 다시 요동쳤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려는 기척이었다.
“이유를 묻겠습니다.”
서화연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제 둘 사이는 한 팔 거리도 채 남지 않았다.
“지금 말하시오. 당신은 누구를 지키려 했습니까.”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피하지 않았다.
“그대.”
짧은 한마디였다. 서화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비전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아오. 별감은 입을 열었기에 죽었소. 상궁도, 서리도 다를 바 없소.”
“그러니까 당신은 혼자 사건을 품고, 혼자 진실을 묻으려 했습니까.”
이현의 오른손이 다시 검지를 접었다. 이번에는 더 느리게.
“기록을 전부 공개하면 그대는 반드시 대비전으로 향할 것이오. 나는……”
말이 끊겼다. 이현의 시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킨 기색이 역력했다.
서화연은 그 침묵을 뚫고 나아갔다.
“당신은 나를 보호한다고 믿었소. 하지만 당신이 한 일은 나를 눈먼 채로 앞으로 밀어넣은 것뿐이오.”
첩자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청원지가 바람 없는 방 안에서도 스스로 반짝였다.
“그리고 이 기록을 숨긴 대가로, 당신에 대한 나의 모든 신뢰가 사라졌소.”
이현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뻗으려다 만 손가락이었다.
정적이 방을 채웠다. 등불이 심지에서 한 번 더 튀고, 창밖에서는 첫 빗방울이 낙엽 위로 떨어졌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