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비녀 아래 진실
19화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서화연은 첩자를 탁자 위에 펼쳐 두고 이현을 똑바로 보았다. 촛불이 창밖 빗소리에 맞춰 가늘게 떨렸다. 목격 기록의 청원지가 불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기름기를 띠었다.
“이 기록 속 최상궁.”
서화연의 손가락이 증언의 한 구절을 짚었다. 은비녀를 꽂은 최상궁이 폐비의 처소에서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는 대목이었다.
“당신은 누군지 알고 있었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창밖을 보는 눈빛만 움직였다.
“내명부에서 독초 도감을 관리하던 최상궁. 은엽초의 출입 전표에 인장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서화연은 말을 끊지 않았다.
“심수련이오.”
이현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그 최상궁이 심수련이라는 걸 알면서도, 당신은 이 기록을 벽 속에 묻었소.”
이현의 손이 팔짱에서 풀렸다. 오른손 검지가 살짝 접혔다.
“확신은 없었소.”
“확신이 없었던 게 아니라, 확신해도 숨겼을 거요.”
서화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분노는 식지 않았지만, 떨림만은 사라져 있었다.
“당신은 내게 사본을 줬소. 그런데 그 사본에는 최상궁이 폐비 처소에 갔다는 구절만 있었지,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는 대목은 없었소.”
이현이 입을 열었다.
“산대청 별감을 죽인 자가 대비전이라면.”
한 걸음 다가섰다.
“지금 그 기록을 공개해도, 증거 부족으로 묻히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오.”
서화연은 첩자에서 손을 떼고 이현을 향했다.
“당신은 감히 대비전을 건드리지 못하는 거요. 7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무엇을 아시오.”
이현의 말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첫 음절이 조금 빨랐다.
“당신이 7년 전 폐비 사건 당시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오. 그러나 윤공이 당신을 유배에서 구했다는 사실은 알게 됐소.”
이현의 표정이 굳었다. 1초의 침묵.
“그래서 침묵했소? 은혜를 갚기 위해 진실을 묻었소?”
이현의 턱 근육이 살짝 올라붙었다.
“대비전은 증거 하나로 무너지지 않소. 상대를 알아야 이기오.”
“언제까지?”
서화연이 반문했다. 대답은 없었다.
“별감은 입을 열어 죽었소. 장서윤도 유치장에서 독살됐소. 당신은 기다리자고만 하오. 증거가 모일 때까지, 때가 올 때까지.”
서화연의 시선이 이현의 왼쪽 옆구리에 닿았다. 관복 아래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그가 무의식중에 손을 대는 부위였다.
“당신은 이미 알았을지도 모르오. 검시 기록에 뭔가 있다는 걸.”
이현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소. 나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서화연은 첩자를 집어 들었다. 손으로 말아 품에 넣는 동작이 느렸다. 약속하듯, 선언하듯.
“당신이 두려워하는 게 대비전이든, 윤공이든, 7년 전 당신이 한 어떤 일이든.”
품속의 첩자가 옷깃 안쪽에 닿았다.
“이제는 내가 묻겠소. 당신이 못 하는 질문을.”
이현의 눈빛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격노도, 체념도 아닌 무언가가 스쳤다.
“그러다 죽소.”
“이미 죽을 고비는 넘겼소.”
서화연은 뒤돌아섰다. 서재 문을 향해 두 걸음.
“기다리시오.”
달라진 어조였다.
서화연은 멈춰 섰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 기록을 가져가면……”
이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돌아올 수 없소.”
“알고 있소.”
문이 열리고 닫혔다. 빗소리가 다시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빗줄기가 잦아들 무렵, 사랑채 바깥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말발굽 소리.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촛불은 이미 절반 넘게 타 있었다.
문을 박차는 소리가 아니라, 익숙한 노크였다. 두 번, 한 박자 쉬고, 한 번. 의금부 도사의 신호.
이현이 문을 열자 윤공이 빗물을 묻힌 채 서 있었다. 검은 망토 어깨가 젖어 있었다. 뒤로 수행원 둘이 횃불을 들고 대문 밖에 멈춰 섰다.
“들어가겠네.”
윤공은 이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사랑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현은 한 걸음 물러서며 길을 텄다.
사랑방 안. 윤공은 젖은 망토를 벗어 탁자 옆에 걸치며 자리에 앉았다. 이현은 마주 앉지 않고 선 채로 물었다.
“새벽인데 무슨 일이십니까.”
윤공은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밀었다. 붉은 밀랍 봉인이 찍힌 체포 밀지였다. 대비전의 인장이 선명했다.
“읽어보게.”
이현은 집어 들지 않았다. 봉인만 확인했다.
“서리 하나를 체포하는 데 밀지라니.”
“서리가 아냐.”
윤공의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렸다.
“대비전에서 네 서리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네. 필체 대조, 체구 차이, 채용 기록의 추천주 공란. 그리고……”
말을 끊고 이현을 올려다봤다.
“여성 신분이라는 정황 증거까지.”
이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증거가 불충분하오.”
“대비전 마마께서 판단하시기에 충분했나 보지.”
윤공은 밀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동틀 때까지 그 서리를 내게 인계하게. 명령이네.”
“야밤에 체포할 이유가 뭐요.”
이현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절차대로 하자면, 먼저 의금부 판관에게 체포의 타당성을 심의받아야 하오.”
“네가 절차를 말할 처지인가.”
윤공의 눈빛이 변했다. 노회한, 그러나 진심 어린 빛.
“7년 전, 네가 유배지에서 죽어가던 밤을 기억하나.”
이현의 어깨가 굳었다.
“눈이 쌓인 감옥에서 열이 끓던 그 계집애를, 내가 끌어냈네. 네 죄목을 정직으로 낮춘 것도 나였고. 그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나.”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가 천천히 접혔다 펴졌다.
“나는 네 편일세. 그러나 이번 건은 대비전 마마께서 직접 나선 일이야. 네가 그 서리를 감싸면……”
윤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현의 어깨를 짚었다. 빗물에 젖은 손이 차가웠다.
“너까지 함께 간다.”
사랑방 옆, 서재 문 뒤.
서화연은 문틀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두 겹의 문이 대화를 명료하게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굵직한 단어들은 새어 들어왔다. 체포 밀지. 여성 신분. 동틀 때까지.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떨리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대비전이 움직였다. 그렇다면 장내관이 기록고에서 보였던 경고도, 추천주가 공란인 채용 기록도 전부 큰 판의 일부였다. 자신의 신분은 이미 의심을 넘어 표적이 되어 있었다.
“동틀 때까지.”
윤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리를 뜨는 기척이었다.
“네 사가 밖에 내 부하들을 둘 테네. 도망칠 생각은 말게.”
발소리가 멀어졌다. 대문이 닫히는 소리.
서화연은 품속의 첩자를 다시 만졌다. 청원지의 서늘한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서재 문이 열렸다. 이현이었다. 서화연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둘 사이에 촛불 하나가 깜빡였다.
“들었소.”
서화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동틀 때까지 시간이 있소.”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화연은 그 침묵을 새로운 지도처럼 살폈다.
이현이 천천히 손을 들어, 벽에 걸린 자신의 검을 떼어냈다.
“뒷문으로 가시오.”
서화연이 눈을 깜빡였다.
“뒷문 밖 골목 끝에 심수련의 궁녀가 대기하고 있소.”
서화연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짐작했던 이름이었으므로.
“검은.”
“내가 맡겠소.”
이현은 검집을 품 안쪽에 비껴 찼다. 동작은 빠르고, 망설임이 없었다.
“시간을 버시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한성부를 벗어나시오.”
서화연은 뒷문을 향해 한 걸음 옮겼다. 멈칫, 돌아보려는 어깨가 움직였다. 그러나 멈췄다.
말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빗줄기는 그쳐 있었다. 구름 사이로 별빛 한 점이 열려 있었다.
사랑방 창밖이 아직 캄캄했다. 동트기까지 한 시진 남짓.
서화연은 목격 기록을 두 손으로 쥔 채 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현이 바깥쪽 방문을 닫고 돌아왔다. 그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급했다.
“윤공은 밖에 있소.”
이현이 말했다. 손을 소매 안으로 넣었다.
“동틀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소. 그 시간이 지나면 바로 들어올 겁니다.”
서화연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그럼 나는 여기서 잡히겠군요.”
이현은 대답 대신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청동빛 작은 패 하나와 접힌 옷감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졌다.
“이 출입패로 후문을 나가시오.”
서화연의 시선이 패에 머물렀다. 이현 본인의 의금부 출입패였다.
“당신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가 뒤쪽 담장을 따라가면 작은 문이 하나 있소. 밖은 바로 약국 뒷골목으로 이어집니다.”
이현은 옷감을 펼쳤다. 내관들이 입는 짙은 감색 겉옷이었다. 소매가 좁고 기장이 짧아 발목까지 오지 않는 옷.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오. 관복보다 눈에 띄지 않을 것이오.”
서화연이 일어섰다. 목격 기록을 든 손이 소매 아래로 떨렸다.
“도피를 도우시면 당신은 어떻게 됩니까.”
이현의 눈이 잠시 깜빡였다. 그 짧은 순간 등불 빛에 회색 기운이 스쳤다.
“나는 의금부에 남을 것이오. 원래 있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답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 않으시잖소.”
“압니다.”
이현은 겉옷을 서화연 쪽으로 밀었다.
“지금 잡히면 모든 진실이 다시 묻힙니다. 네가 살아서 진짜 증거를 찾아야 하오.”
사랑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비는 그쳤지만 바람이 창틀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화연은 겉옷을 받지 않았다. 대신 이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제 와서 나를 구하느냐.”
그 말이 방 안에 박혔다.
이현이 숨을 들이쉬었다. 오른손 검지가 접혔다가 펴졌다. 한 번. 다시 한 번. 그는 탁자 모서리를 짚었다.
“침묵이 부패였다면.”
이현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평소보다 말이 느렸다.
“방관도 부패다.”
서화연의 손이 겉옷 위로 올라갔다. 천천히, 아직 망설이는 손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소. 기록을 숨겼소. 나를 시험했소.”
“그렇소.”
“그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지금은 왜 도망치라는 겁니까.”
이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탁자에 짚은 손가락이 희어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가, 이내 풀렸다.
“그대가 찾은 기록은 진짜요. 내가 숨긴 것도 진짜요.”
그가 서화연을 바라보았다.
“둘 다 부정하지 않소. 다만 하나만 더 말하겠소.”
서화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은 말을 이었다.
“기록을 숨긴 목적은 그대를 지키기 위함이었소. 결과는 그대의 신뢰를 잃는 것이었습니다만.”
그가 고개를 약간 꺾었다. 관자놀이의 흰머리가 촛불에 스쳤다.
“지금 그대를 보내는 것도 같은 목적이오. 하지만 방법은 다르겠소. 숨기는 대신, 그대가 스스로 갈 길을 정하게 할 것이오.”
서화연은 겉옷을 들어 올렸다. 감색 천이 그녀의 손끝에서 무게 있게 늘어졌다.
“내가 가면 당신의 체포 시한을 어긴 죄가 윤공에게 돌아갑니다.”
“그건 내 몫이오.”
이현이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서화연을 향한 채 다시 말했다.
“서둘러 주시오. 동트기 전에 골목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서화연은 자신의 관복을 벗기 시작했다. 서둘렀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 허리띠를 풀고 소매를 벗어 의자 등에 걸쳤다. 관모를 마지막으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내관용 겉옷은 예상보다 잘 맞았다. 어깨가 약간 남았지만, 어둠 속에서는 눈에 띄지 않을 차이였다.
서화연은 목격 기록을 접어 겉옷 안쪽 품에 넣었다. 청원지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가슴께에 닿았다. 출입패를 손바닥에 쥐었다.
“옷은 나중에 돌려드리겠소.”
이현이 뒤돌았다. 그 눈이 서화연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 손을 들어 문 쪽을 가리켰다.
“따르시오.”
이현의 사가는 제법 깊었다. 사랑방을 나서서 좁은 복도를 지나고, 주방 옆 작은 문을 통과하고, 장독대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흙바닥에 조용히 묻혔다.
후문은 참으로 작았다. 한 사람이 겨우 옆으로 빠져나갈 만한 틈이었다. 이현은 빗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쇠가 돌에 긁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이 열렸다. 바깥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슬비에 젖은 흙과 골목의 밤공기.
이현이 한 걸음 물러섰다.
“골목을 오른쪽으로 계속 가시오. 중간에 갈래길이 세 개 있소. 모두 왼쪽으로 꺾으면 약국 뒷골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더 갈 길은 그대가 정하시오.”
서화연은 문지방에 한 발을 올렸다. 잠시 멈추었다.
“이현 나으리.”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이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서화연은 문 밖으로 몸을 빼내고, 발꿈치로 흙을 딛고, 마침내 완전히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빗장이 다시 걸리는 소리가 났다.
이현은 후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탁자에 짚은 손가락 사이로 옆구리에서 둔중한 통증이 번지고 있었다. 비가 그쳤는데도 통증은 더 깊었다.
손이 무의식적으로 옷깃 안으로 들어갔다. 왼쪽 옆구리, 갈비뼈 바로 아래. 손가락 끝이 오래된 흉터의 결을 더듬었다. 검흔의 살결은 주변보다 단단하고 차가웠다.
그는 손을 거둬들였다. 호흡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의금부에 나가야 한다. 평소와 같은 시각에, 평소와 같은 관복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탁자 위에서 관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길은 아직 어두웠다. 하늘 가장자리에 첫 빛이 스미기 시작했지만, 좁은 길 바닥까지는 닿지 않았다.
서화연은 출입패를 소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목격 기록이 품 안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이현의 사가는 이미 닫힌 후문뿐이었다. 어둠 속에 녹아든 담장 너머로 서재의 등불이 마지막으로 한 번 깜빡였다. 불빛이 창호지를 물들였다가 스러졌다.
바람 한 점 없이 적막했다.
골목길 반대편,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났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걸음.
서화연이 몸을 돌렸다.
그림자 속에서 한 궁녀가 걸어 나왔다. 왼쪽 옷깃에 낮은 등급의 은비녀가 어렴풋이 빛났다. 그녀는 묵례를 올리고 작은 약주머니 하나를 서화연 쪽으로 내밀었다.
“심상궁님께서 보내셨습니다.”